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일하면 축구? 이제는 농구의 나라입니다
[이준목 기자]
▲ 우승한 독일 선수단 |
ⓒ AP/연합뉴스 |
독일이 '월드컵 챔피언'에 등극했다. 축구 이야기가 아니다. 전차군단이 농구로 세계 최고의 자리에 올라섰다.
독일 남자농구대표팀은 10일 필리핀 마닐라에서 열린 2023 국제농구연맹(FIBA) 농구월드컵 결승전에서 세르비아를 83-77로 제압하고 정상에 올랐다. 농구월드컵에서 독일이 우승한 것은 사상 최초다. 이전 최고 기록은 독일 농구 역사상 최고의 선수로 꼽히던 덕 노비츠키가 활약하던 지난 2002년에 기록한 3위였다.
그동안 독일을 대표하는 스포츠는 역시 축구였다. 국제축구연맹(FIFA) 월드컵에서 4회나 정상에 오르며 브라질(5회)에 이어 이탈리아와 최다우승 공동 2위를 기록했다. 유럽선수권(유로) 우승도 3회에 통산 전적 1위다. "축구란 22명이 90분 동안 공을 쫓다가 항상 독일이 이기는 게임"이라는 잉글랜드의 전 축구선수 게리 리네커의 어록은 독일 축구의 위대함을 상징하는 표현으로 지금까지 회자되곤 한다.
반면 농구는 세계 무대에서 축구만큼의 강호로 평가받지는 못했다. 데틀레프 슈렘프-덕 노비츠키 같이 NBA(미 프로농구)에서도 큰 족적을 남긴 선수들을 배출했지만, 국제무대에서는 원맨팀 정도의 위상에 불과했다. 유럽에서도 스페인-프랑스 등에 밀려 언더독이나 다크호스 정도의 평가에 그쳤다.
메이저 국제대회에서는 1993년 유로바스켓(유럽선수권)에서 한 차례 우승을 차지했을 뿐, 올림픽에서는 1992년 7위가 최고 성적이다. 단 한번도 4강권조차 올라보지 못했고 농구월드컵은 올해까지 6번 출전하며 꾸준하게 본선무대를 밟는 것도 힘든 팀이었다. 직전 대회인 2019년에는 18위에 머물렀고, 2014년에는 월드컵 본선에도 나가지 못했다. 독일의 현 FIBA 랭킹은 18위에 불과하다.
아무도 독일 농구를 우승후보로 예상하지 않았지만 이번 농구월드컵에서 전차군단은 세계를 놀라게 하는 이변을 연출했다. 놀랍게도 독일은 예선 조별리그 1차라운드(호주-일본-핀란드)부터 2차라운드(슬로베니-조지아) 토너먼트(라트비아-미국-세르비아)까지 8경기를 모두 전승했다.
심지어 준결승에서 만난 '세계 최강' 미국을 농구월드컵 사상 최초로 격침시킨 것은 이번 최대의 이변이자 명장면으로 꼽힌다. 독일은 전원 NBA 선수들로 구성된 미국을 접전 끝에 113-111로 제압한 데 이어, 결승에서는 전통의 강호 세르비아마저 물리치고 퍼펙트 우승을 완성했다.
물론 독일의 우승에는 운이 따라준 측면도 존재한다. 유럽을 대표하는 강호이자 우승후보로 꼽혔던 프랑스와 스페인(지난 대회 우승팀)같은 강호들이 8강에도 오르지 못하고 조기탈락했다.
경쟁국들이 대부분 최상의 전력을 구축하지 못했다는 것도 독일에게 유리하게 작용했다. 미국은 르브론 제임스-스테판 커리-케빈 듀란트 등 현재 NBA를 대표하는 슈퍼스타들이 모두 불참하며, 앤서니 에드워즈, 브랜든 잉그램 등 대부분 연차가 짧고 국제경험이 부족한 어린 선수들로 구성되었다. 결승에서 만난 세르비아도 지난 시즌 NBA MVP이자 세계 최고의 센터로 꼽히는 니콜라 요키치의 불참 공백이 아쉬웠다.
하지만 그렇다고 독일의 우승이 저평가받을 이유는 없다. MVP를 차지한 데니스 슈뢰더를 비롯하여 미국전 승리의 주역 안드레아스 옵스트, 여기에 프란츠 바그너, 모리츠 바그너, 다니엘 타이스 등 각 포지션에 우수한 선수들을 보유하며 탄탄한 전력을 구축했다는 평가를 받았다.
독일의 현 에이스인 슈뢰더는 NBA에서는 주전과 식스맨을 오가는 준수한 선수다. 하지만 국가대표팀만 오면 그야말로 훨훨 날아다니는 '월드클래스'가 된다. 이번 대회에서도 8강 라트비아전 등 몇몇 경기에서는 기복을 드러냈지만, 4강 미국전-결승 세르비아전에서는 에이스 모드로 부활하며 노비츠키 이후 21년 만에 독일 출신 대회 MVP이자 베스트 5까지 석권했다.
독일도 슈뢰더를 비롯한 여러 명의 NBA 선수들을 보유하고 있지만, 과거의 노비츠키와 같은 독보적인 슈퍼스타라고 불릴만한 선수는 없다. 하지만 전체적인 포지션 밸런스와 조직력은 오히려 노비츠키의 원맨팀이었던 시절보다 월등하다는 평가다.
실제로 이번 대회에서도 독일은 특정 선수에게만 의존하지 않고 고비마다 여러 선수들이 공수에서 번갈아가며 활약하면서 위기를 극복할 수 있었다. 이러한 독일 농구의 선전과 우승은, 미국의 독주체제가 무너지면서 '세계농구의 다원화와 상향평준화'를 보여주는 상징적인 사건으로 평가받고 있다.
아이러니하게도 이러한 독일 농구의 눈부신 돌풍은, 정작 최악의 암흑기를 보내고 있는 자국 축구의 부진과 대조된다. 불과 9년 전 2014년 FIFA 월드컵 정상에 오르며 세계를 호령했던 독일 축구는 최근 연이어 흑역사를 경신하며 끝없는 추락을 거듭하고 있다.
독일 축구는 2018년 러시아 월드컵에서 한국에 패하여 조별리그에서 탈락하는 '카잔의 굴욕'을 당한 것을 기점으로, 2022 카타르월드컵에서도 일본에 패하며 아시아팀에 밀려 2회 연속 조별리그 탈락이라는 수모를 겪었다. 거듭되는 부진 속에 독일의 FIFA랭킹은 어느덧 15위로 10위권밖까지 밀려났다.
설상가상 지난 10일 홈에서 열린 일본과 1년 만의 '월드컵 리턴매치' 천선전에서 1-4의 충격적인 대패를 당했다. 아시아팀에게 2연패, 3골차 패배는 독일축구 사상 초유의 사태였다.
독일축구협회(DFB)는 최근 A매치 5경기에서 1무 4패의 초라한 성적을 기록한 한지 플릭 독일 대표팀 감독을 하루만인 11일 전격 경질했다. 독일축구 역사상 계약만료나 자진사임을 제외하고, 성적부진으로 협회에 의해 경질된 사례는 123년 만에 플릭 감독이 최초였다. 독일축구로서는 이래저래 불명예스러운 기록을 경신한 셈이었다.
독일 팬들은 농구의 사상 첫 세계 챔피언이라는 낭보와, 일본전 대참사에 이은 플릭 감독의 경질 사태라는 비보를 모두 불과 같은 하루 동안에 겪어야했다. 호사다마(好事多魔),새옹지마(塞翁之馬)라는 말이 자연스럽게 떠오를 수밖에 없는 독일 스포츠의 24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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