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주영, 돌풍 일으켰지만 정치 지도자로서 적성은 없었다”-김대중 육성 회고록〈18〉
김대중 육성 회고록 〈18〉
“중도 민주 세력의 대단합으로 큰 국민 정당을 탄생시켜 정치적 안정 위에서 새로운 정치 질서를 확립해 나가기로 했습니다.”
나, 김대중(DJ)을 고립시키려는 그들만의 ‘3당 합당’이었다. 88년 13대 총선에서 내린 민심은 나의 평화민주당(평민당)을 제1 야당으로 한 여소야대였다. 이 구도를 인위적으로 개편해 여대야소로 뒤바꿔 놓은 야합이었다.
3당은 ‘시대적 요청’ ‘하나님의 뜻’ ‘구국의 결단’이라는 명분을 앞세워 민주자유당(민자당)을 출범시켰다. ‘보수대연합’으로 포장한 여당은 전체 의석 299석 중 221석을 독식한 거대 공룡이 됐다.
야권은 평민당과 3당 합당을 거부한 이기택·김광일·노무현 의원 등이 남은 ‘꼬마 민주당’으로 쪼그라들었다.
나는 “국민이 만들어준 여소야대를 국민과 상의 없이 여대야소로 만드는 파렴치한 국민 배신행위로 완전 무효”라고 비판했다. 대학가와 재야에서도 민심 배반을 규탄하는 성명·대자보·집회가 잇따랐다.
노태우 “이제 편히 사시라” 합당 제안
사실 노태우 대통령은 나에게 먼저 합당을 제안했다. 3당 합당이 발표되기 전이었다. 89년 말 노 대통령이 할 얘기가 있다며 나를 따로 만나자고 했다.
(노태우) “김 총재(DJ)께서 이제 고생 그만하시고, 나와 같이합시다. 이제 좀 편히 사십시오.”
(김대중) “무슨 말씀이시죠?”
(노태우) “나와 당을 같이 합시다. 좋은 일이나 나쁜 일이나 같이 겪읍시다.”
(김대중) “내가 군사정부와 5·17 쿠데타를 반대한 사람입니다. 걸어온 길이 다르고 정치 노선도 다르지 않습니까. 어떻게 당을 같이 합니까?”
(노태우) “에이, 그런 소리 하지 마시고 나라를 구한다는 생각으로 같이합시다.”
(김대중) “여소야대는 국민이 선택한 것입니다. 민정당과 평민당이 합치는 것은 민의를 배반하는 일입니다.”
나는 시중에 떠돌던 야권 합당설에 대해서 한마디 충고했다.
“3당 합당 소리가 들리는데 절대로 하지 마세요. 합당은 민주주의 발전에 도움이 되지 않습니다. 야당이 없어지는 정치를 국민이 지지하겠습니까? 노 대통령께 하나도 영광이 되지 않고 평생 멍에가 될 겁니다.”
나는 통합 제안을 뿌리치고 돌아왔다. 며칠 뒤 우리 당 김원기 원내총무가 찾아오더니 통합 얘기를 또 꺼냈다.
(김원기) “박철언 정무제1장관을 만났는데 당을 통합하자고 합니다. 만일 응한다면 다른 당과는 하지 않고, 김대중 총재(평민당)하고만 하겠다 합니다.”
(김대중) “그 얘기(합당) 더 이상 하지 맙시다.”
거기서 합당 논의를 끝내고 잊던 차에 3당 합당이라는 날벼락을 맞았다.
‘민주투사 YS’의 야합에 충격
3당 합당의 본질은 경상도와 충청도가 합쳐 전라도를 고립시키는 작전이었다. 정치 사상 최악의 지역주의를 통해 나를 봉쇄하겠다는 의도였다. 3당 합당은 민주화의 후퇴인 동시에 정치적으로 아주 부끄러운 일이다.
나는 이승만·박정희·전두환 정권을 무너뜨린 국민의 힘이 여기서 좌절된다고는 믿지 않았다. 시간이 좀 늦어질 뿐이라고 봤다. 혈혈단신 평민당 하나 가지고 싸울 수밖에 없었다.
솔직히 ‘민주투사 김영삼’이 야합의 주역이 됐다는 사실에 충격을 받았다. 한때의 민주화 동지로서 안타까웠다.
3당 합당을 통해 YS는 노태우의 후계를, JP는 내각책임제 개헌을 각각 기대했다. 동상이몽이었다. 결과적으로 YS는 3당 합당을 잘 이용했다. 반면에 JP의 내각제 바람은 헛된 꿈이 됐다.
내 생각에 노태우는 YS를 대통령 후보로 삼고 싶은 생각은 없었다. YS는 특유의 돌파력으로 여당 대통령 후보까지 쟁취했고, 결과적으로 3당 합당의 덕으로 대권을 잡게 됐다.
뒤늦게 알려졌지만, 노태우·김영삼·김종필 세 사람은 3당 합당 과정에서 1년 이내(91년 5월) 내각제로 개헌하는 데 합의하는 각서를 만들고 극비에 부쳤다. 차기 대권에 집착한 YS는 권력을 분점하는 내각제에 애초부터 흥미가 없었고, 이행할 뜻도 없었다.
그러나 중앙일보가 합당 4개월 뒤인 그해 5월 29일자에 문제의 각서를 폭로하자 YS의 입장이 한때 난처해졌다. YS는 ‘차기 대권 조기 가시화’를 주장하며 당내 주도권을 장악하고 결국 대통령 후보가 되는 저력을 발휘했다. 내각제는 없던 일이 됐다.
단식투쟁으로 쟁취한 지방자치제
3당 합당에 대항하는 차원에서 지방자치제 쟁취를 위한 투쟁에 나섰다. 지자체를 하면 단체장이 야당 손으로 넘어가 여당이 부정선거를 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나는 63년 6대 국회의원 시절부터 ‘경을 읽듯’ 지자체 도입을 주장했다. ‘미스터 지자체’라는 별명을 얻을 정도였다.
90년 10월 단식 투쟁에 나섰다. 여당에서는 “며칠 하다가 그만두겠지” 했지만 나는 “목숨을 걸겠다”는 결심이었다. 민자당 대표최고위원이 된 YS가 찾아왔다. 나는 그에게 항의했다.
“당신과 같이 민주화를 위해서 싸웠소. 민주화는 의회정치와 지자체가 핵심인데 당신이 여당으로 가서 지자체를 외면하고 안 한다는 것이 말이 되겠소.”
YS는 공감했다. 단식 13일째 노태우 정권이 지자체 실시를 약속했다. 단식을 풀었다. 양당은 91년에 의회 선거만 먼저 치르고, 단체장은 95년에 뽑기로 합의했다. 오늘날의 지방자치 시대는 그렇게 열렸다.
지방자치에 대한 비판을 잘 안다. 그러나 지방자치 덕에 민주주의가 튼튼해지고, 시골 구석구석을 발전시키기 위해 지자체들이 나름대로 노력하고 있다.
지방자치는 국회와 함께 민주주의의 핵심이고, 국가의 발전을 위한 중요한 메커니즘이라고 자부한다.
91년은 야권 통합으로 바쁜 한 해를 보냈다. 4월 이우정·신계륜 등 재야인사들이 “앞으로 정권을 교체하고, 승리하기 위해서는 김대중을 중심으로 뭉쳐야 한다”며 나에게 합류했다. 이들과 함께 평민당을 대체하는 신민주연합당(신민당)을 창당했다.
6월 지방선거(광역의원)에서 조직의 약세 탓에 승리하지 못했다. 이대로 가면 92년 총선과 대선에서 여당 민자당의 벽을 넘기 어렵다는 여론이 들끓었다. 야권 통합으로 힘을 더 길러야 한다는 압력이 커졌다.
신민당과 ‘꼬마 민주당’은 ‘당 대 당 통합’에 합의하고 9월 민주당을 출범시켰다. 나와 이기택이 공동대표를 맡았다.
정주영, 정치 입문 말아야
92년 1월 정주영 현대그룹 명예회장이 정치 참여를 선언하고 2월 통일국민당(국민당)을 창당했다. 민자당·민주당·국민당 3파전으로 92년 3·24 총선(14대) 대진표가 짜였다. 나는 개헌 저지선 확보, 즉 3분의 1 이상의 의석 확보를 목표로 삼았다.
3당 합당에 성난 민심이 용납하지 않을 거라고 믿었다. 내 관측이 맞아떨어졌다. 민자당은 참패했다. 219개 의석에서 149석으로 줄어들었다. 우리 민주당은 63석에서 97석으로 크게 늘었다. 국민당도 창당하자마자 바람을 일으켜 31석을 얻었다. ‘민자당 참패, 민주당 약진, 국민당 돌풍’이라고 언론은 요약했다. 3당 합당의 민자당을 심판했다.
고인이 된 정주영 회장은 정치에 입문하지 말아야 했다. 그와 얘기를 나눠봤는데, 정치를 너무 쉽게 보는 인상을 풍겼다. 그는 온갖 공약을 쏟아내는 등 돈으로 무엇이든 할 수 있는 것처럼 생각하는 듯했다. 정치 지도자로서의 적성이 있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민심의 향배를 확인한 나는 5월 민주당 전당대회에서 이기택을 꺾고 12월 대선(14대)에 후보로 나서게 됐다. 민자당은 YS를 대통령 후보로 선출했다.
나로선 생애 세 번째 도전이었다. 국내외에서 군사정권을 종식하고 진정한 정권 교체를 이룰 적임자라는 평가를 받고 있었다. 이번만큼은 승리하리라 자신했다. 그러나 색깔론의 먹구름이 또다시 몰려왔다.
더중앙플러스에서 연재 중인 ‘김대중 육성 회고록’ 전문은 QR코드를 스캔하면 보실 수 있습니다. https://www.joongang.co.kr/article/25182033
19회 〈1992년 대선 좌절과 정계 은퇴〉가 이어집니다.
고대훈·강병철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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