낙화놀이 없어도 더없이 아름다운 무진정
[배은설 기자]
"야~ 여기는 시원하다!!"
전시관에서 사진이며 관련 설명을 들여다보고 있는데, 어느 순간 이 한 마디와 함께 우르르 들어서는 발자국 소리가 들려왔다. 조용하지만 활기찬 기운이 금세 작은 전시관을 가득 메웠다. 분명 '군인 아저씨'였지만, 어느새 내 눈엔 앳된 청년들로 보이기 시작했다. 근처 군부대에서 전시관 관람을 온 모양이었다.
▲ 함안 입곡군립공원 내 입곡저수지 풍경 |
ⓒ 배은설 |
▲ 함안 말이산고분군에서 내려다본 풍경 |
ⓒ 배은설 |
조용한 공원을 걷자니 200미터 즈음 되는 쭉 뻗은 터널이 보였다. 양쪽으로 드문드문 뒤늦게 피어난 장미꽃 몇 송이들이 있는 걸 보니 장미 터널인가. 장미가 만개하는 계절의 풍경은 무척이나 아름다울 듯 했다. 여기서 스몰웨딩을 올리면 소박하지만 예쁘겠다 생각하며, 아름다운 꽃길을 손 꼭 잡고 함께 걸어가는 남녀를 홀로 상상했다.
공원의 다른 편으로 걸어가자 아직은 푸릇푸릇 새파란 핑크뮬리 너머로 커다란 증기기관차가 보였다. 가까이 가보니 문이 열려 있었다. 기차 안으로 들어서니 아직 사람 손을 많이 타지 않은 듯 반짝반짝 윤이 나는 테이블과 의자들이 놓여 있었다. 기차는 우뚝 멈춰 있었지만 차창 밖으로 보이는 풍경에 마치 정말로 기차를 탄 듯 괜히 기분이 좋아졌다.
▲ 함안독립공원 내 아직은 푸릇푸릇한 핑크뮬리 |
ⓒ 배은설 |
▲ 함안독립공원 내 증기기관차 |
ⓒ 배은설 |
발걸음을 느리게 하는 골목길 여행
키 낮은 작은 상가 건물들이 조르르 몇 개 모여 있는 골목길로 향했다. 잠시 걸었을까. 전봇대에 붙어있던 전단지 한 장이 순간 시선을 끌었다.
'속보!!'
이 조용한 시골에 과연 무슨 속보일까 싶어 걸음을 멈추고 가까이 들여다봤다. 속보보단 훨씬 작은 글씨로 '세금 걱정 없이 10년간 내 집처럼, 10년 후 내 집으로'라는 문구가 함께 적혀 있었다.
아파트 광고였다. 어디서든 흔히 볼 수 있는 광고였지만 세렴됨 대신 A4 용지 위 검정색과 빨간색으로만 이루어진 단출한 광고가 흥미로웠다.
'과연 속보였군.' 생각하며 발걸음을 옮기는데, 이번엔 어디선가 신나고 경쾌한 음악 소리가 들려왔다. 얼마 지나지 않아 도착한 그곳엔 60~70년대의 것으로 추정되는 록 음악을 틀어놓은 '군북 만물 수리사'라는 작은 가게가 자리하고 있었다.
정작 본인은 출타 중이면서도 누구에게든 음악을 선사하는 유쾌한 사장님의 넓은 아량 덕분에 길 가던 누군가는 한 뼘 더 즐거워졌다.
▲ 함안 군북 만물 수리사 |
ⓒ 배은설 |
머물다 서다를 반복하며 천천히 계속 길을 걸었다. 작은 골목길이었는데도 자꾸만 발걸음을 멈추다 또 다시 어느 알록달록한 건물 앞에서 저절로 발걸음이 느려졌다.
'군북 파출소 임시청사.'
아기자기한 외관의 느낌과는 사뭇 다르게 의외로 파출소였다. 이전에는 어린이집이었던 듯 담장은 빨강, 노랑, 하늘색으로 칠해져 있고 마당에는 작은 놀이터가 여전히 남아 있었지만, 현재는 임시로 파출소 건물로 사용하고 있는 듯 했다. 그 모습이 작은 골목길과 어우러져 무척 정겨웠다.
호젓하고 평화로운 함안
함안에 도착한 뒤 얼마 지나지 않아 택시를 탈 일이 있었다. 택시를 탄 김에 기사님께 갈 만한 곳을 여쭤봤다. 하지만 기사님의 반응은 뜨뜻미지근했다.
"창원에나 가야 좀 갈 데가 있지... 함안에 뭐 갈 만한 데가..." 라는 긴 말줄임표와 함께 무진정, 말이산 고분군, 함안 박물관, 악양생태공원, 입곡군립공원 등을 생각 날 때마다 띄엄띄엄 말씀해주셨다.
하지만 그 말줄임표 속에는 멋진 곳들이 많이 담겨 있었다. 알려주신 곳들도, 발길 닿는 대로 떠난 곳들도 좋았다. 특히나 시골에 살면서도 또 다른 시골의 평화로움에 행복감을 얻는 나 같은 사람한테는 더더욱 그랬다.
눈 두는 곳마다 초록초록 푸른 논이 펼쳐지는 풍경을 가진 함안은, 호젓하고 평화로운 동네를 많이 품고 있었다. 어딜 가든 마음이 평온해졌다.
▲ 경남 함안군 함안면 괴산리 무진정. |
ⓒ 윤성효 |
몇 달 전 낙화놀이에 너무 많은 인파가 몰렸다던 무진정에 가봤다. 평일에 찾은 무진정은 언제 그런 일이 있었냐는 듯 고즈넉하고 한적했다. 하긴 우리 사람의 일일 뿐, 오래 전에 세워진 정자는 변함없이 그 자리에 그대로 있었다.
무진정의 마루방과 툇마루에는 개방이 가능한 들문이 설치돼 있어서 인상적이었다. 이 정자는 과거 조선시대의 조삼선생이란 분이 후진 양성을 위해 지으셨다지만, 바람 솔솔 불 때 툇마루에 누워있으면 딱이겠다 싶었다. 글 공부는 모르겠고 풍월이나 읊다가 스르르 잠이 드는 한량을 잠시 꿈꿔봤다.
정자 앞쪽으로 피어난 배롱나무 사이로는 낙화놀이가 열리는 연못이 마치 액자처럼 눈에 들어왔다. 푸른 잎이 무성한 나무 그림자가 수면 위를 드리우고 있었다. 연못에 비친 그 반영 속에서 색색의 고운 잉어가 이리저리 헤엄치고 있었다. 낙화놀이가 없어도, 무진정은 더없이 아름다웠다.
화려함은 없지만 호젓함을 품고 있는 곳, 함안은 그랬다. 층층이 푸른 계단식 논이 한눈에 바라보이는 여항면의 어느 마을, 마을길을 따라 졸졸 흐르는 개울가 옆에 작은 우물 두 개가 놓여있던 원북 마을, 함안천 물길 옆으로 드문드문 배롱나무 꽃잎이 떨어져 꽃길이 된 동산정 옆 데크길 등은 함안 내에서도 이름난 여행지들은 아니었지만 함안 9경과 같은 알려진 여행지들과 더불어 모두 기억에 남는 풍경들이다.
화려한 볼거리 대신 시골 외할머니 집에 놀러간 듯 편안했다. 그렇게 며칠간 이곳의 평화로움을 눈 속에 마음속에 가득 담은 채, 함안을 떠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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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붙이는 글 | 위 글은 개인 블로그 (https://blog.naver.com/tick11)에도 함께 게재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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