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돈만 있으면 저축' 일본인 맞나…'기시다 매직'에 2000조 들썩 [김현예의 톡톡일본]
“요즘 젊은 고객들의 관심이 커져 상담이 늘고 있어요. 1000엔부터 투자를 할 수 있거든요.”
지난 7일 일본 도쿄(東京)의 한 대형 은행. 자료 한 뭉치를 들고 자리에 앉던 은행원이 이렇게 말했다. 20~30대 젊은 층 사이에서 소액투자 비과세제도인 NISA(Nippon Individual Savings Account) 계좌 개설이 큰 인기란 설명이다.
우리 돈 만원 안 되는 돈으로 투자 계좌를 만드는 게 큰 얘깃거리인가 생각할 법도 하지만 일본에선 다른 의미가 있다. 제로금리에도 저축만 하던 일본인들이 드디어, 투자 시장으로 눈을 돌리고 있음을 보여주기 때문이다.
이 행원이 보여준 건 은행에서 여는 NISA 계좌다. 우리로 치면 적립식 펀드 투자가 가능한 상품이다. 해외 시장이든 일본 시장이든 마음에 드는 펀드를 골라 연간 40만엔 기준, 한 달 3만3000엔(약 30만원)씩 적립투자를 해서 수익이 발생하면 비과세 혜택을 받을 수 있다.
그는 “올해까진 비과세를 받을 수 있는 기간에 한도가 정해져 있었는데, 내년부턴 무기한으로 비과세를 해주고 펀드든 주식이든 연간 360만엔(약 3200만원)까지 투자할 수 있다”고 설명했다. 그러면서 “새 제도는 내년부터 적용되지만, 올해 개설해두면 내년엔 자동으로 한도가 올라가고 올해분 비과세 혜택도 챙길 수 있어 올해 계좌 개설을 해두는 젊은이들이 많다”고 덧붙였다.
잠자는 2000조엔, 투자 시장 활성화될까
일본이 달라지고 있다. 잃어버린 30년으로 불리는 저성장 터널을 지나온 것일까. 일본 주식시장을 둘러싼 분위기가 심상치 않다. ‘투자의 신’ 워런 버핏(93)이 지난 4월 일본을 찾으며 상사 주식을 사들인 뒤 닛케이 평균주가도 동반 상승했다.
지난 7월 초 닛케이 평균주가(닛케이225)는 3만3753엔을 찍으며 일본 증시 사상 최고점을 찍었다. 올 초 대비 약 31% 오른 수치다. 상승의 원인은 무엇일까. 일본거래소그룹 홍보·IR부의 와가쓰마 아이라는 일본 경제의 회복 기조와 엔저, 낮은 금리, 지정학적 이유 등 복합적인 영향으로 분석했다. 코로나 19로 주춤했던 기업들의 실적이 점차 개선되고, 달러 대비 엔화가치가 낮아지면서 해외 투자자들의 ‘일본 주식 투자’가 유리해졌단 얘기다.
여기에 미국·중국 갈등, 중국의 주춤한 경제성장으로 인해 일본 시장이 대안으로 떠오른 것도 유리하게 작용했다. 와가쓰마는 “여기에 기시다 정권의 주식시장 활성화와 NISA 등 근본적 재검토와 같은 훈풍이 뒷받침되면서 상승장으로 이어지고 있는 것 같다”고 설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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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시다 사이클’ 시작되나
거래소 측의 설명처럼 본격적인 일본 경제의 회복, 일본 주식시장의 상승세인 ‘기시다 사이클’의 시작이란 기대감 뒤엔 정책 요인이 강하다. ‘새로운 자본주의’로 불리는 기시다 후미오(岸田文雄) 일본 총리의 공약이 대표적이다. 금융맨 출신인 기시다 총리는 2000조엔, 우리 돈 약 1경 8000조원이 넘는 예금 등 가계 금융자산을 투자로 끌어내기 위해 ‘저축에서 투자’로의 변화를 강조하고 있다.
대표적인 변화가 주식시장 개편이다. 일본은 지난해 4월, 일본은 60여 년 만에 도쿄 시장을 갈아엎었다. 5개로 나뉘었던 시장을 프라임(Prime), 스탠더드(Standard), 그로스(Growth)로 삼분했다. 외국 투자자를 끌어오겠단 취지다.
개인 투자자 확대 정책도 이어지고 있다. 도쿄증권거래소에 따르면 2019년말 기준 개인투자자는 약 1339만명. 지난 3월엔 1489만명으로 4년 새 150만명이 늘어나는데 그쳤다. 하지만 내년 1월부터 비과세를 앞세운 NISA 제도 개편이 이뤄지면 일본 정부는 개인투자자 규모가 빠르게 늘어날 것으로 내다보고 있다.
자사주 매입 늘리고, 주식분할하고
일본 금융사들도 반응하기 시작했다. 인터넷 증권 양대 회사인 일본 SBI증권과 락텐증권은 최근 주식 거래 수수료 무료 선언을 했다.
100주 단위로 거래가 이뤄지는 '투자 장벽' 해결에도 나섰다. 도쿄증권거래소는 지난해 10월 상장사 대표들에게 ‘주식분할실시 요청’을 했다. 주가가 높은 기업들을 대상으로 바람직한 투자 단위(주가 기준 5만~50만엔 범위)가 될 수 있도록 주식분할을 해달란 얘기였다. 100주 단위로 거래해야 하는 개인 입장에선 50만엔이 넘는 주식을 한번에 사기 어렵기 때문이다.
이례적인 요청에 기업들도 화답했다. 지난 7월 기준 주식분할을 결정한 기업은 유니클로 운영사인 패스트리테일링·ABC마트 등 무려 50개사. 도쿄증권거래소는 최근 ‘바람직한 투자 단위 하한선(5만엔)’도 없애기로 했는데, 일본 NTT는 주가가 1만엔대가 될 수 있도록 주식분할을 결정하기도 했다. 자사주 매입 기업들도 늘어 지난 일년(22년 4월~23년 3월)간 기업들은 9조5000억엔의 자사주를 사들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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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반도체에 쏠리는 관심
일본 시장 호조세에 ETF(상장지수펀드)에 대한 일본 내 관심도 높아지고 있다. 1주씩 단주 거래가 가능하단 장점 때문이다. 일본 ETF 시장은 7월 말 기준 약 72조엔 규모로, 이중 최근 국내외 투자자들 사이에 관심을 받는 것이 반도체 ETF다. 미래에셋자산운용의 자회사와 다이와증권이 합작해 세운 글로벌X재팬의 반도체ETF는 지난 2021년 9월 도쿄증권거래소에 상장됐다. 일본 정부의 반도체 투자 확대에 힘입어 지난달 말 기준 자산 규모는 260억엔(약 2380억원)으로 지난해 말 대비 7배 불어났다. 삼성전자나 SK하이닉스와 같은 완성칩 제조사가 아닌 일명 ‘소부장(소재·부품·장비)’ 기업 중심이라는 게 특징이다.
글로벌X재팬 관계자는 “반도체 장비가 (산업의) 50%를 넘어가는 일본의 경우, 반도체 제조공장 설립의 영향에 큰 영향을 받는다”고 설명했다. 그러면서 “최근 각국의 반도체 공장 유치 열풍에 이어 AI(인공지능) 관련 고사양 반도체 수요 증가 예상이 결국 해당 생산라인의 장비를 공급하는 일본 반도체 산업 전반의 주가를 끌어올리는 결과로 이어지고 있다”고 분석했다.
도쿄=김현예 특파원 hykim@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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