민어 어떻게 잡는지 아요? 들으믄 아조 놀랠 것인디

황호택 2023. 9. 12. 11: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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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해의 보석, 신안 천사섬 4] 홍매화와 튤립의 섬 임자도

신안군에는 1004개의 섬이 있다. 1004는 날개 달린 천사다. 신안군은 천사 조각상 1004개를 세우고 있다. 섬 하나에 천사가 하나다. 그 섬들에 가면 생명이 꿈틀대고 역사가 흐르며 자연이 숨 쉬고 낭만이 넘실댄다. 미래의 역사·문화·환경 자원으로 각광 받는 신안 1004섬. 그 매력을 새롭게 만나는 연중기획을 시작한다. 황호택 KAIST 문술미래전략대학원 겸직교수와 이광표 서원대 교수가 매주 1회 집필한다. <기자말>

[황호택]

임자도는 민어(民魚)의 섬이다. 이름에 백성 민(民)자가 들어 있지만 서민 밥상에는 오르기 힘든 생선이었다. 민어는 7~9월에 많이 잡히는 고급 어종. 여름철 보양식으로 서민은 개를 먹고 부자 양반은 민어를 먹었다.

임자도 해역은 민어의 먹이인 새우가 풍부했다. 잘 먹고 살이 찐 민어는 진흙과 모래가 섞인 갯벌에 알을 낳았다. 임자도 바로 앞 대태이도를 타리섬이라고 했다. 그래서 임자도 파시(波市, 고기가 한창 잡힐 때에 바다 위에서 열리는 생선 시장)는 타리 파시로 불렸다.

<동아일보> 임봉순 기자는 1928년 8월 17, 18일자에 걸쳐 연재한 기행문에서 '농가 한 채만 있던 타리섬에 파시가 서면 기둥을 듬성듬성 세우고 거적과 이엉을 두른 가건물이 수백호 생겨 어부가 수천 명이 드나들었다'고 썼다.
 
 대광해수욕장에 있는 민어상은 바닷물 위로솟구치는 형상이다.
ⓒ 황호택
서해안의 다른 파시들이 1970년대에 대부분 사라졌지만 민어 파시는 타리에서 이웃 재원도로 옮겨가 1980년대 후반까지 존속했다. 파시 때는 섬과 섬 사이를 뱃전을 밟으며 건너갈 정도로 어선이 몰려들었다. 1912년 원불교를 창시한 소태산 대종사 전기에는 구도(求道)하기 전 타리 파시에서 민어잡이 어부들에게 생필품을 파는 장사로 돈을 벌어 작고한 부친이 진 빚을 갚았다는 이야기가 나온다.

출력이 높은 엔진을 장착한 어선들이 등장하면서 타리가 포구 기능을 상실했다. 동력어선들은 어장에서 내륙의 항구로 바로 이동했다. 안강망 등 어업기술의 발달로 민어의 씨가 마르게 된 것도 파시가 사라진 주요 원인 중 하나.

바닷 밑바닥에서 움직이는 민어는 어군탐지기로 분간이 쉽지 않다. 조상 때부터 내려온 '울대' 또는 '울통'이라고 불리는 3m 길이의 대롱을 지금도 쓴다. 바닷물 속에 대롱을 집어넣고 한쪽 끝을 귀에 바싹 붙여 소리를 듣는다.

초심자에게는 민어 울음과 바람, 파도 소리가 뒤섞여 구분되지 않지만 경험 많은 어부의 귀에는 '부~욱 부~욱' 하는 민어 울음 소리가 들린다. 민어가 부레를 부풀렸다 줄였다 하면서 내는 소리다.
 
 길이 81cm, 8kg 민어를 배낚시로 잡았다.
ⓒ 홍성수
민어는 등살 꼬리살 뱃살 껍질 등 부위에 따라 맛이 다르다. 부레와 지느러미도 버릴 것이 없다. 부레는 쫄깃쫄깃해서 오래 씹어야 한다. 부레는 접착제를 만드는 데도 쓰였다. 갯바람에 말려 찜으로 조리하거나 계란을 발라 민어전을 부쳐 먹는다. 민어를 말린 암치는 방망이로 두드리면 고기가 솜처럼 부풀어 올라 고급 술안주로 인기.
한강 마포로 실어가던 전장포 새우젓
 

임자도 북쪽 끝에 있는 전장포는 새우젓의 대명사. 임자도 부근은 바닷속에 모래가 많은 천혜의 새우 서식지. 전장포에서 나는 백화새우는 색깔이 곱고 희다. 전장포 새우가 전국 새우 어획량의 60~70%를 차지했다. 조선시대에 전장포 새우젓은 서해를 통해 한강 마포로 실어갔다. 전장포에는 그때의 유물인 마포독(옹기)이라는 가마터가 남아 있다.
 
 전장포 도찬리 솔개산에는 새우젓을 숙성시키는 동굴이 있다.
ⓒ 황호택
 
임자도 근해에서 잡은 새우를 뭍으로 가져가 젓을 담그면 신선도가 떨어진다. 주민들은 전장포 현지에서 천일염으로 젓을 담가 도찬리 솔개산 기슭 동굴에서 숙성시켰다. 지금도 젓갈을 저장하고 있는 동굴이 4개나 남아 있다.

동굴은 길이 100m, 높이 2.4m, 너비 5m 규모. 임자도 주민의 생활사와 관련된 소중한 근대문화유산이다. 전장포 부두에는 대학입시에 잘 나오는 곽재구 시인의 '전장포 아리랑' 시비가 서 있다.

'꼬막 껍질 속 누운 초록 하늘/못나고 뒤엉킨 보리밭 길 보았네… 서러운 우리나라 앉은뱅이 섬들 보았네'
 
 2023년 임자도 대광해변에서 열린 마장마술 경기에 선수들이 출전하고 있다.
ⓒ 황호택
  
해마다 5월이면 임자도에서 승마축제가 열린다. 임자도에 조선시대 말 목장이 있던 전통을 잇는 축제다. 승마축제 시즌에는 선수단과 관광객이 몰려 임자도에서 방을 구하기가 어렵다. 신안군에서 소개해준 최강 해설사가 투 잡으로 모텔을 경영했다. 그는 젊은 시절 내 기사의 애독자였다. 그 덕으로 방을 구했다.

너비 300m, 길이 12㎞의 대광해변은 썰물 때 면적이 100만 평에 이른다. 대광해변 모래는 입자가 곱고 단단해서 말발굽이 파묻히지 않는다. 지난 시절에는 경비행기들이 착륙할 정도였다.

파도가 철썩거리는 광활한 해변에서 벌어지는 승마대회는 경마장에서 관람하는 대회와는 분위기가 다르다. 올(2023년) 대회에서는 말 한 마리가 경기 중 갈피를 못 잡고 깊은 바다로 들어가 경비정이 해변으로 유도해 구출했다. 말이 바다에서 헤엄을 치는 것은 진풍경이었다.

전라도 남쪽 섬지방에는 날씨가 따뜻해 겨울철에도 목마가 먹을 풀이 자랐다. 조선시대에는 남도의 여러 섬에 목장이 있었다. 임자도 말 목장은 둘레가 30여 리(12km)나 됐다. 목장을 뛰쳐나간 말 떼가 농민들의 경작지를 훼손하는 일이 잦아 백성들의 원성이 높았다.

성군(聖君) 정조는 임자도 수군진의 보고와 민원을 수용해 임자도 말 목장을 철폐하고 백성들에게 농사를 지으라고 분배했다. 임자도에서 관리하던 암말 100여 마리와 새끼 말들은 10여 마리씩 나누어 압해도 등 다른 목장으로 보냈다.
   
 풍차가 있는 임자도의 튤립 정원.
ⓒ 최강
 
개간을 통해 6개 섬을 합친 임자도에는 모래펄 밭이 많다. 섬 곳곳에 '물치' 또는 '모래치'라 부르는 물웅덩이가 있다. 모래가 머금고 있던 물이 모여 만들어진 둠벙이다. 어지간히 가물어도 임자도 대파 농사는 물 걱정이 없다. 대파는 가격 변동 폭이 커 폭락장에서는 농민들의 시름이 깊어진다.

김정원 전 튤립축제위원장은 네덜란드에 갔다가 튤립이 자라는 사질토(沙質土)가 임자도 간척지의 모래펄과 비슷하다는 것을 알았다. 김씨는 인근 농민 네 사람과 함께 영농조합법인을 설립해 튤립을 수입했다. 2008년 튤립 축제를 시작해 15년이 지나면서 임자도는 한국의 네덜란드가 되었다.

3천 명이 사는 임자도에 매년 튤립을 구경하러 오는 사람이 4만~5만 명에 이른다. 2021년 지도와 임자도를 연결하는 임자대교가 개통되면서 튤립 축제에 손님들이 몰려들었다. 대광해수욕장 옆 3만5천 평 튤립&홍매화 공원에서 봄철이면 50여 종의 튤립 100만 송이와 매화 6천 그루가 일제히 꽃망울을 터뜨린다.
 
 ‘황제’ 매화나무를 대나무 울타리가 근위병처럼 둘러싸고모래바람을 막아 준다.
ⓒ 황호택
  
튤립은 구근(球根)을 네덜란드에서 사오지만 매화나무는 국산이고 한번 심으면 수백 년 동안 꽃이 피고 열매를 맺는다. 매화는 2월 중순, 튤립은 4월 중순경 꽃이 핀다. 개화기가 다르니 축제 기간이 길어지는 효과도 있다.
흰 꽃에서 향기가 나는 백매화 정원은 이름이 향설원(香雪園). 홍매화 정원은 경제적 가치가 높다 해서 백억원(百億園)이라고 명명했다. 한 그루에 2천만~4천만 원 정도 하는 홍매화 400여 그루를 심어 실제 가치가 100억 원 정도. 10억 원짜리 겹홍매화는 대나무 바람막이로 둘러싸 모래바람을 막아준다. 매화정원의 황제다.
 
 이흑암리에 복원된 우봉 조희룡의 작업실 만구음관.
ⓒ 황호택
해남군의 매실 농원에서 백매화를 기증받고, 진도군의 조선 홍매화를 배에 실어 임자도로 옮겼다. 이렇게 임자도에 심어진 매화나무가 6천여 그루. 100여 년 전 모래바람을 막기 위해 방풍림으로 조성한 해송림 산책로는 '치유의 숲'(산림청)으로 선정됐다.

유배인 우봉 조희룡의 매화 사랑

유배객 우봉(又峰) 조희룡(趙熙龍·1789~1866)은 임자도에 와서 매화 그림을 즐겨 그렸다. 매화도로는 조선 최고의 화가라는 평가를 받았다.

호암미술관이 소장한 홍매도대련(紅梅圖對聯)은 우봉의 매화도 중에서도 수작(秀作). 좁고 긴 화폭에 짝을 맞추어 매화도를 그렸다. 구불거리며 올라가는 줄기는 힘차게 승천하는 용을 연상시키고 불꽃 같은 모습의 매화가 화려함을 더해준다. 우봉은 주민들로부터 용난굴에서 용이 승천했다는 이야기를 듣고 매화 줄기를 격렬히 요동치는 용의 형상으로 그렸다.

우봉은 정적이 많았던 추사 김정희(1786~1856)의 심복으로 지목돼 임자도로 유배 왔다. 우봉은 추사보다 나이가 세 살 적은 제자였지만 예술적으로는 라이벌이었다. 특히 매화와 대나무 그림에서 독보적인 영역을 구축했다.

1851년 임자도에 유배된 그는 수군진에 신고하러 갔다가 주민에게 "임자도에서 가장 따뜻하고 아름다운 곳이 어디냐"고 물었다. "흑석촌(지금의 이흑암리)은 정남향이어서 따뜻하고 하루 두 번 파도 꽃이 핀다"는 말을 듣고 이흑암리에 오두막집 거처를 마련했다.

그 시절은 둑을 막고 농토를 개간하기 전이라 파도가 바로 만구음관(萬鷗唫館) 앞까지 올라왔다. 만구음관이라는 당호(堂號)는 수많은 갈매기가 울부짖는다는 뜻이다. 신안군은 만구음관을 복원하면서 매화나무 1천 그루를 심고 돌담으로 조경을 했다.
  
 용이 승천했다는 전설이 내려오는 임자도 용난굴.
ⓒ 신안군
 
조희룡의 유배 시절에도 만구음관 주변은 대나무가 울창했다. 우봉이 이를 소재로 그린 <묵죽도>는 국립중앙박물관이 소장하고 있다. <괴석도>는 임자도 바닷가의 아름다운 수석이 모델 노릇을 했다.

추사 김정희의 화맥(畵脈)은 진도 출신 소치(小痴) 허련이 운림산방에서 남종화로 꽃을 피웠다. 강봉룡 목포대 교수는 임자도 만구음관은 진도 운림산방과 함께 조선 화단의 양대 봉우리라고 평했다. 조희룡은 독창성을 중시해 불긍거후(不肯車後:남의 수레를 따르지 않음)를 예술의 목표로 삼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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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붙이는 글 | <참고문헌> 강봉룡 외, 《섬과 인문학의 만남》, 민속원, 2015 김경옥, <17~18세기 임자도진의 설치와 목장의 개간>, 도서문화 제24집, 2004.12 김준, 《파시의 어업기술사적 고찰:임자도 파시를 중심으로》, 민속학연구 제17호, 2005.12 EBS, <한국기행-명물찾아 섬만리 3부 황금어장이 열렸다 임자도 20170809> (https://www.youtube.com/watch?v=Ptcgam0Arb8) 문화유산채널, <배우 박철민, 섬으로 가다> (https://www.youtube.com/watch?v=uLco4uY-j3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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