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거 앞두고 폭풍전야... 외신도 우려한 '관종 정치인'의 이 공약
[이주영 기자]
▲ 한 여성이 부에노스 아이레스의 한 정육정 앞을 지나가고 있다 |
ⓒ AP=연합뉴스 |
지난 주에 사려고 장바구니에 담아두었던 굴소스의 가격이 또 올랐다. 고추장, 참기름, 김 같은 한국 식재료는 이제 살 엄두가 나지 않는다. 그렇다고 국내 생산품들의 가격은 제자리를 지키느냐, 그것도 아니다. '아르헨티나'라는 오케스트라의 지휘자 자리를 차지한 인플레이션, 모든 일상은 인플레이션이 주도하는 허덕이는 리듬을 타고 요동치고 있다.
팬데믹 기간 한국에 머물다가 올해 초 다시 아르헨티나로 돌아온다고 했을 때, 이곳의 지인들은 한결같이 물었다. 아니, 왜, 굳이, 돌아오려고 해? 9월 현재 상황은 연초보다 훨씬 더 나빠졌다. 113%에 육박하는 인플레이션에, 대선이 한 달 남았고, 나라 전체가 마치 폭풍전야처럼 으스스한 분위기를 풍기고 있다.
페소로 책정된 가격들은 일주일만 지나도 바뀌기 때문에 지출 금액을 예상하고 계획하는 것이 거의 불가능하다. 내가 한국에서 돌아온 지 얼마 되지 않아서가 아니라 이곳 사람들은 누구든 달러환율을 염두하고 가격을 계산한다. 집과 자동차 같은 금액이 높은 항목들은 아예 처음부터 달러로 거래된다. 파는 사람도, 사는 사람도 달러로 가격을 책정하고 현찰로 결제한다.
수도에서 300킬로미터 정도 떨어진 소도시에서 호텔을 운영하는 시어머니도 수중에 페소가 조금만 모여도 달러로 바꿔버린다. 그리고 그 달러는? 아마도 침대 매트리스 밑에 차곡차곡 쌓이고 있을 것이다.
낭떠러지에 다다른 아르헨티나 경제 상황
한국인들은 믿을 수도 없을 거다. 118%의 기준 금리가 가능한 숫자인지. 인플레이션인지 하이퍼인플레이션인지 아니면 아르헨티나의 상황을 정의할 수 있는 새로운 경제용어가 필요할지도 모르겠다. 한국은 한번 겪었다는 IMF 구제만 30번을 경험하고, 그 이자를 감당하기 위해 또 다른 빚을 지고 있는 곳이 바로 아르헨티나다. (더 신기한 건, 이러한 상황에서도 사람들은 '지극히' 평화로운 상태를 유지하며 살아간다. 아마도 한국과는 다른 경제 구조와 그동안 많은 경제 위기를 겪으면서 터득한 노하우가 있을 터.)
지난 3년간의 팬데믹 기간 동안 아르헨티나 정부는 참 많은 페소를 찍어냈다. 그만큼 시민들은 다방면으로 정부의 지원을 받으며 암울했던 시기를 버텼고, 지금 닥친 파국적인 인플레이션은 어쩌면 당연한 수순이었는지도 모른다. 급박함으로 팬데믹 기간을 어찌어찌 버텼다면 이제 다가온 포스트 팬데믹은 그야말로 지혜로운 정책과 정치, 경제 두 분야의 끈끈한 협업을 통해 헤쳐나가야 할 것이다.
2023년 10월 22일, 대선이 다가온다. 지난 8월 13일에는 예비선거(Primary election, 대표 후보를 고르기 위해 본선 이전에 치르는 선거)가 있었다. 이 예비선거 결과는 대단히 이례적이었는데, 하비에르 밀레이(Javier Milei, 전진하는 자유당)라는 소수정당 소속의 후보가 양대 거대 정당의 후보를 제치고 최다 득표를 기록했기 때문이다. 물론, 다른 두 후보와의 차이는 2%p 미만으로 매우 박빙이었지만 말이다.
'아르헨티나의 히틀러', 밀레이 후보가 추진하는 달러화
밀레이는 몇 년 전 혜성처럼 등장한 경제학자 출신의 대통령 후보로, 내뱉는 말마다 너무나 극단적이고 상식 밖이어서 사람들은 '관종 정치인의 헛소리' 정도로 치부했었다. 그러나 상황이 달라졌다. 그동안 페론주의(페론 집권 시기에 등장한 국가 주도적인 복지·공공정책)와 반신자유주의를 내세웠던 정권들이 경제를 최악의 상황으로 만들어 놓자 유권자들은 될 대로 되라는 심정으로 그에게 표를 던졌다. 이런 탓에 전통적인 페론주의 그늘에 있던 아르헨티나에도 극단적인 신자유주의 목소리가 높아지게 됐다. 그가 내놓은 공약들을 살펴보자.
- 아르헨티나의 공식 통화를 달러로 바꾸겠다
- 중앙은행을 닫아버리겠다
- 무기 거래를 합법화하겠다
- 빈곤층에 대한 정부지원을 싹 다 잘라버리겠다
- 공기업들을 모두 사기업으로 만들겠다
- 낙태를 불법화하겠다(아르헨티나는 지난 2020년부터 낙태를 여성의 권리로 인정)
- 장기 거래와 신생아 거래까지 합법화하겠다(여론의 반발이 거세지자 얼버무림)
- 무상의료, 무상교육을 점진적으로 없애겠다
그는 기후위기를 부정하고 환경단체들의 주장을 무시하며, 도널드 트럼프 미국 전 대통령을 대단히 존경한다고 한다. 며칠 전, 콜롬비아의 구스타보 페트로(Gustavo Petro) 대통령은 밀레이를 '아르헨티나의 히틀러'라고 표현하기까지 했다.
자유시장 근본주의자(libertarian and "anarcho-capitalist")라고 스스로를 정의하는 밀레이의 공약들은 한결같이 높은 수위의 사회적 논의를 필요로 하는데, 그중에서도 가장 뜨거운 감자는 경제 관련 공약인 공식 통화의 달러화(dollarisation)이다.
자국의 화폐 대신에 달러를 쓴다고? 지구상에 달러를 자국 통화로 채택한 나라는 에콰도르, 엘살바도르, 파나마(공교롭게도 모두 중남미 지역) 외에 크고 작은 섬나라들이 있다. 그중 파나마는 수십 년 동안 미국의 (경제)속국이었기 때문에 별개의 사례로 보고, 비교적 최근에 달러화를 감행한 나라 중에 에콰도르와 엘살바도르의 사례가 있다. 밀레이 후보는 에콰도르를 달러화의 성공적인 케이스로 보고 아르헨티나에서 에콰도르의 모델을 적용한다는 구상을 하고 있다.
▲ 하비에르 밀레이 아르센티나 대선후보 |
ⓒ EPA=연합뉴스 |
달러화는 자국의 통화가 더 이상 화폐로서 기능할 수 없는 상황이거나 하이퍼인플레이션을 해결하고 불안정한 환율을 안정화하기 위해 택하는 매우 극단적인 경제정책이다. 자국 통화를 달러로 바꾸기 위해서는 시중에 유통되는 지폐를 달러로 전환하는 차원의 문제가 아니라 자국의 법 제도와 정치제도 등 다방면의 사회제도를 새롭게 마련해야 하는 쉽지 않은 과제가 주어지는 선택이다.
결코 단기간의 해결책으로 선택될 수 없는 사안이며, 중장기적인 안목에서 그것이 정말로 최선의 대안인지 신중하게 따져봐야 하는 일이다. 정치적·사회적인 합의 없이 추진됐을 경우 오히려 나라 경제에 독이 될 수도 있는 결정이기 때문이다.
화폐를 달러로 전환한다는 것은 통화 발행과 이자율 조절과 같은 경제를 조절할 수 있는 권리를 포기한다는 뜻이자, 미국의 통화 정책에 영원히 의존하겠다는 뜻이다. 결국 건강한 재정 정책을 마련하지 못하면 국가의 채무가 더 커질 수도 있다는 가능성을 감수하겠다는 말이다.
올해 IMF(국제통화기금)의 서반구부 국장에 위임된 칠레의 경제학자 로드리고 발데스(Rodrigo Valdés)는 이웃나라에서 붉어지고 있는 달러화 계획에 대해 조심스럽게 의견을 밝힌 바 있다. 발데스 국장은 지난 3월 <엘 파이스>(El Pais)에 '달러화가 잘 작동되기 위해서는 특정한 조건이 필요하다'며 "달러화가 통화 안정 등 환율정책에 도움을 줄 수는 있지만 건강하고 지속적인 재정정책을 담보해 주는 것은 아니다"라고 말했다. 아르헨티나의 달러화는 아직 선거 전의 설익은 구상이며, 현실화하기 위해서는 정치적 지원을 우선적으로 마련해야 할 것이라고 언급했다.
또한 그는 중남미 국가들이 직면한 폭력과 치안문제를 언급하기도 했다. "안전하지 않은 나라 환경은 경제 성장, 사람들의 삶의 질, 투자 의욕에 영향을 미치기 때문"에 불평등 문제와 더불어 해결해 나가야 하는 중요한 사안이라는 것이다.
그도 그럴 것이 달러화를 앞서 적용한 에콰도르의 경우 현재 치안문제가 상당히 심각한 상황이고, 늘어나는 마약 거래로 사회가 병들어가고 있다. 콜롬비아와 페루 사이에 위치한 지리적인 조건 때문이라고 치부하기보다는 아르헨티나에 달러화를 적용할 경우 앞으로 벌어질 수도 있는 사회 문제들에 관한 타산지석으로 삼아야 하지 않을까.
달러화가 인플레이션, 부채 등 아르헨티나에 산적한 경제 문제를 말끔하게 해결할 수 있는 마법의 카드가 아닌 것이 분명함에도 불구하고 유력 후보인 밀레이는 "달러화만큼 쉬운 것도 없다"며 마치 달러화로 모든 문제를 해결할 수 있을 것처럼 유권자들을 호도하고 있는 상황이다.
영국 경제지 <이코노미스트>는 지난 7일 밀레이 후보와 진행한 장장 세 시간에 걸친 인터뷰 후에 이 후보가 과연 아르헨티나의 구원자가 될 것인가에 대한 현실적인 답변을 내놓았다. 이들은 "달러화가 국가 화폐 발행을 막겠지만 낭비되는 재정 정책의 해결책이 되지는 못할 것"이며 "파산 직전의 아르헨티나 상황에서 중앙은행이 페소와 함께 사라진다면 달러화는 더욱 고통스러워질 것"이라고 달러화 공약의 앞날을 비관적으로 전망했다.
그리고 기사의 마지막을 이러한 문장으로 끝맺었다.
Intemperate, rash and outlandish: little about Mr Milei suggests he is the saviour Argentina needs.(이렇듯 과격하고 경솔하고 괴상한 사람인: 미스터 밀레이에 관한 어떤 것도 그가 아르헨티나의 구세주가 될 것을 시사해주는 것은 없다)
오랜 경제 불황에 지칠 대로 지친 시민들 중에는 앞뒤 재보지도 않고 밀레이 후보를 지지하기도 한다. 한 달 앞으로 다가온 대선에서 어떤 결과가 나올 것인가. 달러화라는 최후의 카드를 만지작거릴 수밖에 없는 아르헨티나의 경제 상황은 새로운 대통령의 리더십으로 달라질 수 있을 것인지, 외국인인 나조차도 마음을 졸이며 지켜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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