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이상 부럽지도, 흉내낼 필요도 없어졌다

김은미 2023. 9. 11. 12: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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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쓰기를 하면서 생긴 자아실현과 성장이라는 목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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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은미 기자]

공장이 파업하자 공장에서 일하는 덕분에 야간 학교에서 공부하는 소녀는 수업에 가면 안 되는 줄 알았다. 다음 날 선생님은 공장이 파업해도 수업에는 참석하는 거라며 반성문을 써오라고 했다.

소녀가 쓴 반성문을 읽은 선생님은 소녀를 불러 글을 써 보는 게 어떻겠냐고 했다. 소녀는 온 하늘의 별들이 자신의 품으로 쏟아지는 것 같았다고 했다. 소녀는 선생님의 말을 자신 안에 씨앗으로 심어 틔어냈다. <외딴방> <깊은 슬픔> <엄마를 부탁해> 등을 쓴 훌륭한 작가가 되었다. 소설가 신경숙의 이야기다.

"글을 써보는 게 어때?"

나에게도 그렇게 말한 사람이 있었다. '파란빛이 온통 내 얼굴 위로 쏟아졌다.' 모두 잠든 밤, 까만 어둠에 싸인 거실 소파에 웅크려 앉은 내 얼굴 위로 쏟아지는 휴대전화 불빛을 두고 하는 말이다.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한다고 속으로 생각했고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작가는 아무나 하나' 밤새 생각 없이 SNS만 쳐다보았다.

어릴 적부터 무덤덤한 사람이었다. 친구가 발레 학원에서 배웠다며 논길 옆에서 빨간 책가방을 멘 채로 나 보란 듯이 "에샤페 쿠페 빠쎄 쑤쑤"를 할 때도. 쉬는 시간 피아노 학원 다니는 친구가 멋지게 풍금을 연주할 때도. 동네 공원에서 같이 놀던 친구들이 주산학원 가방에서 주판을 꺼내 "일원이요. 이원이요" 할 때도. 한 줄기 바람처럼 그 모든 부러움을 시원하게 떠나보내는 능력자였다.

흙먼지 날리는 마당에서 한 번도 본 적 없는 발레 동작을 "에이 샷뻬 굿뻬 빠쎄 쑤스" 하면서 발끝을 쭈그려가며 따라 해보면서도. 몸에서 좋은 향기가 났던 성희가 보란 듯이 치는 '고양이의 춤' 곡을 완벽하게 외워서 따라치면서도. 그래서 성희는 그 후에 '엘리제를 위하여'를 연주했지만. 주판 돌린 것보다 더 열심히 머리를 굴려 공부해 악착같이 수학 문제를 백 점 맞으면서도 말이다.

흉내 내는 건 '식은 죽 먹기'라 아무것도 부러워하지 않게 되었지만, 고등학교에 진학해 한국 무용반 동아리에 들어갔던 건 왜였을까. 무용반은 긴 생머리를 할 수 있는 특권 때문만은 아니었다. 어쩌면 마음 어딘가에 소망하는 것이 있어서였는지도 모른다.

'딱딱 딱딱' 박자를 세는 나무 스틱의 경쾌한 소리를 따라 매일 저녁 야자를 빼먹고 꿈꾸듯 턴을 돌았다. 보랏빛 긴 연습용 치마를 펄럭이며 발레 슈즈를 신고 빙글빙글 돌 때면 무언가 된 듯한 기분이 들기도 했다. 가볍게 손을 뻗어 올리며 선을 만들면 전신 거울에 비친 목이 긴 내 친구의 모습은 언제나 황홀했다.

짜리몽땅 내 모습을 보는 건 패스. 2학년 말. 담임선생님이 나를 불렀다. '턴'은 그만 돌고 '야자' 하라고 했다. 수능 안 볼 거냐고. 조용히 교실로 갔다.
 
ⓒ 언스플래시
 
돼지저금통 배를 갈랐다. 팬파이프를 사기 위해서였다. 친구와 이웃 남고 축제에 갔다가 멋지게 팬파이프를 연주하는 학생에게 반해 저지른 일이었다. 한 곡을 제대로 끝내지 못하고 때려치웠다. 힘들었다. 그래도 괜찮았었다. 아무렇지도 않았었다. 정확히 말하면 그게 뭔지 몰랐거나 외면했다. 더는 흉내 낼 수 없는 것들이 있다는 걸 알고 싶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나는 무엇을 해도 보통 이상을 했다. 학원에 다니지 않아도 도와주는 사람이 없어도 각종 대회에 나가면 상을 받았다. 공부도 제법 했고 어른들과 친구들에게 칭찬을 들었다. 나는 자신 있었고 모든 것이 가능하다고 믿었다. 내가 원하는 일들이 이루어지리라 생각했다. 그런데 늘 불안했다.

돈이 귀한 집. 원하는 것이 있다고 응석을 부리지 않았다. 안 되는 것을 붙잡고 늘어지지 않았다. 빨리 판단하고 결정했다. 누구에게 물어볼 필요는 없었다. 그냥 알았다. 열악한 환경은 내 안에 소망의 불씨를 껐다.

좋은 말 많이 들었는데, 어떤 희망의 말도 마음에 와닿지 않았다. 유일한 대안은 대학. 그마저 시원하게 낙방했다. 그리고 길을 잃었다. 자신감을 잃어버렸다. 내가 무언가를 할 수 있을 거라는 믿음은 바람 앞에 촛불 같았다. 자신의 잠재력을 확신하지 못하게 되었고 내 꿈을 비추던 빛도 하나, 둘 꺼져버렸다.

목적 없이 학교에 가고 아무 생각 없이 그냥 살았다. 생각해 보면, 그런 순간에도 저기 어디 깊은 곳에 꿈틀거렸던 것이 있었던 것 같은 생각이 든다.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았지만, 은연중 바라던 것이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2021년 3월. 망설이고 미루어 뒀던 공부를 시작했다. 글쓰기에 대한 호기심이 생겼다. 브런치에 글을 쓸 수 있게 되면서 쓰는 사람이 되었다. 그 후 글쓰기를 해보겠다고 컴퓨터 앞에 앉아 있는 시간이 늘었다. 어깨만 뻐근하고 아무 감도 안 온다. 어렵게 완성한 글을 읽어보니 일긴데, 일기를 열심히 써 본 건 또 처음이다. 답답한 마음엔 시커먼 그림자가 드리우기도 했지만 포기하고 싶지 않았다.

"글을 써 보는 게 어때?"

그 말을 마음에 다시 심고 물을 줘본다. 한 번도 믿어주지 못했지만, 마음 한 귀퉁이에 간직하고 있던 오래된 예쁜 말의 씨앗을 꺼내어 싹이 나기를 바라고 있다. 좋은 말을 들어도 품을 줄 몰랐던 그때, 그냥 흘려버렸던 반짝이는 말들을 구멍 뚫린 마음 주머니 속 깊은 곳에서 다시 주워 올려 만지작거려본다.

굽이굽이 돌아서 서툰 솜씨로 여기 오래 앉았다. 엉덩이가 해줄 일을 기대하면서. 어두운 밤 몇 시간 째 파란 컴퓨터 화면 불빛이 가득히 내 얼굴을 비추고 들어와 눈앞이 뿌옇게 되도록 미래를 퍼 올리고 있다. 어스름이 내려앉은 저녁 학교 앞 골목에서 마주친 선생님이 했던 말을 떠올려본다.

"뭐라도 열심히 해 봐, 넌 뭐든 하면 될 거야."

글을 쓰는 일에는 그동안 흉내 냈던 다른 일들과는 다른 것이 있었다. 한 편의 글을 완성하면 뿌듯함이 밀려오고 성취가 있었다. 성취를 느끼니 더 쓰고 싶다는 욕구가 생겼다. 그렇게 누적되어 가는 나의 성취들이 기분 좋았다. 이렇게 모인 글이 내 삶의 궤적을 다르게 만들어 줄 거라는 기대를 하게 했다. 대단한 성공과 업적을 바라는 것이 아니라 그저 기대함으로 살아가는 순간들이 행복하다.

글을 쓰다 보니 책을 더 읽었고 배우고 성장해서 좋았다. 자아실현과 성장이라는 가장 좋은 삶의 목표가 생겼다. 더불어 좋은 기회들을 만나고 있어 행복하다. 꾸준히 글을 쓰는 사람이 되고 싶다. 글 안에 나를 담을 수 있기 때문이다. 사소한 것도 보물로 만드는 마법이 있는 글은 꺼내볼 때마다 즐거워질 테니까, 더는 부러워하면서 흉내 내거나 생각 없이 살 필요가 없어졌다.

*에샤페 : 피하다 도망치다 라는 뜻. 발레에서 발바닥으로 밀어 서는 동작이다.
*쿠페 : 바닥에서부터 발끝을 포인트로 끌어올리는 동작이다.
*빠쎄 : 발가락으로 다리를 쓸어 올리는 동작이다.
*쑤쑤 : 아래에, 밑에라는 뜻으로 밑으로 앉았다가 허벅지를 쫙 달라 붙여 위로 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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