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님의 뜨락에서] 시간의 여행자리
거울도 늙는구나 싶다. 어느새 가장자리에 얼룩이 번졌다. 언젠가 여름밤을 수놓은 별들 아래서, 멀고 가까운 곳에서 들리는 개구리들 울음소리를 듣기 위해 모깃불 피워 놓고 도란도란 이야기 하던 날. 에델바이스 꽃이 예쁘다며 여행 다녀 온 친구가 줬던 손거울이라 기억되는데, 친구의 이름은 가물거리고 그날의 풍경은 소리와 함께 아른거린다.
시간의 냄새가 추억을 더듬나 보다. 사진들 사이에 뭉툭하게 끼어 나를 보고있던 손거울을 발견한 것을 보면 말이다. 조심스럽게 서로 붙어 있는 사진과 거울을 떼어 냈다. 거울이 갑작스런 이별에 당황했는지 잽싸게 사진의 흔적을 가져간다. 거울 속 세상으로 불쑥 들어가 수많은 세월을 압축시켜 버린 듯하다. 새삼스레 인생의 순간들이 쌓이는 것을 본다는 것이 얼마나 소중한지. 동행하는 이들과 흐르는 시간의 여행자리가 있음이 감사하다.
키 크고 빼빼 마른 체형에 둥근 머리를 한 소녀가 있었다. 고등학교 입학 후 낯선 교실 안에서 친구 찾기를 할 때 눈에 들어왔다. 언뜻 보아도 낯가림이 있어 보였는데 나는 그 모습이 마음에 끌렸다. 한동안 지켜보던 날에 “야! 너 나랑 친구하자” 큰 목소리로 다가갔다. 친구는 수줍게 웃으며 “그래”라고 했다. 그 순간부터였다. 때로는 느슨하게 또는 팽팽하게 서로를 보며 걸어 갈 여정의 시작점이 된 것이.
친구는 졸업식 때 큐빅이 박혀있는 리본 모양의 브로치를 내밀며 나를 안았다. 울먹이는 목소리로 꼭 연락할거라고 속삭였는데, 졸업과 동시에 공백은 찾아 들었고 훌쩍 결혼 할 나이가 돼 버렸다. 흐르지 않는 세월 속에서 둥근 머리 소녀였는데. 마음이 관계를 유지시켰다. 친구가 나를 찾아왔다. 웨딩앨범을 열어보면 펑퍼짐한 멜빵바지를 입고 살짝 배가 나온 친구와 찍은 사진 한장이 있다. 임신한 몸으로 나타났던 친구는 결혼식 전 야외 촬영에 함께 했다.
사진을 볼 때마다 나도 모르게 ‘가시나’하며 웃는다. 생각보다 말이 먼저 튀어나오는 이 말은 학창시절의 추억인지 마냥 즐겁기만 하다. 우린 안산에서 동갑내기 두 딸을 낳은 엄마였다. 아이들과 함께 소풍처럼 웃을 수 있는 하루를 함께했다. 남편의 사역지가 옮겨지면서 헤어지게 됐지만 뜻밖에 개척을 하게 됐고, 날마다 수화기 너머로 들렸던 친구의 목소리는 개척 6개월 뒤에 이사를 왔다. 그이름교회에서 20년을 동행한 내 친구 공성심이다.
뮤지컬 ‘빈센트 반 고흐’에서 빈센트 반 고흐와 테오 반 고흐가 주고받는 노래가 있다. “테오야 요즘은 코발트색이 참 좋아. 색채들이 나에게 사랑을 속삭이는 것 같다.” “형! 이게 바로 형이야. 빛나는 눈 생기 있는 입술. 천연덕스러운 웃음.” 살아 생전 자신의 작품을 한 점 밖에 팔지 못했던 빈센트 반 고흐. 그의 처절하고 가난했던 삶에는 동생 테오의 정신적, 물질적인 사랑과 후원이 있었다.
요즘 들어 친구가 더 고맙다. 얼마 전 출간한 책에 ‘스치는 바람소리도 하나님의 세상이다’라고 썼는데 그 시선 속엔 친구가 있다. 성도가 된 순간부터 사모님이라 부르며 말을 높이더니 또 하나의 손이 되어 묵직하게 교회 구석구석을 살폈다. 스스로 질서를 세우며 한 번도 무너뜨리지 않았고 가난한 사모인 내가 음악을 잊지 않도록 한결같은 헌신과 사랑을 줬다. 내 친구는 테오였다. 나를 사모로 살게 하며 늦은 나이에 작가가 될 수 있도록 옆에 있어줬다.
‘살아가면서 가장 아름다운 일은 누구의 배경이 되어주는 것이다. 별을 빛나게 하는 까만 하늘처럼, 꽃을 돋보이게 하는 무딘 땅처럼.’ 안도현 시인의 마음처럼.
“성심아! 나도 배경이 되어줄게. 아픈 허리 부여잡고 살아갈 삶이어도 너와 나의 배경을 덮으시는 하나님의 배경 아래서 우리 활짝 웃자. 너로 인해 내가 사모로 산다. 고맙고 사랑한다.”
장진희 사모(그이름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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