믿는 만큼 보이는 공포, 영화 '잠'

김정현 2023. 9. 12. 10: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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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뷰] 영화 <잠>

[김정현 기자]

 영화 <잠> 포스터
ⓒ 롯데컬처웍스(주)롯데엔터테인먼트
 
* 주의! 이 기사에는 영화의 주요 내용이 들어있습니다.

영화 <잠>은 일상에서 빼놓을 수 없는 잠을 소재로 한 공포물이다. 잠은 인간이 생명을 유지하는 데 가장 기본적인 욕구 중 하나다. 그리고 자는 시간은 하루 중 가장 무방비한 상태의 시간이다. 다른 어떤 시간보다 가장 안전해야 할 잠자는 시간이 위협받는다면 인간은 어떤 공포를 느낄까.

일상에 침입한 공포, "누가 들어왔어"

수진(정유미)과 현수(이선균)는 반려견 후추와 곧 태어날 아이의 출산을 기다리는 신혼부부다. 그들은 거실 벽에 붙인 '둘이 함께라면 극복 못 할 문제는 없다'라는 글귀처럼 서로 위해주며 소소하지만 행복한 시간을 보낸다.

어느날 현수는 자던 중 일어나 '누가 들어왔어'라고 잠꼬대를 하고 다시 잠든다. 이후 그는 심각한 몽유병 증상을 보인다. 밤새 심하게 긁어 얼굴엔 상처가 생겼고, 창문에서 떨어지려고 해 수진이 간신히 그를 구하기도 한다. 사태의 심각성을 인식한 그들은 병원을 찾아 '렘수면 장애'라는 진단을 받는다. 약을 복용하고 생활 습관을 개선하는 등 많은 노력을 기울이지만 현수의 증상은 오히려 더 심해진다. 냉장고 문을 열어 날 음식을 섭취하고 결국 키우던 반려견까지 해코지한 그에게 수진은 섬뜩함을 느낀다.

영화는 세 개의 장으로 나뉘어 있다. 첫 번째 장은 잠든 후 아예 다른 사람으로 변하는 현수의 모습을 통해 공포를 자아낸다. 이후 그들의 아이가 태어나고 그 공포는 더욱 극대화된다. 수진은 남편으로부터 아이와 자신의 생명을 위협받는다는 공포를, 현수는 사랑하는 이들을 해칠지도 모른다는 공포를 느낀다. 그들에게 이제 자는 시간은 지옥과 다름없다. 그럼에도 둘은 '함께라면 극복 못 할 문제는 없다'며 떨어지지 않고 둘 사이의 단단한 믿음을 보여준다.
 
 영화 <잠> 스틸컷
ⓒ 롯데컬처웍스(주)롯데엔터테인먼트
'두 남자'에서 시작된 믿음의 균열 

두 번째 장은 현수가 아닌 수진이 변화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모성애까지 더해진 수진은 극한 공포를 넘어 광기의 모습을 보인다. 현수가 아이를 쓰레기장에 버리는 꿈을 꾸고, 현수의 병을 진단한 의사에게 돌팔이라며 약통을 던진다. 수진의 엄마가 등장하며 수진은 현대의학이 아닌 무속신앙의 힘에 기대기 시작한다. 무당은 수진을 보며 '두 남자'와 살고 있다며 귀신의 존재를 언급하고 현수에게 팥을 뿌린다. 평소의 그녀라면 믿지 않았을 얘기지만 정신적으로 약해진 수진은 무당의 말에 귀신의 실체를 조사한다.

그때부터 영화의 축은 현수가 아닌 수진으로 변화한다. 불안과 공포에 잠식당한 그녀는 영화 초반의 이성적인 모습은 사라지고 광기에 사로잡힌 인간의 모습을 보여준다. 초반부에 현수의 모습으로 공포를 표현했다면 중반 이후 공포의 주체는 수진이다. 공포의 주체가 공수 교체된 이후 영화는 클라이맥스로 치닫고 관객들에게 믿음에 대한 질문을 던진다. 함께라면 극복 못 할 문제는 없다던 부부는 이제 떨어져 수진은 정신병원에 현수는 집에서 각자 치료에 집중한다. 
 
 영화 <잠> 스틸컷
ⓒ 롯데컬처웍스(주)롯데엔터테인먼트
 
엇갈린 믿음, 당신의 선택은…

영화를 본 이들에게 많은 평가가 갈리고 있는 마지막은 누구를 더 믿느냐에 따라 달라지는 열린 결말을 보여준다. 영화 <잠>의 미덕은 마지막 이 결말을 위해 보는 내내 설득력을 위한 요소를 배치하고 많은 복선을 깔아둔 점이다. 꼼꼼하게 쌓아 올린 단서들로 관객들은 자신의 믿음에 따라 어떤 결말이든 선택할 수 있다. 

일상 속 공포를 주제로 한 영화들이 무서운 이유는 주인공의 입장을 자신에게 대입할 수 있기 때문이다. 보는 동안 관객들은 내 남편이 혹은 내 아내가 저렇게 변한다면 어떤 선택을 할 것인지 생각한다. 특히 피할 수 없는 '잠'이라는 소재는 나 자신이 공포의 존재가 될 수 있다는 생각마저 들게 한다. 

배우 정유미는 기존 그녀의 이미지인 사랑스러움부터 광기로 변해가는 모습까지 절정의 연기력을 보여준다. 10년 만에 4번째 호흡을 맞춘 이선균과 정유미는 좋은 케미를 보여주며 극의 긴장감을 더한다.

봉준호 감독의 제자로 불리는 유재선 감독은 첫 장편 영화<잠>으로 제76회 칸국제영화제 비평가주간 초청작, 제 56회 시체스국제판타스틱영화제 등 많은 영화제에 초대되며 호평받았다. 기자간담회를 통해 '제1철칙으로 재미있는 장르영화를 만들자'고 다짐했다는 그는 독특한 소재와 탄탄한 플롯으로 시작이 좋은 데뷔작을 만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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