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학 그리고 손 교주와 도타운 인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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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종일은 오래 전부터 손병희와 연고가 있었다.
시대정신과 구국이념이 일치했던 것이다.
이종일은 신문사를 창간ㆍ경영하면서, 그리고 나라에 큰 사건이 일어났을 때에 손병희를 찾아 의견을 나누었다.
그는 이미 동학에 심취하고, 손 교주는 동지 또는 후학으로 그를 격려하고 지켜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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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삼웅 기자]
▲ 묵암 이종일 선생 |
ⓒ 묵암 이종일 선생 기념사업회 |
이종일은 오래 전부터 손병희와 연고가 있었다. 시대정신과 구국이념이 일치했던 것이다. 그리고 젊은 시절부터 동학에 대해 심도 있는 관심을 가졌다.
"동학이란 무엇인가? 민중의 종교로 또 내국의 여러 가지 일들을 개혁하려 하는 것으로 갑오의 동학운동이 바로 이것인 것이다. 나는 손병희 교주를 찾아가 갑오년 동학당에 관한 이야기를 들었는데, 그분의 풍모는 눈빛이 햇빛처럼 반짝이면서 동안으로 역시 평온한 기상이었다."(『묵암비망록』, 1898년 1월 31일자)
"동학도가 여전히 교조의 신원을 주장하고 있는데 이것은 당연히 해결되어야 하며 동학도의 사기가 높아야 한다. 나도 동학의 교리에 호감을 갖고 있으며 또 수운과 해월을 숭배하는 바이다."(같은 해 3월 6일자)
"손병희 교주와 상면하여 환담했는데 동학도들의 민권운동에 참가할 것을 충고했더니 손 교주가 말하기를 '나도 또한 동감하는 시기이나 마음의 괴로움만 점점 더해간다.'고 하였다. (같은 해 3월 15일자)
"손병희 교주와 동학운동 방향에 관해서 논의했다. 손교주께서 말하기를 '동학은 바로 애국종교임이 분명하다. 그런데도 몰이해한 정부는 더 한층 마음의 고통을 주니 옥파께서 협조하고 응원해주겠는가?' 하였다. 내가 말하기를 '손 교주의 심중을 잘 알겠으며 나도 또한 동학도의 활동에 협조하겠노라' 하니 손 교주는 '대단히 기쁘다'고 말하면서 내 손을 잡고 한참동안 흔들다가 작별했다.'(같은 해 3월 19일자)
"손병희 교주댁을 방문했더니 나의 방문을 환영하며 손을 잡고 흔들었다. 서재로 들어가 손 교주가 말하기를 '우리들 동학운동의 가장 큰 길은 민중국가의 건설을 구현시키고 동양평화를 달성하는 것이다. 그러나 반대세력이 많은 까닭에 마음은 괴롭고 더욱 압박을 느낀다. 옥파를 우리 동학당에 맞아들이고 싶은데 어떠한가?' 하였다. 내가 말하기를 '좋고 말구요' 그리고 나서 나는 '신문창간에 협조함으로 해서 언론창달을 원조하여 달라. 그리하면 더 한층 동학운동을 보필하게 될 것이다.' 하니 손 교주가 말하기를 '나의 의견도 또한 마찬가지다' 하고 함께 술을 마시다가 집으로 돌아왔다. 교주의 풍모는 역시 선풍도골의 기상이었다."
(같은 해 4월 9일자)
"동학 손 교주와 상면했는데 기골이 장대한 모습이 장차 무언가를 계획해 낼 만 했다. 손 교주가 말하기를 오늘 이 시점에서 세상을 구제하는 방법은 동학의 정신으로 백성을 구제해야 한다고 말했다."(같은 해 5월 3일자)
"손의암(孫義菴)이 본사로 찾아와서 동학군의 활동상황에 대해서 함께 환담하였다. 내가 '이는 실로 보국(輔國)을 위하여 약동하는 추세이다'라 하자, 손의암이 '옥파의 고견에 실로 감개무량하다. 더구나 동학군의 활동을 깊이 이해하여 주니 이는 바로 나라를 위하여 민중을 사랑하는 충정이다'라 하였다. 담화를 마치고 손 의암이 떠났다."(1899년 1월 2일자).
"손병희와 사장실에서 동학에 관하여 상담하였는데 손병희가 '해월(海月)이 교수형을 당한 이후 교세가 더욱 증가하고 확장하는데 지도할만한 마땅한 인물이 없으니 원하건대 옥파가 동학에 입교한다면 나라를 위하는 일의 전망이 좋아질 것이다'라 하였다. 나는 '의암의 길을 알고 있고 또 동학의 교리를 충분히 알고 있다'라 하였다. 얼마간 이야기 하다가 돌아갔다."
(같은 해 3월 28일자).
이종일은 신문사를 창간ㆍ경영하면서, 그리고 나라에 큰 사건이 일어났을 때에 손병희를 찾아 의견을 나누었다. 그는 이미 동학에 심취하고, 손 교주는 동지 또는 후학으로 그를 격려하고 지켜보았다. 『제국신문』이 문을 닫고 국권이 막바지로 치달을 때 『천도교회월보』의 창간 업무를 그에게 맡긴 것이나, 이후 천도구국단 창설, 「독립선언서」 인쇄책임 등 막중한 사업은 두 사람의 이 같은 신뢰관계가 있었기에 가능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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