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개월 은둔의 묘미…"물질이 파괴한 인간성, 은사 삶으로 회복"

김선미 2023. 9. 11. 05: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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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둔의 미학』을 펴낸 이은윤 전 한국불교선학연구원장은 "은사 문화는 물질문명이 파괴한 인간성을 회복하는 중요한 힘이 될 수 있다"고 말했다. 김종호 기자


지난 2020년 육안으로는 볼 수 없는 작은 신종 바이러스 코로나19가 온 세상을 흔들었다. 만남을 자제하고 고독의 시간이 권장되던 그때, 이은윤(82) 전 한국불교선학연구원장은 충남 공주의 생가에서 칩거 생활을 시작했다. 아침에 눈 뜨면 기도하고, 정원에 딸린 밭에서 상추·쑥갓·아욱·근대·시금치 등을 길렀다. 마루에서 풍경을 즐기고, 밤이면 고전에 탐닉했다. 이렇게 보낸 약 1년 6개월을 원고지 1700매에 육필로 기록해 최근 책 『은둔의 미학』(민족사)으로 펴냈다. 그가 체득한 은거의 묘미는 무엇일까. 그를 지난 5일 만났다.

본지 종교전문기자였던 이 전 원장은 시골집에 '만학유거(萬壑幽居)'라는 옥호를 붙였다고 했다. 만학은 골짜기가 많았던 고향의 특징을 딴 자신의 호다. 유거는 은둔해 사는 거처를 뜻한다. 넓은 방 한 칸과 거실, 마루, 별채 황토방 주변에 참죽나무·잡감나무·소나무 등 각종 나무와 모란·철쭉 등이 그득한 곳이란다. 집터를 야트막한 동산이 병풍처럼 둘러싸고 있어 담도 대문도 필요 없는 집이다. 이 전 원장은 그곳에서의 삶을 '은거'로 표현했다. "은사(隱士)로서 사는 것을 뜻한다"며 "자연과 공존하며 자연의 운행과 질서를 스승으로 삼는 삶"이라고 말했다.

이 전 원장의 생가에는 '만학유거'라는 글귀를 새긴 현판이 걸려있다. 사진 이은윤 제공

Q : 은사란 무엇인가.
A : 본래 은둔해서 사는 선비를 뜻했다. 이들은 학식·교양을 갖췄지만 관직을 거부했다. 이후 생계를 위해 관직에 있지만 마음은 산림에 은거한 문인들로도 의미가 확장됐다. 오늘날엔 세속을 떠나지 않고도 세속을 초월하는 삶의 방식을 지키는 이들이라고 할 수 있다.

Q : 오늘날 귀촌·귀농·전원생활을 하는 사람도 포함하는 것인가.
A : 그렇다. 은사의 삶은 단순히 세상을 떠나고자 하는 피세(避世)주의도, 입신양명을 꿈꾸는 입세(立世)주의도 아니다. 이 둘 사이쯤에서 노니는 삶, 유세(遊世)주의라고 할 수 있다. 오늘날 속세에서 완전히 떠나 살 순 없지만, 마음으론 거리를 둘 수 있다. 즉 기본적 생계를 유지하면서도 정신적으로 산수를 거닐며 사는 것이다.

Q : 중요한 건 장소가 아니라 마음가짐이라는 뜻인가.
A : 아무리 산속에 숨어도 마음이 시끄러우면 의미가 없다. 진나라 때 도연명은 '심원지자편(心遠地自偏)'이라고 했다. 세상 소음 속에 있더라도 마음이 고요하면 속세도 깨끗하게 느껴진다는 것이다. 도시에서도 얼마든지 정신적 삼림을 조성할 수 있다. 예를 들어 의식주를 해결하고 시간을 내서 독서나 악기 연주, 자연 감상 등을 하는 것이다.

정원에는 '취옹정(醉翁亭)'이라는 정자가 있다. 송나라의 문인 구양수가 쓴 글에서 따온 이름으로, 산수를 즐기는 곳이라는 뜻이다. 사진 이은윤 제공

Q : 책에서 은사 문화를 강조했다.
A : 은사 문화의 사상은 크게 두 가지 개념으로 설명할 수 있다. 하나는 독립적인 인격이다. 명예나 이익에만 매달리지 않고 맑은 정신으로 사는 것이다. 두 번째는 고급 정신을 향유하는 것이다. 물질이 아닌 감성을 만족시키는 심미적 안목으로 세상과 사물을 깊이 관찰하는 것이다.

Q : 은사적 삶을 '초연'이라는 표현으로도 설명했는데.
A : 오늘날 스트레스라고 하는 번뇌는 분별과 집착에서 나온다. 인간은 상대적인 기준으로 성패·부귀·미추 등을 나누는 분별을 하고, 이때 소유하려는 집착이 생긴다. 이를 멈추는 것이 초연이다. 하루의 일은 자정까지 모두 떨어내고, 한 달의 일은 그달 말로 성패의 결과를 그대로 인정하고 넘어가야 한다.
이 전 원장은 은사적 삶이, 물질문명이 파괴한 인간성을 회복하는 하나의 방식이 될 수 있다고 강조했다. 문명사의 거대한 흐름을 거부할 순 없지만, 정신문명 생활로 균형을 잡아야 인간답게 살 수 있다는 것이다. 그는 "회복력을 외치는 시대에 생명애 의식, 자연과의 연대 등 은사들이 강조한 가치를 반추해야 한다"고 말했다.

김선미 기자 calling@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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