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일 거장' 첫 내한 "전범 독일 먼저 통일 끔찍…韓은 분단 잘못 없죠"
내한 감독 크리스티안 페촐트
물 이어 원소 3부작 2번째
산불 갇힌 네 청춘 사랑·성장담
자신의 작품세계에 갇혀 살던 오만한 소설가(토마스 슈베르트)가 휴가지에서 만난 자유로운 여성(파울라 베어)을 통해 삶에 눈뜬다. 올해 초 베를린 국제영화제 은곰상-심사위원 대상을 받은 독일 영화 ‘어파이어’(13일 개봉)는 어느 여름 독일 발트해 연안의 숲속 별장에서 산불에 갇힌 네 남녀의 사랑과 욕망, 질투를 그린다.
푸르른 바다, 바람에 흩날리는 파도, 울창한 숲의 오케스트라…. 이런 대자연을 만끽하는 친구를 비웃으며 소설의 성공에 목을 매던 청년 작가 레온은 화마(火魔)가 모든 걸 집어삼킨 후에야 뼈아픈 후회를 한다. “인간이 지구와 우리 스스로에게 저지른 끔찍한 짓이 산불이죠.”
이 영화로 처음 내한한 독일 감독 크리스티안 페촐트(62)를 6일 서울 종로의 한 호텔에서 만났다.
“몇년 전 TV에서 호주 산불로 몸에 불이 붙은 코알라가 울부짖으며 죽어가는 걸 봤죠. 가족과 함께 터키의 산불 지역을 방문하기도 했어요. 자연이 이렇게까지 죽어있는 모습을 처음 봤어요. 청춘들이 야외 테이블에서 와인을 마시고 자유롭게 춤추는 아름다운 여름을 산불로 인해 더는 가질 수 없을 수도 있겠다는 걱정에 이번 영화를 결심했죠.”
NYT "당신이 못 들어본 최고 독일 영화감독"
‘어파이어’는 기후 위기로 잇따른 대형 산불이 집어삼킨 자연 풍광에서 출발해 예술가에 대한 날카로운 풍자, 폼페이 화산 폭발 때 껴안고 죽은 연인 화석을 떠올리게 하는 사랑의 정취가 상영 시간 102분간 내내 요동친다. 그가 코로나19에 걸려 자가격리했던 기간 즐겨본 에릭 로메르 영화, 안톤 체호프 소설에도 영향을 받았다. 독일 청년 세대의 분노에 대한 페촐트 감독 나름의 풀이가 가미됐단 점에선 이창동 감독의 영화 ‘버닝’(2018)도 떠오른다.
청년 분노 '버닝' 연상…"이창동 만난건 최고 순간"
우연히 지하철에서 자신의 영화 ‘옐라’(2007) 한국 팬을 만난 놀라운 경험과 함께다(우연히 같은 칸에 탄 빨간 원피스 차림의 여성과 눈이 마주쳤는데 그 여성의 남자친구가 다가와 “제 여자친구가 ‘옐라’ 주인공 처럼 빨간 원피스를 입었다”고 인사를 건넸다고 한다).
‘어파이어’를 더 잘 이해하기 위한 역사‧문화적 배경 지식을 묻자 그는 “없다”고 했다. “저도 한국 영화를 볼 때 한국의 모든 걸 알진 못해도 영화를 이해할 수 있어요. 영화는 추측의 공간, 꿈의 공간이죠. ‘버닝’에서 한국의 DMZ(비무장지대)에 대해 몰라도 북한의 선전방송 장면에서 분단 상황을 추측할 수 있는 것처럼요.”
다음은 그와의 일문일답.
Q : -한국을 처음 방문한 소감은.
“딸이 한국을 다녀간 적 있고 한국어도 조금 해서 한국 역사를 알려줬다. 독일 분단 시절이 떠올랐지만, 근본적 차이가 있다. 독일은 스스로 잘못한 결과로 분단을 맞았지만, 한국은 잘못이 없는데도 남북이 분단됐다. 잘못한 나라가 더 일찍 통일한 것이 끔찍하고 슬프다. 동독 출신 부모님이 서독으로 피난 온 이후 제가 태어났다. 베를린 장벽은 무너졌지만, 여전히 ‘나는 다른 곳에서 왔다’는 분단의 감각이 남아있다. 같은 나라에서 같은 말을 써도 여전히 차이를 발견한다. 한국도 북한과 같이 성장하려면 많은 시간이 걸릴 것 같다.”
Q : -방한 기간 영화적 영감을 얻기도 했나.
“독일을 다른 시각으로 보게 될 것 같다. 독일은 과거 잘못과 고통을 잊으려 많은 일을 해왔다. 그런 과업을 짊어진 청년들은 삶을 즐기거나 자유롭게 일하지 못했고 그에 대한 분노를 갖게 된 것 같다.”
Q : -사운드 등 오감을 총동원해 극 중의 ‘여름’을 느끼도록 했다.
“우리는 종종 듣는 것을 놓친다. 숲의 자연, 곤충‧새 소리가 얼마나 풍부한지 보여주고 들려주고 싶었다. 그 모든 걸 삼키는 산불이 얼마나 파괴적인지도. 각본을 쓰면서 들은 음악을 대부분 영화에 썼고 배우들에게도 들려줬다. 영화에서 그들이 음악이 자기 안에서 흘러나오듯 춤추는 것처럼 움직이길 원했다.”
Q : -자연의 고마움을 제대로 느끼지 못한 청년 레온을 중심에 뒀는데.
“에릭 로메르 감독은 생전 ‘카메라 위치는 도덕적 위치’라고 말했다. 이 영화는 레온이라는 오만하고 겁많은 사람의 자화상이지만, 그의 시선과 그를 둘러싼 객관적 현실이 항상 같이 보이도록 신경 썼다.”
Q : -‘운디네’ ‘트랜짓’의 파울라 베어가 다시 주연을 맡았다. 단골 배우‧스태프와 함께 영화를 만드는 이유는.
“독일은 영화업계라고 할만한 게 없다. 영화 시장도 프랑스‧미국에 비해 작다. 이렇게 작아진 이유는 나치 정권의 선전 영화 이후 독일이 잘못된 영화에 감염됐기 때문이다. 상업적인 TV 산업을 그 예로 들 수 있다. 자기만의 동맹을 만들어야 한다. 라이너 베르너 파스빈더, 아렌 에네 등이 기존 독일 시스템에 반대하며 이 작업을 해나가고 있다. 서로 잘 통해서 지속 가능한 집단을 만드는 게 목표다.”
나원정 기자 na.wonjeong@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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