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불 재앙 그린 독일거장…“불길 속 울부짖는 코알라 보고 작품 떠올려”
오만한 소설가 레온(토마스 슈베르트)이 휴가지에서 만난 자유로운 여성(파울라 베어)을 통해 삶에 눈뜬다. 베를린영화제 은곰상과 심사위원 대상을 받은 독일 영화 ‘어파이어’(13일 개봉)는 어느 여름 발트해 연안 별장에서 산불에 갇힌 네 남녀의 사랑과 욕망, 질투를 그린다. 대자연을 만끽하는 친구를 비웃으며 성공에 목매던 레온은 화마가 모든 걸 삼킨 후에야 후회한다.
이 영화로 처음 내한한 독일 감독 크리스티안 페촐트(62)를 지난 6일 서울 종로의 한 호텔에서 만났다. 그는 “몇 년 전 TV에서 호주 산불로 몸에 불이 붙은 코알라가 죽어가는 걸 봤다. 가족과 함께 튀르키예의 산불 지역도 방문했다. 자연이 이렇게 죽어간 모습을 처음 봤다”며 “야외에서 와인을 마시고 자유롭게 춤추는 아름다운 여름을 산불로 인해 더는 가질 수 없을 수도 있겠다는 걱정에 이번 영화를 만들 결심을 했다”고 소개했다.
페촐트 감독은 뉴욕타임스가 ‘어파이어’ 리뷰에서 “당신이 이름을 들어본 적 없는 독일 최고 영화감독일지 모른다”고 했을 만큼 거의 모든 작품이 베를린영화제에 초청됐던 독립·예술영화 거장이다. 국내에는 장편 데뷔작 ‘내가 속한 나라’(2000), 베를린영화제 은곰상과 감독상을 받은 ‘바바라’(2012)를 비롯한 ‘피닉스’(2014), ‘트랜짓’(2018) 역사 3부작 등으로 소개됐다.
기후 위기로 인한 대형 산불이 집어삼킨 자연에서 출발해 예술가에 대한 풍자, 사랑의 정취가 상영 시간(102분) 내내 요동친다. 청년세대의 분노에 대한 감독 나름의 풀이가 가미된 점에선 이창동 감독의 ‘버닝’(2018)도 떠올리게 한다. ‘어파이어’를 이해하기 위한 역사·문화적 배경 지식을 묻자 그는 “없다”고 했다. 이어 “한국 영화를 볼 때 나도 한국의 모든 걸 알진 못해도 영화를 이해할 수 있다”며 “‘버닝’에서 한국의 DMZ(비무장지대)에 관해 몰라도 북한의 선전방송 장면에서 분단 상황을 추측할 수 있는 것처럼”이라고 말했다. 다음은 일문일답.
Q : 한국을 방문한 소감은.
A : “딸이 한국어를 조금 해서 한국 역사를 알려줬다. 독일 분단 시절이 떠올랐지만, 근본적 차이가 있다. 독일은 스스로 잘못해 분단을 맞았지만, 한국은 잘못 없이 남북이 분단됐다. 잘못한 나라가 더 일찍 통일한 게 끔찍하고 슬프다. 나는 동독 출신 부모님이 서독으로 온 뒤 태어났다. 베를린 장벽은 무너졌지만, 여전히 다른 곳에서 왔다는 분단의 감각이 남아있다.”
Q : 자연의 고마움을 모르는 청년 레온이 중심인데.
A : “에릭 로메르 감독은 생전 ‘카메라 위치는 도덕적 위치’라고 말했다. 이 영화는 레온이라는 오만하고 겁많은 사람의 자화상이지만, 그의 시선과 그를 둘러싼 객관적 현실이 항상 같이 보이도록 신경 썼다.”
Q : ‘운디네’‘트랜짓’의 파울라 베어가 또 주연을 맡았다.
A : “독일은 영화업계라고 할 만한 게 없다. 나치의 선전 영화 이후 독일이 잘못된 시스템에 감염됐기 때문이다. 상업적인 TV 산업이 그 예다. 자신만의 동맹을 만들어야 한다. 라이너 베르너 파스빈더, 아렌 에네 등이 이런 작업을 해나가고 있다.”
나원정 기자 na.wonjeong@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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