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몸이 회복돼가니 희망도 보입니다. 한달 후에 뵐게요”

이누리 2023. 9. 10. 20: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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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포츠인] 6개월 만에 컴백… 여자배구 IBK 붙박이 에이스 김희진
시즌 개막을 이틀 앞둔 마지막 훈련 중에 '또' 다쳤다. 처음 겪는 부상이 아니었기에 절망감이 배로 왔다.
1년 전 왼무릎 뼛조각 제거 수술 뒤 한창 몸 상태가 오르고 있던 차였다.
한 고비 넘겼다며 선수 자신도, 팀도 희망을 품었다. 책임감에 한동안은 아픔을 참고 뛰었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이젠 진짜 안 되겠다' 싶은 순간이 찾아왔다.
프로배구 IBK기업은행 붙박이 에이스 김희진(32)은 그렇게 다시 수술대에 올랐다.

IBK기업은행 김희진이 지난달 31일 경기도 용인 IBK기업은행 기흥연수원 체육관에서 배구공을 들고 포즈를 취하고 있다. 김희진은 김연경, 양효진 등과 함께 2012 런던올림픽 2020 도쿄올림픽 4강 신화를 일군 주역이다. 또 김연경과 팬투표 1, 2위를 다툴 정도로 여자배구에선 인기스타다. 용인=최현규 기자

수술은 잘 끝났지만 회복엔 기다림이 필요했다. 무릎에 물이 차 부은 걸 가라앉히고, 또 부기가 오르면 가라앉히는 과정을 반복했다. 이따금 조급해지더라도 같은 루틴을 유지하며 꾸역꾸역 재활 훈련장으로, 경기장으로 향했다.

다행히 당초 예상보다는 회복 속도가 빠르다. 최근엔 볼 훈련도 시작했다. 6개월 만에 만져본 공이 아직 낯설지만 현재까지의 컨디션은 나쁘지 않다. 오는 10월 14일 개막하는 2023-2024 V리그에서 “아픈 모습보다는 환한 모습을 보여주고 싶다”는 김희진을 지난달 31일 경기도 용인에 있는 IBK기업은행 기흥연수원에서 만났다.

2012 도쿄, 첫 성장의 순간

거듭된 부상을 받아들이는 데엔 시간만 한 약이 없었다. 혼자 재활 훈련에 시간을 쏟아온 만큼 지금은 자신을 살필 여유가 생겼다. 그간의 선수 생활도 돌아보게 됐다. 코트 밖에 있다 보니 출전 기회 하나하나가 소중했던 ‘처음’을 가장 먼저 되새겼다.

중학생 때 배구를 시작하고 프로 무대를 밟기까지 주전을 놓친 적 없는 김희진이지만 국가대표팀 주전 자리는 감히 넘보기 어려웠다. 2012 런던올림픽을 앞두고 여자 배구대표팀에 승선했을 땐 라인업부터가 워낙 짱짱했다. 당시 김희진은 김사니 정대영 황연주 김연경 양효진 등 잔뼈 굵은 ‘언니’들 등 뒤에서 경기를 지켜보는 것만으로도 설렜던 ‘막내’였다.

기회는 예상치 못한 순간 찾아왔다. 2012년 5월 23일 일본 도쿄체육관에서 열린 올림픽 세계예선전 ‘숙적’ 일본과의 4차전. 1세트 중반 교체 투입된 김희진은 도합 11점을 올리며 ‘게임체인저’ 역할을 제대로 했다. 서브에이스 2개를 연달아 터뜨리며 일본의 리시브 라인을 무너뜨렸다. 아무도 기대하지 않았던 막내의 활약에 그날 한국은 길었던 22연패 사슬을 끊어내고 일본에 패배를 안겼다. 무려 8년 만의 승리로, 경기 후에도 ‘도쿄 대첩’이라 오래 회자됐다.

“그날은 경기 전 아침부터 뭔가 좀 이상했어요. 정대영 언니가 제 유니폼 밑단에다 뭘 적어 줬거든요. 이사야 41장 10절(두려워하지 말아라. 내가 너와 함께함이라)이었는데, 혹시라도 시합에 들어오면 잘해보자는 뜻이었죠. 평소처럼 코트 밖에서 경기를 지켜보는데 희한하게 시합에 너무 나가고 싶더라고요. 그때 마침 분위기를 반전시킬 겸 감독님이 절 넣으셨는데 예상치 못하게 제가 터진 거죠. 막내가 들어와서 잘하니까 분위기도 살고 김연경 언니도 더 신나서 때리고. 경기 결과를 떠나서 그날 경험이 제 인생에 박혀있어요. 그걸로 지금까지 버티지 않았나 싶어요.”

당시 코트 위에서 느낀 짜릿함은 김희진의 배구 인생에 첫 성장의 순간이자, 선수 생활을 지속할 수 있는 원동력으로 남았다. 그는 “당시 코트 위 언니들의 환한 웃음을 잊을 수 없다”며 “그때를 기점으로 대표팀에서도 주전으로 들어가는 경기가 생겼고 사람들에게 얼굴을 조금이나마 알릴 수 있었던 것 같다”고 떠올렸다.

2020 도쿄, 다시 배운 배구

용인=최현규 기자

또 다른 성장의 순간은 스테파노 라바리니 감독을 만났을 때다. 2019년부터 2020 도쿄올림픽까지 대표팀 사령탑을 맡았던 라바리니 감독은 김희진에겐 배움의 의지를 되살려준 고마운 스승이다. 김희진은 “감독님을 만나기 전이 딱 도전 의식을 잃어갈 때였다”고 돌아봤다. 선수 생활도 어언 10년쯤 접어드니 ‘이 정도면 되겠지’ 하는 마음이 불쑥불쑥 고개를 들었다. 그러나 라바리니 감독이 알려준 배구의 세계에선 모든 게 새로웠다.

당시 제일 많이 연습했던 건 백어택이다. 키가 큰 외국 선수들의 블로킹을 피해 크로스 각을 때릴 수 있어야 한다는 생각에 밤새 영상을 보며 공부했다.

사실 어릴 때부터 키가 크고 힘이 좋아 큰 공격이 가능했던 김희진에겐 잔기술을 익힐 겨를이 없었다. 김희진을 거쳐 간 지도자들도 세게 스파이크를 때리고 점수를 많이 내는 큼직한 것들을 기대했다. 당시에도 “키 작은 선수들이 구사하는 기술이 그렇게 부러웠다”는 김희진은 외부에 비친 강점 말고도 다른 기술을 더 익히고 싶어 연구를 거듭했다. 경기력에 기복이 있긴 했지만 그간 팀 상황에 따라 미들블로커와 아포짓을 오갈 수 있는 멀티플레이어로, 공격 루트가 다양한 에이스로 자리 잡게 된 것도 그런 노력 덕분이었다.

공교롭게도 두 성장의 순간 모두 국제무대에서 태극마크를 달고 뛸 때 겪은 것이다. 그래서인지 최근 대표팀 후배들의 경기를 지켜보면서도 남 일 같지 않다. 10여년 전 대표팀 막내로 있을 때 운 좋게 출전 기회를 얻었던 것처럼 그는 “어린 선수들도 국제 경기에 많이 출전해보는 게 중요하다”고 짚었다. 김희진은 “아시아선수권, 올림픽 예선전까지 큰 경기들을 치르고 오면 아시안게임 때는 기량이 오르지 않을까 싶다”고 덧붙였다.

14년 만의 첫 주전 경쟁

김희진은 마지막 이정표로 지금 겪고 있는 부상을 꼽았다. 그는 “부상으로 인한 위기를 잘 넘기는 게 선수 생활에 또 다른 전환점이 될 것 같아 걱정 반 기대 반”이라고 말했다. 일단 2023-2024시즌에 잘 복귀하는 게 관건이다. 김희진은 “지금 상태로는 복귀해도 성에 차지 않을 것 같다”며 “완벽한 기회가 왔을 때 보여드리는 게 맞는 건지, 아니면 부족한 모습이라도 차근차근 보여드리는 게 맞는 건지 고민 중”이라고 조심스러워했다.

달라진 몸 상태와 포지션 변경으로 새로운 강점을 찾아야 하기에 김희진은 다시 연구에 나선다. 그는 “이전까지 아포짓으로 힘에서의 강점을 보여줬다면 이제는 미들블로커로서 속도에서의 강점을 보여줘야 한다”고 설명했다.

“서브도 강점이었죠. 그런데 다치고 나서는 점프 후 올라가는 중심이 달라지다 보니까 주춤한 것 같기도 해요. 무릎 상태에 따라 다시 좋아지지 않을까 싶어요. 지금 저랑 비슷한 서브를 구사하는 선수들도 많아서 또 어떤 기술로 차별화해야 할지 고민이 많아요. 이런저런 선수들 영상을 찾아보고 연구해야죠.”

프로 데뷔 14년 차에 처음으로 팀 주전 경쟁에도 가담한다. 지난 2023 구미·도드람컵 프로배구대회에서 활약한 미들블로커 김현정(25·IBK기업은행)을 특히 눈여겨봤다는 김희진은 후배들의 존재가 “좋은 자극제가 될 것 같다”고 말했다. 그는 “저평가를 받고 있다고 생각했던 선수였는데 사람들이 드디어 진가를 알아봐 줘 행복하다”면서도 “이제 같은 포지션을 놓고 겨루는 만큼 경기를 보면서 안주하지 말아야겠다는 다짐이 들었다”고 전했다.

올 시즌 목표는 봄배구 진출이다. 김희진은 “최근엔 추울 때 시즌을 마쳐서 따뜻할 때 배구를 해보고 싶다”고 말했다. 마지막으로 남길 말이 있는지 묻자, 목례와 함께 짧게 덧붙인다. “한 달 후에 뵙겠습니다.”

용인=이누리 기자 nuri@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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