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업역군들의 생생한 경험 “기록은 기억보다 강하다”[장세정 논설위원이 간다]
디지털 책쓰기에 몰입하는 6090세대
『한비자(韓非子)』에 '귀신은 그리기 쉬운데 개와 말은 그리기 어렵다(畵鬼神易 畵犬馬難)'는 이야기가 나온다. 실재하는 개와 말은 모두가 눈으로 보니 조금이라도 잘못 그리면 누구나 한마디 하겠지만, 귀신은 실제 본 사람이 없으니 화공(畵工)이 마음대로 그려도 정확히 지적할 사람이 없다는 의미다. 기록이 없는 과거는 마치 귀신 대하듯 누구나 입맛대로 재단하기 쉽다는 말이기도 하다.
90대 어르신도 책쓰기에 도전
가을 초입이다. 더위가 한풀 꺾이면 이른바 독서의 계절이다. 요즘은 책이 스마트폰에 자리를 많이 내주고 있다. 그런데도 고집스럽게 책을 쓰겠다고 달려드는 이들이 있다. "기록은 기억보다 강하다"고 믿는 우공(愚公)들이다. 저자 자신과 출판사 편집자 외에는 읽을 이가 드물 학술 논문 같은 기록물을 남기기 위해 몰두하고 있다. 이미 현장을 떠난 60~80대 대기업 퇴직자들이 왕성하게 참여하고, 심지어 90대가 도전장을 낸 사례도 있다. 그들은 왜 글쓰기와 책 쓰기에 빠져들고 있을까.
지난 6일 서울 지하철 2호선 서초역 인근의 한 빌딩 2층. 한국디지털문인협회(회장 김종회 황순원문학촌 소나기마을 촌장) 산하 '디지털 책 쓰기 코칭협회'가 마련한 디지털 책 쓰기 5대학 캠퍼스. 오전 10시가 지나자 머리가 하얀 현대그룹 전직 임원들이 모여들었다.
■
「 삼성·현대 등 대기업 퇴직 임원
책쓰기 전문 강좌 참여 잇따라
전자·자동차 등 한국경제 역사
한 개인이 곧 우리 전체의 얼굴
스마트폰 덕에 책쓰기 쉬워져
“후배들과 성공 경험 나누고파”
」
디지털 책 쓰기 코칭협회는 2008년 1대학을 시작으로 전국에 모두 10개 대학을 개설했는데, 지금은 7개 대학이 가동 중이다. 가재산(71) 디지털 책쓰기 코칭협회장은 1978년 공채 19기로 삼성그룹에 입사해 삼성물산과 회장 비서실 등 계열사에서 25년간 근무했고, 인사제도·인재육성을 주제로 강의와 컨설팅을 하며 제2의 인생을 살고 있다.
그는 『한국형 팀제』 『삼성이 강한 진짜 이유』 『경영 한류』 등 35권의 책을 냈다. 스마트폰과 챗GPT를 활용한 글쓰기와 책쓰기 전도사로 활약하는 그는 이날 참가자들에게 "디지털문인협회가 발간하는 다음 문집 주제는 '동행'이니 오는 30일까지 글을 마감하면 된다"고 안내했다. 그러면서 "아내와의 동행이나 애완견과의 동행 등 뻔한 일상이나 단지 자기만족을 위한 글을 쓰면 아무도 안 읽는다. 좀 특별한 소재를 발굴하자"고 조언했다.
‘노인 한 사람은 하나의 도서관’
협회 김영희(66) 교육본부장이 강연을 시작하자 참가자들의 눈망울이 반짝거렸다. 김 본부장은 "인공지능(AI) 기술을 활용한 모바일 스캐너 앱('vFlat')을 사용하면 영어 원서 한 권을 20분이면 번역할 수 있다"고 설명했다. 이어 책 사진을 찍고 텍스트로 저장하고 PC로 이동해 정리한 뒤 복사해 구글 번역 앱으로 번역하는 과정까지 친절하게 시연했다.
김 본부장은 "저도 5년 전 『세상에 핸드폰으로 책을 쓰다니』란 책을 보고 핸드폰으로 글 쓰고 책 쓰는 방법을 처음 배웠다. 오늘 배운 것을 계속 연습하고 실전에 활용하시면 된다. '노인 한 사람의 죽음은 도서관 하나가 불타 없어지는 것과 같다'는 아프리카 속담이 있으니 대기업 임원 출신인 여러분의 경험을 책으로 꼭 남겨주시면 좋겠다"고 말했다.
박용호(64) 전 현대모비스 해외영업 실장(이사)은 "일일이 컴퓨터 자판을 치지 않고도 'STT(speech to text) 앱'을 사용해 빠른 글쓰기가 가능하다는 사실을 오늘 배워 매우 유용했다"고 말했다. 백남흥(75) 현대·기아차 전 전무는 "컴퓨터와 스마트폰 다루는 법을 아들은 잘 안 가르쳐 주지만, 대학 다니는 손자는 친절하게 도와준다"고 말해 주변에서 웃음이 터졌다. 가재산 회장은 "교육을 열심히 받으면 6개월 만에 컴맹도 폰맹도 탈출할 수 있다"고 북돋워줬다.
백 전 전무는 "대한민국 첫 국산 자동차인 포니(1975년 출시)를 만들기 위해 국산 부품 개발 담당으로 일하던 시절 일본 미쓰비시자동차 공장 견학을 갔다. 당시만 해도 한국 자동차 산업이 일본에 20여 년 뒤졌다는 말을 들었다. 약 50년이 지난 지금 일본과 대등해졌거나 일부는 앞서고 있다니 자부심을 느낀다"고 말했다. 그는 "예측하지 못한 어려운 순간들로 채워졌던 산업 현장의 경험을 책으로 남기고 싶다"고 말했다.
현대자동차 중국지주회사 사장을 역임한 이일장(73) 전 현대오토넷 대표는 지난해 발간한 『멈춰 서서 뒤돌아 보니』에서 “정주영 회장(1915~2001)은 노사 분규가 있을 때마다 자신은 임금 착취로 현대를 일군 악덕 기업주가 아니며 너희들처럼 완장을 차고 데모하고 싶다고 분노를 표출하기도 했다”는 흥미로운 기록을 남겼다.
컴퓨터·스마트폰 문맹서 탈출
지난 5일 서울 서초구 예술의전당 인근 한 건물. 디지털 책쓰기 2대학 캠퍼스에 10여명의 노신사가 모여 앉았다. 지난해 9월 시작해 1년을 넘긴 2대학 참여자는 삼성그룹의 다양한 계열사에서 퇴직한 60~80대 임원이 대부분이다. 현역 시절엔 여비서가 컴퓨터 작업을 해줬기에 이들은 의외로 컴맹이 많다. 스마트폰 개발 작업에 직·간접으로 참여했지만, 다양한 첨단 기능에는 익숙하지 않은 폰맹이라 토로하는 이들도 있다.
이날 특강은 '독립운동가 최재형 기념사업회' 이사장으로 활동하는 문영숙(70) 작가의 '백세시대 글쓰기-나를 찾는 여행, 지금 출발'이 주제였다. 문 작가가 "충남 서산의 팔봉산 밑에서 중학교만 졸업하고 아이들 키우며 주부로 살다가 50대에 동화작가로 늦깎이 등단한 것을 계기로 지금 이렇게 왕성하게 활동하며 '평생 일자리'를 얻게 된 비결은 글을 쓰고 책을 쓴 덕분"이라고 소개하자 박수가 터졌다.
그는 "49세 때 대입 검정고시에 합격하고 방송통신대 국문학과를 졸업했다"면서 "열심히 살면서 사람과 맺은 인연이 좋은 글의 소재가 됐다"며 글 쓰는 노하우를 공개했다. 진의종 전 총리의 부인 이학 여사를 만난 인연으로 2008년 『궁녀 학이』를 출간하고, 호롱불에 화상을 입고도 역경을 이겨낸 초등학교 친구의 삶을 블로그에 올린 글('절망은 없다, 내 친구 강석란')을 토대로 2014년 『나의 왼손』을 출간한 사연을 들려주었다.
시작이 반, 용기 갖고 도전을
1993년 '자랑스러운 삼성인상'을 수상한 최흥식(75) 전 삼성엔지니어링 기술고문(부사장급)은 "40년 이상 석유화학과 발전 부문 건설에 종사하며 대만·동남아·중동·인도와 미주 지역에 석유화학 공장 50여 개를 한 번의 실패도 없이 성공적으로 완공했다"며 "석유화학 공장 건설 노하우와 성공 비결을 후배들에게 책으로 꼭 남겨 주고 싶다"고 말했다.
전주제지에 입사해 삼성생명 등 그룹 계열사 임원을 거쳐 2005년 퇴임한 김윤진(82) 전 삼성SDS 고문은 "4차 산업혁명을 인문학적으로 표현한 책을 쓸 생각"이라며 "책 쓰기 대학에서 도움을 받아 'AI GPT'도 공부해 그 내용도 내 책에 반영할 계획"이라고 말했다.
이날 특강에는 참석하지 못했지만, 최고령 수강생은 이병철 회장 시절인 1957년 삼성그룹 공채 1기로 입사한 정의석(90)씨다. 그는 "스마트폰과 컴퓨터로 책 쓰는 연습을 하는데 아무래도 아날로그 세대라 디지털 신세대와 호흡을 맞추기가 힘이 든다"면서도 계속 도전하겠다고 각오를 다졌다. 서울 공대를 졸업한 엔지니어 출신인 그는 인생 경험을 담은 회고록을 준비 중이다.
『난중일기』 『백범일지』 의 역사성
정문호(84) 전 동국제강 부회장은 2018년 『커피 씨앗도 경쟁한다』를 출간했고, 지금도 디지털 책쓰기 1대학에서 활동하는 열성파다. 그는 "현역 시절 쌓은 소중한 경험을 은퇴하면서 사장하지 말고 한 권의 책으로 엮어 후배들에게 남겨 주길 바란다. 책 쓰기 학교의 도움을 받으면 시작이 반이다. 용기를 갖고 도전해보라"고 권유했다.
문영숙 작가는 이순신 장군의 『난중일기』, 박지원의 『열하일기』, 김구 주석의 『백범일지』 등을 거론하며 "이분들이 기록을 남겼기에 역사적으로 더 정확하게 평가받는다"고 강조했다. 그는 "사람은 누구나 기록을 남기고 싶어 한다. 내가 쓴 글이 모이면 자서전이 된다. 자서전은 훗날 시대의 역사가 된다"고 말했다. "역사는 승자의 기록"이란 말이 있지만, 어쩌면 기록을 남긴 자가 궁극적으로 역사의 승자가 되지 않을까 싶다.
장세정 논설위원 zhang@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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