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발 벗고 들어간 샌프란시스코 집에서 이문세의 '옛사랑' 울리고

권근영 2023. 9. 11. 10: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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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커밍 홈 어게인' 리뷰
영화 '커밍 홈 어게인'은 위암 말기의 엄마를 위해 정성껏 한 상 차리는 아들 창래(저스틴 전)의 한 해 마지막 날을 담았다. [사진 시네마뉴원]

미국 샌프란시스코의 텅 빈 거리를 헐떡이며 달리던 남자는 끝내 오열한다. 영화 ‘커밍 홈 어게인’(감독 웨인 왕)의 첫 장면이다. 창래(저스틴 전)는 월가의 직장을 그만두고 위암 말기 선고를 받은 엄마(재키 청)를 간병하러 집에 돌아왔다. 기숙학교에 가느라 일찌감치 집을 떠났으니 꽤 오랜만이다. 떨어져 지낸 시간이 긴 만큼 모자간에는 마음의 골도 깊어졌다.

재미소설가 이창래의 에세이를 원작으로 홍콩계 웨인 왕 감독이 연출한 영화 '커밍 홈 어게인' [사진 시네마뉴원]

식사는커녕 걷는 것도 힘든 엄마는 자신을 돌보러 생활을 포기하고 돌아온 아들의 손길을 뿌리치고, 아들은 그런 상황에 어쩔 줄 모른다. 교수인 아버지는 라면도 혼자 끓일 줄 모르고, 누나는 한국에서 일하고 있다. 한 해의 마지막 날, 식구들은 오랜만에 모여 저녁을 먹기로 했고 창래는 엄마의 레시피를 재현하려 애쓴다. 기숙학교 시절 집에 오면 엄마가 한가득 차려놓았던 그 밥상을 그대로 차려드리고 싶은 거다. 갈비를 저며 정성스럽게 칼집을 내 배즙에 재운다. 잡채를 볶고, 배추김치를 썰고, 명태전엔 쑥갓잎을, 호박전엔 홍고추를 올려 꾸민다. 음식을 삼키면 바로 토해낼 정도로 엄마의 건강이 악화했는데도 말이다.

"살이 뼈에 붙어 있어야 깊은 맛을 낸다"는 갈비찜이 영화 '커밍 홈 어게인'의 중심이다. [사진 시네마뉴원]

항암 치료 과정을 두 차례 겪고도 암이 전이된 엄마는 더는 치료를 거부했다. 오랜만에 집에 온 누나는 신약이 나왔으니 치료를 계속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아시아 이민자 특유의 교육열로 동부의 명문 기숙학교 필립스 엑시터에 보낸 아들이 예일대를 졸업한 뒤 안정된 직장을 얻었건만 결국 소설을 쓰겠다고 일을 그만둔 게 아빠는 영 못마땅하다. 창래는 이런 아빠에게 방어적으로 설명하고 있는 자신이 불편하다. 이 가족의 만찬은 무사히 끝날 수 있을까. 친절하진 않지만 궁금해지는 영화다.

암 투병 끝 가족 간의 이별을 다룬 영화 '커밍 홈 어게인' [사진 시네마뉴원]

“갈비는 살이 뼈에 붙어 있도록 남겨야 해. 뼈가 깊은 맛을 내니까”


영화의 원작은 스탠포드대 영문과 교수인 이창래(58)가 1995년 ‘뉴요커’에 기고한 동명의 에세이다. 죽어가는 엄마를 위해 요리하던 날을 회고한 자전 에세이다. 연출은 같은 아시아계 미국 감독인 웨인 왕(74)이 맡았다.

이창래의 엄마에 대한 추억과 회한은 원작과 영화에서 음식으로 촉발된다. “살과 뼈를 완전히 분리하지 않는다. 뼈가 깊은 맛을 내니까”라는 어머니의 갈비찜 레시피가 나는 누구이며, 우리 가족은 어떤 사람인지 돌아보게 하는 키워드다.

엄마(재키 청)는 문득 이문세의 '옛사랑'을 흥얼거리는데, 아빠의 불륜을 감지한 노래이기도 하다. [사진 시네마뉴원]

이창래는 에세이를 낸 그해 『영원한 이방인』(원제 'Native Speaker')으로 소설가로 데뷔, 헤밍웨이 재단상과 펜 문학상을 받았다. 사설탐정 헨리 박이 한국계 거물 정치인의 부정을 조사하며 느끼는 정체성 혼란을 다룬 작품이다. 영어를 모국어처럼 사용하면서도 미국인이 될 수 없었던 작가 자신의 경험을 대중적인 탐정 소설 기법으로 풀어낸 수작이다. 99년 뉴요커는 21세기 미국 소설가 20인에, 2000년 뉴욕타임스는 '미국 문단의 가장 주목받는 작가로 그를 꼽았다. 한국계 미국인 준이 주인공인 『생존자(The Surrendered)』(2010)는 2011년 퓰리처상 소설 부문 최종 후보에 올랐다.

영화 '커밍 홈 어게인' [사진 시네마뉴원]

신발 벗고 들어간 집에서 울리는 이문세의 ‘옛사랑’


웨인 왕 감독은 파킨슨병을 앓아온 어머니가 2014년 세상을 떠난 뒤, 오래전 읽은 에세이 '커밍 홈 어게인'을 떠올렸다고 한다. 중국에서 자신을 임신한 채 홍콩으로 넘어갔고, 또 미국에 이민 온 어머니다. 2018년 이창래를 만나 영화화를 제안했고 함께 각색했다. '국'과 '파친코'를 연출한 저스틴 전이 '창래'를 연기했다. 아는 자원을 동원해 독립영화처럼 만들었다. 거리를 둔 카메라가 롱테이크로 엿본 한국 이민자 가정의 이야기는 연극처럼 단조롭게 흘러간다. 영화가 유일하게 클로즈업하는 순간은 요리하는 창래의 손. 싱크대에는 엄마의 작은 항아리들이 조르륵 놓여 있다. 현관에서 신발 벗고 집에 올라가는 장면이나 ‘엄마’‘아빠’‘창래야’만큼은 한국어로 하는 가족들, 그리고 한때 아빠의 불륜을 감지하게 했던 노래인 이문세의 ‘옛사랑’을 엄마가 흥얼거리는 장면, 교회 관계자들이 방문해 예배보는 모습 등 한국계 이민자 가정의 디테일이 충실하다.

1981년 지인들을 모아 주말마다 촬영한 독립영화 ‘챈이 실종됐다(Chan is Missing)’로 이름을 얻은 웨인 왕의 출세작은 '조이 럭 클럽'(1994)이다. 네 명의 중국 출신 여성과 그들이 미국에서 낳은 딸들의 사연을 담은 '조이 럭 클럽'은 이민자 서사가 부족했던 당시로선 획기적인 영화였다. 한국계 캐나다인 배우 샌드라 오(52)는 '조이 럭 클럽'을 본 날 영화 인생이 바뀌었다고 돌아보기도 했다. 왕은 이어 폴 오스터 원작의 '스모크'(1995)로 베를린영화제 은곰상을 받고 대중적으로도 이름을 알렸다.

웨인 왕 감독은 아시아 배우들만으로 찍은 로맨틱 코미디 '크레이지 리치 아시안'(2018)이나 올 초 아시아계 배우와 제작자들이 아카데미상을 휩쓴 '에브리싱 에브리웨어 올 앳 원스' 같은 작품들의 시조로도 거론된다. 그러나 그는 "아시아계 미국 감독들이 시스템을 벗어나 좀 더 도전적으로 하고 싶은 영화를 찍길 바란다”고 강조한다. 그리고 ‘커밍 홈 어게인’에서 그런 초창기 독립영화의 긴 호흡으로 돌아갔다. 2019년 토론토영화제에 이어 부산국제영화제에서 상영된 이 영화가 뒤늦게 국내 극장에 걸린다. 86분. 20일 개봉.

권근영 기자 young@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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