친구들 위협하는 어린이, 가장 잔혹했던 동심의 기원

안치용 2023. 9. 11. 11: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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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뷰] 영화 <이노센트>

[안치용 기자]

 영화 <이노센트> 포스터
ⓒ (주)스튜디오디에이치엘
*주의! 이 기사에는 영화의 스포일러가 포함돼 있습니다.
어린아이에 관한 일반적 관념은 그들이 천진무구(天眞無垢)하다는 것이다. 인지가 발달하기 이전의 갓난아이라면 그럴 수 있겠다 싶다만, 그래서 천사라고 불러 무방하지 싶지만, 사춘기 이전의 아동에까지 일괄해서 천사 혹은 천진무구라고 말하기는 다소 무리가 생기지 않을까. 마태복음에는 예수가 천국행 티켓으로 어린아이와 같아질 것을 주문한다.
 
그때에 제자들이 예수께 나아와 이르되 천국에서는 누가 크니이까. 예수께서 한 어린 아이를 불러 그들 가운데 세우시고 이르시되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돌이켜 어린 아이들과 같이 되지 아니하면 결단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 그러므로 누구든지 이 어린 아이와 같이 자기를 낮추는 사람이 천국에서 큰 자니라. 또 누구든지 내 이름으로 이런 어린 아이 하나를 영접하면 곧 나를 영접함이니.
- 마태복음 18장 1~5장
 
여기서 숙고할 내용은 먼저 '어린아이와 같아짐'이다. 천국에 들어가는 조건으로 어린아이를 소환한 신약성서의 맥락은 무엇일까. 성서의 어린이는 'παιδίον(파이돈)'이다. 어느 정도 어린 인간을 뜻할까. 한신대 신학과 이서영 교수(신약학)는 "이 '파이돈'은 초등학생 정도 연령대의 유년을 뜻한다"며 "많은 사람이 의문을 갖듯 (현실에서 가능하지 않은) 어린이 같은 천진함을 뜻한다기보다 가장 약한 사람(집단)의 상징으로 보는 게 타당하다"고 말한다.

나 또한 어린이에서 천진함, 순진무구, 혹은 천사를 떠올리지 않는다. 그들에게 때로 상상을 불허하는 잔혹과 예상 밖의 폭력성을 발견할 수 있기 때문이다. 아이에게 순진무구 이미지를 덧씌운 건 일종의 이념조작일 수 있다. 그렇다고 사악하다고 생각하지도 않는다. 그들은 아마 선과 악의 경계가 만들어지기 이전 단계에 속했을지도 모르겠다.

철학영화
 
 영화 <이노센트> 스틸 이미지
ⓒ (주)스튜디오디에이치엘
 
에실 보그트 감독의 <이노센트>가 이러한 생각에 동의하며 만들어진 영화다. 보그트 감독은 "결혼 후 아이를 낳고 키우는 과정에서 잊고 있던 유년시절의 기억을 떠올렸다"며 "어린 시절 우리가 근본적으로 어떻게 달랐는지, 낯선 감정들을 얼마나 강렬한 경험으로 받아들였는지, 그리고 또 그런 경험들에 얼마나 개방적일 수 있었는지를 깊이 고민했다"고 말했다. 그는 "선과 악의 경계점에 서 있는 아이들에게 도덕성이란 어른들의 가르침으로 시작하지만, 결국 진정한 도덕적 감각은 스스로가 깨닫고 느껴야만 정착이 가능하다"고 강조했다.

보그트 감독이 이 작품에서 주안점을 둔 것은 선과 악의 문제이다. 더 정확하게는 선과 악의 탄생이란 오래된 철학의 문제를 천착했다. 선과 악에 관해 본유관념으로 설명하는 시각은 익숙한 성선설과 성악설로 귀결할 수밖에 없다. 본유관념을 거부하면 공리주의 윤리관으로 흐른다. 많이 들어본 최대 다수의 최대 행복의 원리이다.

이 영화는 평균적 분류로는 호러무비의 형식을 취했지만, 사실 철학영화다. 상당히 차분하고 드라마에 가까운 전개방식을 취했기에 전형적인 호러무비도 아니다. 보그트 감독이 본격 철학영화에 도전할 수 있었던 것은 아마 그에게 상당한 내공이 있기 때문이지 싶다. 제94회 미국 아카데미 시상식 각본상 후보에 오른 <사랑할 땐 누구나 최악이 된다>를 비롯 <리프라이즈> <라우더 댄 밤즈> <델마> 등 요아킴 트리에 감독의 모든 작품에 각본을 담당했다. 특정한 감독의 세계관을 창출할 만한 역량을 갖추고 있다는 이야기이다.

그렇다면, 선과 악의 탄생에 관한 그의 입장은 무엇일까. 공리주의 윤리관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성선설과 성악설이란 본유관념을 지지하지도 않는다.
  
 영화 <이노센트> 스틸 이미지
ⓒ (주)스튜디오디에이치엘
 
순진무구하지 않은 아이

아이들을 주인공으로 내세운 것은 선과 악의 탄생을 설명하기에 가장 적합한 주체이기 때문이다. <이노센트>의 주인공 어린이들은 선과 악의 진영으로 나뉜다. 그들이 왜 그런 선택을 했는지는 설명할 수 없다. 최초의 선택은 그가 어떤 인간임을 말할 뿐 선택의 동기나 이유를 해명하지 못한다.

악을 대표하는 극 중 어린이에게 환경적 요인이 살짝 엿보이긴 하지만 직접적인 인과는 없는 듯하다. 그냥 그는 악해진다. 어쩌면 악하게 태어났기 때문일지 모른다. 이 문제에 답을 줄 수 있는 사람은 없다. 따라서 감독은 현명하게 환경 요인과 아마 유전 요인과 비슷한 말인 '타고 남'을 함께 조건으로 부여한다.

선을 대표하는 극 중 어린이들 또한 그들이 왜 선한지 알 수 없다. 그들이 원래 선하다고 할 수 없다. 관객이 주목하게 되듯 영화 초반에 나중에 선의 진영을 대표하는 어린이가 악한 행동을 한다. 그러나 결국 선을 선택한다. 여기에 깔린 윤리적 입장은 본유관념의 연장인 의무론(義務論, Deontology)이다. J. 벤담이 그리스어 "déon=필요한"이란 말을 활용해 만들어낸 용어로, 의무론을 추종하는 윤리학자들은 무엇이 옳은 것인지를 사람이 직관적으로 안다고 설명한다.

<이노센트>에서 선을 택한 어린이들은 무엇이 옳을지를 저절로 깨우치고 상응해서 선한 행동을 의무로 수용한다는 점에서 의무론의 모습과 닮았다. 보기에 따라 공리주의 측면도 있다. 강력한 한 명의 악인에 맞선 세 명의 선인 집단이 선을 각성하고 받아들이는 까닭이 어찌 보면 다른 이의 고통에 공감하며 전체로서 고통을 줄이는 전략과 닮았다고 주장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변형된 공리주의라고 해야 할까.

앞의 논의로 돌아가면 그러므로 아이들이 전혀 순진무구하지 않다는 관점이 관철된다. 그럼에도 약간의 유보조항을 달 수 있는 게 선의 아이들이 선인으로 거듭나는 과정은 단순한 의무론이 아니라 타인의 고통에 크게 공감하며 그들을 지켜주고 싶다는 따뜻한 마음의 발로이다. 생판 모르는 타인이 아니라 자매와 친구 같은 친밀한 관계라 더 설득력이 있다. 타인을 구하기 위해 자신의 목숨까지 걸 정도로 선 의식이 고양된다.
 
 영화 <이노센트> 스틸 이미지
ⓒ (주)스튜디오디에이치엘
 
선 의식을 본유관념으로 타고나지 않지만, 선의 진영에 속한 아이들이 보이는 큰 공감력과 이타심을 감안하면 나아가 예수의 비유에 설득력이 있다는 역설에 도달하게 된다. 친밀함과 이해관계가 없어도 약자와 함께하라는 예수의 가르침을 실천하지 못하였지만, 아이의 범주 내에선 충분히 용인할 만하고 칭찬할 만한 실천이 아닐까.

마침내 보그트 감독의 윤리학 탐색은 나름의 성과를 거둔다. 윤리학의 제반 입장을 두루 보여주며 하나의 바람직한 가치를 제시한다. 선이 악을 이긴다. 식상한 듯 하지만 불가피한 이 결론은 사실 어느 정도 입증된 공리이다. 만일 선이 악을 이기지 못했다면, 지금의 세상이 과거보다 더 나빴을 테니까. 시간이 흐르며 인간 세상은 그것이 만족스럽지 못할지언정 어쨌든 선의 몫을 키웠다.

할리우드영화의 결말인 듯 아닌 듯

선과 악의 대치 속에 선이 승리하는 해피엔딩은 구체 표현양식에서 많은 차이를 드러낼 수 있지만 할리우드영화에서 애호하는 문법이긴 하다. 마지막 대결 장면 또한 모종의 어벤저스 스토리라고 할 만하다. 상투적인 결말에 어벤저스 구도라는 데서 진지한 탐색의 결말을 허황하게 받아들일 관객이 없지는 않을 법하다.

생각해 보면, 삶이 상투적이고 식상하듯 그 삶에 기반한 윤리학이란 것 또한 그럴 수밖에 없으며, 그렇다면 윤리학을 본격 탐구한 이 영화 또한 태생적으로 그런 측면을 지니게 되지 않을까. 할리우드영화처럼 호들갑을 떨지 않는다는 점은 차이이고, 또한 같은 결론이라도 도출하기까지 진지하게 공을 들였다면 결론도 인정해줘야 하는 것이 아닐까.

<델마>처럼 <이노센트>에 마법이 등장한다. <델마>가 기성 사회 문법에서 악인 해피엔딩이라면 <이노센트>는 기성 사회에서 받아들일 만한 해피엔딩이다. 윤리학은 기성사회의 학문이며, 마법이 동원된 호러라는 것이 윤리학을 해부하는 무대이기 때문에 색다른 호러무비가 가능했지 싶다. "관습적인 것들을 완강히 거부하는 신선한 스릴러"(L'Humanite)라는 평은 그 자체로 정확한 진단이지만 정확한 이해를 담아내지는 못했을 것이다. 철학도 영화의 소재가 될 수 있음을 <이노센트>가 보여준다.
 


안치용 영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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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붙이는 글 | 이 글은 르몽드디플로마티크에도 게재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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