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내의 '지휘'에 간디를 생각하는 남자
아내와 나물 작업...착한 남편은 사람의 도리
오랜만에 아내와 함께 나물 작업을 했다. 어제저녁에 마른 취나물 30㎏을 물에 불려놨다가 새벽 6시에 공장에 나가서 작업을 시작했다. 굳이 그렇게 일찍 시작하지 않아도 되는데 요즘 아내의 마음이 바빠서 새벽 작업을 많이 한다.
곰곰이 생각해보니 요즘 내 시간은 내 것이 아니다. 보통 아침에 일어나면, 아내에게 “오늘은 뭐 해야돼?”라고 묻는다. 그러면 기다렸다는 듯이 오늘 내가 해야 할 일을 쫙 늘어놓는다.
그 전날 오늘 내가 할 일을 미리 생각해 놓았던 게 분명하다. 그렇지 않다면 어떻게 묻는 즉시 막힘없이 술술 얘기가 나올 수 있겠는가.
예전 같으면, “뭐야, 내가 뭐할지를 왜 니가 정해?”라고 했을 텐데, 요즘은 그냥 힘 빼고 산다. 딱히 당장은 돌격 앞으로 할 일도 없고, 그동안 내 멋대로 실컷 해봤으니 지금부터라도 착한 남편 노릇을 하는 것이 사람의 도리다 싶기도 하다. 그렇게 힘 빼고 사니 무엇보다 주변이 조용해서 좋다.
다만 사업이라고 벌여놓고 보니 항상 돈 걱정이 있기는 한데, 그것도 오랜 시간 지속되다 보니 소위 이골이 났다.
요즘은 내가 처한 상황을 그저 담담하게, 마치 유체이탈식으로 보려고 노력한다. 예를 들면, ‘아~ 왜 이렇게 판로가 시원하게 뚫리지 않지, 답답하겠구먼’ ‘이번 달 직원들 월급이며 원재료비, 택배비, 금융비용 등을 마련하려면 고생을 좀 하겠구나’ ‘밭에 고구마 잎이 무성한 거 보니 풍년이겠구먼. 고구마 가격이 좀 내리려나’ 등등.
마치 내 일을 남의 일 보듯 하니 마음이 좀 편해졌다.
사실 마음이 이렇게 편해진 것은, 최근의 일이다. 바로 몇 달 전까지만 해도 월말이면 돈 마련하느라 전전긍긍했고 때론 잠도 쉽게 들지 못했다.
“상황을 바꿀 수 없다면, 내 마음을 바꾸자.”
공무원 초년병 시절, 소위 내 ‘사수’(선임)는 나이도 나보다 일곱 살이나 많았고 공무원 하기 전에 건설회사에 근무한 경력도 있어서 세상 물정에도 밝았다.
그리고 무엇보다 꾀가 많아서 주변 사람들을 제 입맛대로 조정하는 능력이 탁월했다. 나는 행인지 불행인지 그런 사람 밑에서 공무원 생활을 시작했다.
그는 나를 마치 자기 몸종 부리듯이 했다. 처음에는 맞서보려고 나름 머리도 써보고 화도 내보고 했는데, 이내 나는 그 사람의 상대가 되지 않는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며칠 고민하다가 내린 결론, “맞설 수 없다면 상대에게 120%(20%는 덤) 맞춰주자.”
이후 출근하면 그 사람 관점에서 필요한 일이 무엇인지 살피기 시작했고, 그가 말하기 전에 움직였다. 가끔은 놓쳐서 핀잔 받은 일도 있었지만 대체로 그 사람이 요구하는 일들을 무리 없이 해냈다.
그러기를 반년 이상 했을 때, 퇴근 후 회사 근처 호프집에서 술이 거나해진 그가 말했다.
“앞으로 너에 관한 일이라면 견마의 지로를 아끼지 않겠다.” 30년이 넘은 일인데 아직도 그 사람이 했던 말이 또렷하게 기억난다. (분명히 견마의 지로라고 했다) 인사 담당자였던 그는 이후 자신이 한 약속을 지켰다.
간디가 주창한 ‘비폭력 운동’의 위대함은, 그 운동을 통해 원하는 바를 쟁취할 수 있기 때문이 아니다. 단지 원하는 것을 쟁취하는 게 목표라면 굳이 효율 떨어지는 ‘비폭력 운동’ 말고도, 같이 무기를 들고 게릴라전을 편다거나 여론전, 법적 투쟁 등 다양한 방법이 있을 수 있다.
그런데도 비폭력 운동이 오랜 시간 생명력을 유지하는 것은, 비폭력 운동을 시작하는 순간부터 무기 든 상대방에 대한 두려움에서 벗어날 수 있기 때문이다.
무기 든 사람 측으로서는 비무장 군중이 자신을 두려워하지 않고 꾸역꾸역 달려든다면 처음에는 어떨지 모르지만, 나중에는 무섭지 않을까.
상대방에게 120% 맞춰주기 역시 내 나름의 비폭력 저항 운동이었다. 나보다 여러모로 뛰어난 사람을 상대하는 방법으로 비무장, 더 나아가 그 사람의 욕구를 최대한 충족시켜주는 방식으로 대응한 것이다.
그 결과는? 위에서 말한 바와 같이 해피엔딩. 그의 수발을 들면서 자존심 상하지는 않았나? 전혀. 상대방이 두렵다거나 내 안에 삿된 마음이 있어서 한 일이 아니라, 답답한 상황을 타파하는 방편으로 채택한 ‘비폭력 저항’이었으니까.
◇ 임송
중앙대 정외과를 졸업하고 미국 유펜(Upenn)대학 대학원에서 사회정책학을 공부했다. 1989~2008년 경제기획원, 공정거래위원회, 국가인권위원회 등에서 공직 생활을 했다. 부이사관으로 퇴직 후 일용직 목수를 거쳐 2010년 지리산(전북 남원시 아영면 갈계리)으로 귀농해 농사를 짓다가 최근 동네에 농산물 가공회사 '웰빙팜'을 설립했다.
jirisanproduce@daum.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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