병역거부와 병역기피 차이 없다
[이용석]
결론부터 말하자면 대체복무제가 도입되었고 정부가 법과 제도로 병역거부의 권리를 인정하는 이 시점에서, 나는 병역거부운동에 있어서 병역거부와 병역기피를 구분하는 것은 아무 의미가 없다고 생각한다.
병역거부와 병역기피를 구분하는 것은 국가의 시선일 때 의미가 생기고, 그 구분 지점은 국가 인정하는지 아닌지에서 발생한다. 국가가 인정한 대체역 심사위원회 심사를 통과하고 대체복무를 하는 이들은 진짜 병역거부자인 거고, 대체역 심사에서 떨어진 병역거부자나 러시아 병역거부자 난민처럼 정부가 인정하지 않은 병역거부자는 가짜 병역거부자, 즉 병역기피자가 되는 것이다.
"병역거부는 병역기피와 다르다"
병역거부는 군대와 함께 등장했고 존재해왔다. 하지만 한국 사회에서 '병역거부'가 사회적인 의미를 갖게 된 것은 2000년 이후다. 그전까지 한국 사회에서 병역거부자들(대부분 여호와의증인)은 병역기피자로 불렸거나 아예 드러나지도 않는 존재였다. 병역거부운동이 시작된 뒤 병역거부자들은 비로소 '병역거부자'라는 이름을 갖게 되었다.
초창기 병역거부운동은 어딜 가도 욕을 바가지로 먹었다. 비겁한 놈, 무임승차자, 겁쟁이, 남자답지 못한 놈… 병역거부에 대한 인식이 척박한 사회에서 병역거부운동은 사람들을 설득하기 위해 여러 전략을 썼는데 그중 하나가 병역거부와 병역기피를 분리하는 것이었다. 활동가들과 병역거부자들은 병역거부는 군대 대신 대체복무를 하겠다, 공동체에 대한 책임을 지는 행위라고 말하면서 그냥 군대 가기 싫어하는 병역기피와는 다르다고 강조했다.
조금 다르게 병역거부와 병역비리를 구분해서 말하기도 했다. 국민들이 치를 떨며 싫어하는 권력형 병역비리는 공동체에 대한 책임을 안 지려는 파렴치한 행위인데, 병역거부는 대체복무를 통해 공동체에 대한 책임을 다하려는 행동이라고 구분지었다. 권력형 병역비리는 전 국민의 공분을 사는 문제였고, 실제로 병역거부자를 욕하는 많은 사람들이 군대 가지 않는 것에만 집중에 병역거부자들과 권력형 병역비리 사범들을 구분하지 않았으니 이런 구분이 의미 없는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당시 병역거부운동 내부에서도 병역거부를 군대 가기 싫어하는 마음과 구분하는 것에 문제의식이 있었다. 강유인화가 <병역, 기피·비리·거부의 정치학>에서 말한 것처럼 이는 비국민과 국민의 경계 허물기가 아니라, 병역거부자를 국민으로 인정해달라는 일종의 시민권 획득을 위한 남성연대 전략이었고 이런 한계 지점에 대한 반발 심리가 활동가들에게 존재했다.
병역거부자들도 마찬가지였다. 공식적이고 공개적인 발화를 할 때는 병역기피자와 자신을 구분하면서도 자신의 병역거부가 병역기피와 완전하게 구분되는지 의구심을 품는 경우가 많았다. 병역거부를 결심하기 전부터 우리는 모두 군대 가기 싫어하는 지극히 일반적인 병역기피자였고, 병역거부자가 된 것은 마음이 달라진 것이 아니라 우리의 그 마음을 설명할 언어를 갖게 된 것일 뿐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니 '나는 병역기피자와 다르다'고 말하면서도 마음 한편에서는 '내가 병역기피자와 뭐가 다르지?'라고 혼란스러울 수밖에 없었다.
'양심적 병역거부'에서 '전쟁에 저항하는 병역거부'로
병역거부운동이 병역거부권 인정과 대체복무제 도입을 위해 취했던 중요한 또 하나의 전략은 헌법이 보장하는 '양심의 자유'를 강조하는 것이었다. 특히 법정의 재판이나 국회를 상대로 한 로비에서 이 전략을 많이 썼다. 평화 활동가들이 정말 하고 싶은 이야기는 "군대가 있기 때문에 전쟁이 일어난다"는 것이었지만, 이 주장으로는 사람들을 설득하기 어려웠기 때문에 양심의 자유가 있는 민주주의 국가에서 양심을 이유로 병역거부자를 처벌해서는 안 된다는 주장을 내세웠던 것이다.
병역거부에 대한 사법부의 판단은 자연스럽게 '양심의 자유'가 주요한 쟁점이 되었다. 양심의 자유가 국가 안보라는 공동체의 이익과 충돌할 때 이를 어디까지 인정할지에 따라 병역거부의 유·무죄가 갈렸고, 한 개인의 병역거부 사유가 과연 양심의 자유에 해당하는 문제인지에 따라 그가 국가에서 인정하는- 보호해야 하는 양심을 가진- 병역거부자인지 아니면 그냥 군대 기피하는 병역기피자인지 갈렸다. 병역거부에 대한 사법부의 판단이 전면 불인정에서 점차로 선택적 인정으로 변화하는 동안 '양심'은 점차 병역거부를 판단하는 데 가장 중요한 그리고 어쩌면 유일한 기준으로 등극했다.
▲ 2017년 5월 15일 세계병역거부자의 날인 이날 오전 서울 광화문광장에서 국제엠네스티 한국지부 주최로 열린 양심에 따른 병역거부자 처벌 중단 및 대체복무제 도입 촉구 기자회견에서 병역거부자 및 엠네스티 관계자들이 옥중 기자회견 퍼포먼스를 하고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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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제로 법정에서, 대체역심사위원회의 심사에서 병역거부자들의 양심을 '모든 폭력을 거부하는 완전한 평화주의 양심'을 기준 삼는 일이 반복되고 있다. 평화주의 신념이 아니라 반권위주의라서 병역거부의 양심이 될 수 없다(홍정훈 재판부)거나, 사회주의자라서 헌법으로 보호하는 양심이 아니라거나(나단 재판부), 동물권 활동가로서 병역을 거부한 이에게 채식은 개인 취향이지 병역거부의 양심이 아니(대체역 심사위원회 심사위원)라는 판단은 모두 '양심'을 바탕으로 진짜 병역거부와 가짜 병역거부(병역기피)를 나누는 판단이다. 이는 두 가지 측면에서 문제라고 생각한다.
첫째, '양심'을 기준으로 병역거부자의 진위를 판단하는 일은 국가를 판단의 주체 만들어 버린다. 과거 대체복무제가 도입되기 전 병역거부자들은 스스로 병역거부자임을 판단하고 선언했다. 비겁자, 겁쟁이라는 욕을 듣는 건 지금과 다를 바 없었지만, 적어도 스스로 병역거부의 판단 주체가 될 수 있었다. 양심은 내면의 소리인 만큼 스스로 떳떳함이 문제였지 내 양심을 누군가에게 증명하거나 권위적인 외부 기관에서 입증받을 일이 아니었다.
지금은 다르다. 병역거부의 권리가 법률과 제도로 보장받게 되면서 대체역심사위원회나 법원에서 병역거부를 인정받지 못하면 사회적으로도 병역거부자로 인정받지 못한다. 대체역 심사위원회에서 기각되고 행정소송에서도 패소한 나단은 현재 병무청 홈페이지에 병역기피자 신상공개 명단에 이름이 올라가 있다.
러시아 병역거부자 난민에 대한 한국 정부(법무부)의 판단도 마찬가지다. 푸틴의 동원령을 피해 수많은 러시아 젊은이들이 러시아를 탈출했고, 그중 한국으로 온 난민신청자들도 있다. 300여 명 정도가 인천공항에 들어왔지만 한국 정부는 그들에게 난민심사 자격조차 부여하지 않는 완강한 거부의 태도를 보였고, 결국 많은 병역거부자 난민이 제3국으로 떠났고 3명이 남아서 행정소송을 통해 난민심사 자격을 획득해 난민심사를 받는 중이다.
한국 정부는 이들이 단순 병역기피자이고, 병역기피는 난민 사유에 해당하지 않는다고 난민심사 자격조차 주지 않는 이유를 설명했다. 전쟁이 발발한 나라에서 전쟁에 동참하지 않기 위해 난민을 선택하는 것은 오랜 병역거부의 방식이다. 한국전쟁에서, 베트남전쟁에서, 이라크전쟁에서 많은 군인과 징집대상자들이 병역거부를 사유로 난민을 선택했고, 유엔 난민기구는 전쟁에 반대하는 병역거부를 난민인정 사유로 명확하게 규정하고 있다. 국제적으로도 그리고 당사자들도 떳떳한 병역거부자들이 한국 정부의 판단으로 한국 사회에서는 '병역기피자'가 된 것이다.
두 번째 문제는, 병역거부에서 '양심'만을 강조하다 보면 병역거부가 평화와 분리된다는 점이다. '전쟁없는세상'은 병역거부를 전쟁에 저항하기 위한 직접 행동이라고 생각하며 병역거부운동을 해나간다. 꼭 평화주의자가 아니라도, 누구라도 전쟁에 저항하기 위한 수단으로 병역거부를 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더 많은 사람들이 병역을 거부할수록 정부는 전쟁을 지속하는 것이 어려워지고, 다시 말해 병역거부자들이 늘어날수록 병역거부운동은 전쟁을 멈추기 위한 목표를 달성하는데 더 효과적인 캠페인이 된다.
역사상 가장 많은 병역거부자가 등장한 시기는 베트남전쟁 때였고, 미국에서만 수만 명이 병역거부를 했다. 너무 당연하게도 그 사람들 모두가 평화주의자는 아니었다. 다른 사람에게 물리력을 행사하는 직업을 가진 복싱 세계 챔피언 무하마드 알리는 한국 대체역 심사위원회와 법원의 판단을 받는다면 병역기피자로 몰렸을 것이다.
알리는 그래도 전쟁 반대라는 정치적인 목표를 명확히 했는데, 베트남전쟁 당시 병역거부자들 중에는 평소에 거짓말을 밥 먹듯이 하고 친구와 가족에게 폭력을 행사하지만 베트남 전쟁만큼은 동참하지 못하겠다고 생각하는 이들도 있었을 것이다. '양심'으로 참된 병역거부를 가린다면 우리는 이들을 병역거부자라고 부를 수 없다. 순수한 평화주의자들만을 병역거부자라고 부른다면 극소수의 병역거부자들만 남을 것이고 역설적으로 병역거부는 평화를 지키는 효과적인 방식이 아니게 된다.
다양한 병역거부 방식의 차이
거부와 기피의 차이는 없다. 그것은 '양심'을 기준으로 내린 국가의 판단일 뿐이다. 그렇다고 모든 병역거부가 다 똑같은 행동이라고 하는 것 또한 현실을 왜곡한다고 생각한다. 나는 병역거부와 병역기피를 나누는 구분은 의미 없다고 생각하지만, 병역거부의 다양한 방식을 나누어 생각하는 것은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그때의 구분 기준은 양심의 내용이라든지, 양심의 존재 여부가 아니라 행위의 방식이라고 생각한다.
행위의 방식에 따라 구분한다면 크게 세 가지로 분류할 수 있을 거 같다. 군복무 자체를 거부하는 전면 거부는 어떤 형태로든 군대에 소속되거나 군인이 되는 것을 거부하는 병역거부다. 입영 영장을 받기 전에 병역거부를 하는 경우는 말할 것도 없고, 예비군 훈련 거부나 군복무 중 병역거부 혹은 탈영병들이 이에 속할 것이다.
소극적 거부는 특정한 전쟁이나 명령에 대해 거부하되 군인 신분을 유지하는 경우를 뜻한다. 명령 거부와 같은 항명처럼 처벌을 받는 수위의 병역거부뿐만 아니라, 사격명령이 내려졌을 때 총을 쏘는 척만 하거나 조준사격을 하지 않고 하늘이나 아무도 없는 곳에 쏴버리는 식으로 일종의 태업을 하는 것도 소극적 거부라고 할 수 있을 것 같다.
심정적 거부는 아직 행위로 발현되지 않은, 병역거부의 씨앗 같은 마음이라고 할 수 있을 것 같다. 군대 가기 싫은 마음부터 군대 안에서 부조리나 부당함을 느낄 때의 마음을 모두 심정적 거부라고 말할 수 있지 않을까?
이 분류는 하나의 예시이자 제안이다. 꼭 이렇게 분류해야 한다는 것이 아니라 '양심'을 기준으로 진짜 병역거부자와 가짜 병역기피자를 가려내는 것은 이제 의미가 없다는 것, 생산적이고 효과적인 이야기를 하려면 새로운 기준으로 병역거부의 특성과 방식을 구분하여 보는 것이 낫다는 것을 말하고 싶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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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붙이는 글 | 글쓴이 이용석은 전쟁없는세상 활동가입니다. 이 글은 전쟁없는세상 블로그에도 실렸습니다. http://www.withoutwar.org/?p=2059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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