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소연 기자의 ‘영화로 보는 茶 이야기’] 중국의 몰락·미국의 부상 뒤에 ‘茶’가 있었다

김소연 매경이코노미 기자(sky6592@mk.co.kr) 2023. 9. 11. 15: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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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 역사를 바꾼 茶?’

“말이 되나?” 반문하고 싶겠지만 진짜 그렇다. 차는 진정 세계사를 바꾼 주역이다. 중국이 알고 보니 ‘종이 호랑이’였음을 만천하에 알려 서양과 동양의 무게추를 확실하게 돌려놨는가 하면, ‘잠자는 사자’ 미국을 분노하게 해 패권국가 미국이 탄생하는 배경이 된 데도 차가 지대한 역할을 했다.

“다른 나라 사람들이 영국에 아편을 팔고 영국인을 부추겨 아편을 사서 피우게 한다면, 여왕께서도 크게 분노하시리라 믿습니다.”

청나라 관리 임칙서가 영국의 빅토리아 여왕에게 보낸 편지에 나오는 문장이다.

청렴하고 강직해 ‘임청천(송나라 관리 ‘포청천’은 청백리의 대명사다)’이라 불렸던 임칙서는 관료로 봉직하면서 청나라가 점차 쇠퇴해가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안타까워했다. 특히 당시 중국 내에 만연한 아편의 폐해를 절감하고 자신의 관할구역 내에서라도 아편을 근절하기 위해 노력했다. 임칙서가 아편을 증오한 데는 개인적인 배경도 있는데, 수재였던 형이 아편에 중독되어 젊은 나이에 요절했기 때문이다. 청나라 조정과 황제 도광제 역시 아편 문제의 심각함을 인지하고 있었다.

청나라 관리들이 감춰진 아편을 찾고 있는 영화 속 한 장면.
당시 청 조정에서는 아편을 일거에 근절하기는 어려우니 아편을 국산화하고 가격을 올려 점진적으로 막아나가자는 주장과 강력히 단속해 뿌리를 뽑아야 한다는 주장이 맞서고 있었다. 이 때 도광제는 강력한 단속을 하는 쪽으로 방향을 잡고 그 일을 할 적임자로 임칙서를 선택했다. 임칙서를 흠차대신으로 임명하고 “아편을 뿌리 뽑으라”는 명을 내린다. 흠차대신은 황제가 특정의 중요한 사건을 처리하기 위하여 둔 관직이다. 3품(品) 이상은 흠차대신, 4품 이하는 흠차관원이라 했다.

흠차대신이 된 임칙서는 광동성으로 향한다. 당시 광동성이 유일하게 외국과 무역이 가능한 곳이었기 때문이다. 당연히 모든 아편이 광동성으로 들어와 중국 전역으로 퍼지는 구조였다. 임칙서는 광동성에 도착하기 전 미리 공문을 보내 “아편 무역을 중단하라. 밀매를 할 경우 재산을 몰수하고 사형에 처하겠다”고 경고했다.

아편을 중국에 수출하던 영국 상인들은 코웃음만 쳤다. 뇌물 좀 찔러주면 문제가 없을 것이라고 판단했다. 그러나 완전 오산. 임칙서는 거침이 없었다. 위기감을 느낀 중국 쪽 상인들이 아편 1000상자를 보냈다. 그러나 임칙서는 “숨긴 아편이 2만 상자가 넘는 것을 알고 있다”며 “모든 아편을 내놓으라”고 압박했다. 압박에도 말을 듣지 않자 이번에는 영국인 거주 지역을 봉쇄하고 물자가 드나들지 못하게 감시한다. 결국 식량마저 부족해지자 어쩔 수 없이 영국인들은 아편 2만 1306상자(약 237만근)를 내놓는다.

임칙서는 1839년 6월 3일부터 25일까지 이 아편을 모두 소각한다. 이 장면을 일컫는 단어가 ‘호문소연(虎門銷烟)’이다. ‘호문’이라는 지역에서 ‘아편을 소각한다’는 뜻이다. 말 그대로 불태운 것은 아니다. 아편 폐기 방법을 고민하던 임칙서는 아편을 불태워본 결과, 원래 양의 약 4분의 1 정도는 불타지 않고 녹는다는 것을 알았다. 녹아 나온 액체는 다시 아편으로 만들 수 있다. 아편을 완전 못쓰게 할 방법을 찾다 아편이 석회와 소금에 약하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임칙서는 우선 해변을 막아 연못을 만들도록 지시했다. 바닷물이 담긴 연못에 잘게 자른 아편 덩어리와 석회를 같이 넣고 휘저어 녹인 후 연못 수문을 열어 바다로 흘려보냈다. 이 과정이 장장 23일 걸렸다. 석회가 물과 반응하면 열과 연기가 발생하는데, 그 연기가 나는 장면이 마치 아편을 태우는 것처럼 보여 ‘호문소연’이라는 문구가 생겨났다는 후문이다.

아편전쟁 직전, 청나라 관리 임칙서가 광동의 ‘호문’지역에서 아편을 소각했다는 의미의 ‘호문소연’을 그린 그림들. ‘연(烟)’이라는 글자에서 알 수 있듯 연기가 피어오르고 있다.
중국으로부터 차 수입 많아져 부담 커진 영국
대신 중국에 아편 수출… ‘아편전쟁’ 발발 계기
영화 <호문소연>은 바로 이 스토리를 그대로 담은 무협영화다. 도광제가 임칙서를 흠차대신으로 임명하고 광동성에 보내는 것으로 이야기가 시작한다. 물론 아편을 모두 소각하기까지 과정이 순탄치 않았을 터. 그 과정에 살을 입히고 복수 스토리를 덧붙였다.

중국에서 제작한 영화인 만큼 영화는 아편 소각을 잘해낸 임칙서가 “아편이 없는 ‘안강성세’를 만들어낼 거야” 다짐하고 그가 일궈낸 작은 성공이 어떻게 중국 인민의 애국심을 일깨웠는지를 자막에 표기하면서 끝이 난다. 물론 후세의 우리는 다 안다. 그 사건이 결국 ‘아편전쟁’으로 이어졌고 전쟁에 패한 청나라가 영국의 모든 요구조건을 다 받아들이며 항복했다는 것을. 심지어 청나라 최초의 불평등조약인 ‘남경조약’으로 인해 홍콩마저도 영국 조차지(일정 기간 독점적, 배타적 지배를 설정한 토지)로 내놓아야 했다는 사실을. 그렇게 청나라가 ‘이빨도 발톱도 아무것도 없는 늙은 호랑이’였음이 만천하에 알려졌고, 이후 중국은 서양 열강의 먹이로 전락했다. 그뿐인가. ‘호문소연’의 영웅 임칙서는 영국과 아편전쟁을 치르는 과정에서 임무를 제대로 수행하지 못했다는 죄를 받고 해임당했다. 외피는 아편전쟁이지만, 그 뒤에는 차가 있다. 1662년 ‘캐서린 브라간자’라는 이름을 가진 포르투갈 공주가 영국 왕 찰스 2세와 결혼하기 위해 영국에 오면서 가지고 온 차 한 바구니가 영국을 ‘차의 나라’로 만들었다. 이후 영국 귀족 사이에 차가 엄청난 인기를 끌었다.

차 수입 대가로 막대한 은이 중국으로 들어가자 영국은 중국에 보낸 은을 되찾아 오기 위해 중국에 아편을 팔았다. 이런 이유로 청나라 말기 중국에서는 아편을 피우는 사람들이 너무 많아져 사회 문제가 대단했다.
귀족들만 즐기던 차가 대중화된 계기가 있는데 바로 산업혁명이다. 산업혁명으로 도시에 공장이 대거 세워지면서 농촌에 살던 농민들이 일자리를 찾아 도시로 몰려들고 이들은 대부분 공장에 취직했다. 영국을 비롯한 유럽은 물에 석회가 섞여 있어 수돗물을 그대로 식수로 쓰기가 쉽지 않다. 독일 등지에서 일찌감치 맥주가 발달한 배경이다. 영국도 사정은 별반 다를 바 없었다. 공장에서 일하는 이들에게 식수를 제공해야 하는데 물이 마땅치 않다보니 맥주를 제공했다. 아침부터 맥주를 마시고 거나하게 취한 이들이 기계를 돌리면서 실수가 잦았다. 업무에 차질을 빚는 것은 물론 부상 사고도 만만치 않게 발생했다. 고민하던 공장주들이 찾아낸 대안이 바로 차다. 맥주 대신 차를 제공하면서 온갖 사고가 급감했다. 당연히 차를원하는 수요가 급증했다. 당시만 해도 차를 생산하는 곳은 중국이 유일했으니 중국으로부터의 차 수입이 천정부지로 늘어난 것은 당연한 일이다.

당시 중국은 광동성에서만 외국과의 교역을 할 수 있게 했다. 광동성에서 외국과의 무역을 담당하는 13가문이 있었는데 이들을 ‘십삼행’이라 불렀다. 중국과 무역을 하려면 무조건 십삼행을 통해야만 했다. 영국인을 비롯한 서양인은 십삼행이라는 독점 세력을 통해야 무역을 할 수 있는 것에 불만이 많았다.(뭐든 독점이면 가격도 비싸지니.) 또 중국은 모든 물건에 대한 대가를 은으로만 받았다. 차수입 물량이 어마어마해진 영국은 중국에 바치는 은이 너무 많아지자 무역적자를 줄이기 위해 고심했다. 중국에 영국 물건을 사가라고 요구했지만 중국은 “오랑캐 물건 필요 없다”며 관심도 보이지 않았다. 중국으로 흘러들어가는 은의 양을 감당하기 어려웠던 영국이 찾아낸 방법이 바로 아편 수출이다. 영국은 인도 벵갈 지방에서 재배한 양귀비로 만든 아편을 팔아 은을 다시 가져온다는 발상을 실행에 옮겼고 이 계획은 대성공이었다. 1780년 무렵 약 1000상자에 불과했던 아편의 수입량은 1830년에는 1만 상자, 아편전쟁 직전에는 4만 상자 정도로 늘어났다. 무게로 치면 거의 300만 톤에 육박하는 수준이었다. 이렇게 차로 인해 시작된 아편전쟁은 전 세계의 무게추를 동양에서 서양으로 확실하게 돌려놓는 기제가 됐다. 이후 서양열강 중에서도 미국이 최고 열강으로 떠오르는 디딤돌이된 ‘미국 독립전쟁’ 뒤안길에도 역시 차가 자리한다.

영국 따라 미국에서도 茶 대유행…영국보다 소비량 많아
영국이 ‘영국차만 유통’ 강제하면서 미국인 분노 폭발해
차의 역사를 논할 때 빠지지 않는 것이 ‘보스턴 차 사건(Boston Tea Party·보스턴 티 파티)’이다. 영어 단어인 ‘티 파티’만 놓고 보면 “보스턴에서 근사한 차 파티가 열렸나?” 싶지만, 실제로는 엄청난 소동이었다.
보스턴 항구에 자리한 티 파티 박물관. 현대의 동인도회사가 생산하고 있는 보스턴 티 파티 차.
식민 지배를 받는 나라에서는 식민 지배를 하는 나라의 유행이 같이 유행하기 마련이다. 인도 사람들이 홍차를 마시기 시작한 것도 영국인이 홍차를 즐겼기 때문이었다. 미국도 다를 바 없었다. 1674년, 영국이 네덜란드로부터 뉴암스테르담을 빼앗아 ‘뉴욕’이라는 이름을 붙였을 때 이미 식민지 미국인들은 영국 전체 소비량보다 더 많은 차를 소비하고 있었다.

미국인이 차를 많이 마시자 영국은 꾀를 냈다. 프랑스와의 전쟁 등 이런저런 전쟁으로 재정이 힘들었던 영국은 미국에 수출하는 일부 제품과 차에 일종의 식민지세를 부과했다. 심지어 차는 관세가 100%나 됐다. 미국인들은 정상적으로 관세를 내고 구입하는 대신, 세금을 내지 않아도 되는 네덜란드 회사와의 밀수 거래를 선택했다. 차 수입과 수출을 독점하는 영국 동인도회사에는 차 재고가 나날이 쌓여갔다. 영국 동인도회사의 차 재고를 해결해야겠다 판단한 영국 정부는 차에 부과됐던 과도한 세금을 대폭 낮추는 대신, ‘영국에서 공급한 차만 미국에서 유통될 수 있다’는 새로운 규제를 만들었다. ‘자유’라는 가치에목숨 걸었던 미국인은 엄청나게 분노했다.

영국이 차에 엄청난 세금을 부과하고 뒤이어 ‘영국 차만 미국에서 유통할 수 있다’고 규정하면서 분노한 미국인들은 보스턴 항구에 정박한 영국 배에 실려 있는 차 상자를 바닷물에 던져버렸다.이 사건이 미국 독립운동의 시초가 된 ‘보스턴 차 사건(보스턴 티 파티)’다.
이 같은 분노를 무시한 채 1773년 가을, 영국 동인도회사는 미국에 차를 실은 배를 보낸다. 그해 12월 16일, 보스턴항에 집결한 보스턴 시민들이 배에 실려 있던 차를 바다에 다 던져버리게 이르렀는데 이게 바로 ‘보스턴 티 파티’다. 이 사건 이후 미국은 독립을 하겠다며 나섰고, 그렇게 미국은 독립전쟁을 거쳐 결국 영국으로부터 독립했다. 독립 과정에서 ‘차’에 대한 반감이 높아진 미국 국민들은 이후 차 대신 커피를 마시기 시작했고, 그때부터 미국에서는 차가 발을 붙이지 못했다.

지금 내가 마시는 것은 비록 ‘차 한 잔’이지만 무궁무진한 스토리를 담고 있는 ‘차’라고 생각하면 허투루 여겨지지 않는다. 어디 차만 그러겠나. 어쩌면 우리가 잘 알지 못할 뿐, 수많은 식품과 상품과 아이템이 그럴 테다. 그게 어쩌면 역사, 예술, 문화 등 다양한 분야에 관심을 쏟고 공부하는 이유일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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