절박한 푸틴, 김정은 '독상' 차렸다…위험 무릅쓴 김정은 속내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이 자신의 모든 동선이 노출된 상황에서도 러시아행을 감행했다. 우크라이나 전쟁의 장기화 과정에서 신병들에게 지급할 무기마저 떨어진 러시아와 식량ㆍ에너지를 비롯한 첨단 무기 관련 기술 습득이 급한 북한의 절박함이 맞아떨어진 결과다.
미국의 공개적 경고와 그에 따른 위험을 무릅쓰고 감행된 김정은의 러시아 방문 과정과 관련해 외교가에선 북ㆍ러가 보여왔던 기존의 ‘외교 문법’까지 변화했다는 평가가 나온다.
미국 콕 짚어 경고했는데도 방러
북한은 미국이 콕 짚어 공개 경고했는데도 이를 무시하고 방러를 강행했다. 김정은의 러시아 방문과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과의 정상회담 가능성은 지난 4일 미국 언론을 통해 처음 보도됐다. 백악관은 같은날 “무기거래를 한다면 대가를 치를 것”이라고 경고했고, 10일엔 카멀라 해리스 미국 부통령까지 나서 “북한의 무기 지원이 어떤 식으로 귀결될지는 너무나 분명하며 결국 이들 국가를 한층 고립시키는 결과로 이어질 것”이라고 했다.
북ㆍ러 정상회담 개최 사실과 의제 등을 이미 다 알고 있다는 뜻으로, 이는 미국이 전개하는 인지전의 대표적 유형에 해당한다. 인지전은 상대방이 무엇을 계획하는지 미리 정보를 흘려 상대의 도발을 사전에 차단하려는 전술이다. 상대의 계획을 알고 있다는 것은 그에 따른 ‘맞춤형 대응 전략’을 이미 구축하고 있다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미국은 지난해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 가능성이 커지자, 선제적으로 러시아의 작전 개시일을 ‘2022년 2월 14일’로 못 박아 발표했다. 결국 러시아는 미국이 특정한 날짜를 피해 열흘이 지난 그해 2월 24일 우크라이나 기습 공격을 감행하기도 했다. 결과적으로 우크라전 과정에서 미국 정보의 정확성과 신뢰도는 더 높아졌다.
박원곤 이화여대 북한학과 교수는 “동선을 파악한 미국의 강력한 경고에도 회담 일정을 강행한 것은 근본적으로 빨리 북한으로부터 전쟁 물자를 지원받아야 하는 러시아의 절박함 때문”이라며 “푸틴 대통령은 전쟁 중 오래 자리를 비울 수 없고, 그렇다고 김정은에게 모스크바까지 장거리 이동을 요구하기도 부담스러운 상황까지 고려해 블라디보스토크 회담 일정을 강행할 수밖에 없었던 것으로도 해석된다”고 말했다. 실제 북·러는 11일 이번 김정은의 방러가 푸틴의 초청에 따른 것이라고 확인했다.
안전 우려에도 김정은 러시아행
처음 언론 보도가 나오고 미 정부가 이를 확인할 때부터 김정은의 이동 수단은 열차, 목적지는 블라디보스토크, 일정은 극동경제포럼(EEF)이 열리는 기간(10~13일)으로 특정됐다. 동선과 대략의 일정이 모두 공개된 것이다.
미국이 적극적 인지전을 전개한 상황에서 북한이 김정은의 특별열차에 대한 폭격 가능성을 고려하지 않았을 리가 없다. 그럼에도 이동을 결정한 배경을 두고 전문가들은 경제난 등으로 코너에 몰린 북한의 절박함을 근본적 이유로 봤다.
다만 핵 무력에 대한 자신감이 영향을 미쳤을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는 평가도 나온다.
박 교수는 “북한은 지난해 9월 ‘핵무력 법제화’를 통해 ‘국가지도부에 대한 핵 및 비핵 공격 감행 또는 임박’ 등 5가지 사안을 핵의 선제적 공격 조건으로 제시했다”며 “선제적 핵공격 조건까지 공표한 만큼 미국 등이 김정은에 대한 공습 등을 감행할 수 없을 거란 판단이 있었을 것”이라고 분석했다.
‘독상’ 받은 김정은…‘몸값’ 올리기?
이처럼 북한과 러시아의 기존 외교ㆍ의전 문법이 변경된 가운데서도 달라지지 않은 게 있다. 김정은과 푸틴은 EEF가 열리는 블라디보스토크에서 만나더라도 행사와는 별개로 ‘독상 회담’을 할 가능성이 크다는 점이다. 북한의 전통적 외교문법 상 최고 지도자는 해외 정상과의 별도 정상회담이 아닌 다자회의에 ‘N분의 1’의 자격으로 참석하기가 어렵고, 그런 전례도 없다.
이와 관련, 크렘린궁 대변인은 11일 북ㆍ러 정상의 만남 일정과 관련 “EEF에서 만날 계획은 없다”고 말했다. 정상회담이 EEF 폐막 이후로 미뤄지거나 EEF 기간 중 정상회담이 진행되더라도 다자 행사와는 별도로 열릴 공산이 크다.
임을출 경남대 극동문제연구소 교수는 “전쟁 물자는 적기에 공급하지 못할 경우 전쟁 수행이 불가능하게 만드는 매우 시급한 사안”이라며 “김정은 역시 여러 절실한 지점이 있지만, 김정은은 푸틴이 자신보다 상대적으로 더 절실한 상황에 처해 있다는 것을 인지하고 자신의 권위와 ‘몸값’을 보다 높이기 위해 러시아 측에 별도 정상회담 형식을 요구해 이를 받아냈을 개연성이 매우 크다”고 말했다.
강태화 기자 thkang@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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