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도도 25조원 쏟아붓는데"…첨단기술 강국 한국 '불안한 1등'
미국·중국의 기술패권 경쟁이 결국 ‘쩐의 전쟁’으로 흐르고 있다. 주요국들은 수십조원의 돈을 쏟아 부으며 첨단기술 기업 유치에 사활을 걸고 있다. 반면 한국 정부의 지원은 사실상 세제 혜택에 그쳐 자칫 쌓아놓은 기술 우위마저 흔들릴 수 있다는 경고음이 울린다.
인도, 미·중 갈등 틈새 노려 25조 풀어
첨단 기술 보조금은 대결 당사국인 미국과 중국만의 전유물이 아니다. 10일 윤석열 대통령이 주요 20개국(G20) 정상회의 참석 차 인도 뉴델리를 방문 중인 가운데 인도의 ‘투자 인센티브’가 주목받는다. 인도는 최근 자국 내에 부지를 매입하고 시설을 설립하는 기업에 100억 달러(약 13조원) 규모의 보조금을 지원하겠다고 발표했다. 중앙정부가 50%, 지방정부가 추가로 20%를 지원한다. 앞서 2021년 약속했던 12조원에서 금액이 더 늘어난 것이다.
글로벌 기업도 호응하고 있다. 미국 마이크론은 인도 구자르트 지역에 총 27억5000만 달러(약 3조7000억원)를 투자한다고 밝혔다. 미국 마이크로칩과 AMD도 ‘인도의 실리콘밸리’라 불리는 벵갈루루 등에 대규모 반도체 시설을 짓기로 했다.
일본도 파운드리(반도체 위탁생산) 세계 1위인 대만 TSMC가 구마모토현에 짓는 공장 사업비 1조1000억 엔(약 10조 6000억원) 중 40%를 지원한다. 마이크론의 히로시마 공장과 차세대 반도체 양산 시설에도 2000억 엔(약 1조8000억원)을 보조한다.
유럽연합(EU)도 예외는 아니다. 독일은 미국 반도체 기업 인텔에 사업비의 3분의 1이 넘는 100억 유로(약 14조3000억원)를 지원하고, TSMC가 드레스덴에 지을 공장과 관련해서도 보조금 수준을 논의 중이다. 이탈리아와 이스라엘도 인텔의 공장 사업비에 각각 40%, 12.8%를 보조하기로 했다.
‘현재 먹거리’ 된 미래 기술…급해진 이유
김세완 이화여대 경제학과 교수는 “코로나19로 비대면 수요가 늘고, 미·중 갈등까지 겹치면서 4차 산업혁명 기술의 시계가 빨라졌다”며 “코로나 전엔 미래 기술로 분류되던 것들이 지금은 각국을 먹여 살리는 주력 기술이 됐다. 주요 정부의 행보가 빨라진 이유”라고 진단했다.
한국은 그동안 ‘앞당겨진 기술’ 시대의 수혜를 받았지만 시장에선 ‘벼랑 끝 선두’라는 평가가 나온다. 업계에선 “이보다 더 불안한 1등은 없다”고 우려한다.
무엇보다 중국의 부상이 주목받는다. 첨단 기술과 장비의 수입이 막힌 상황에서도 7나노미터(㎚·1나노=10억 분의 1m) 반도체를 탑재한 최신 화웨이 스마트폰을 내놓은 게 대표적이다. 삼성전자 관계자는 “중국은 응용력이 뛰어나 기존 기술을 가지고도 성능 좋은 제품을 만들 수 있다”며 “미국 제재로 중국을 완전히 막을 수 없는 이유”라고 말했다.
삼성전자는 중국을 따돌리기 위해 부가가치가 높은 시스템 반도체 등 비메모리 반도체에 힘을 싣고 있지만 문제는 의외로 질보다 양이다. 삼성 관계자는 “파운드리 고객 입장에선 안정적인 조달이 중요한데 캐파(생산 규모)가 TSMC와 3~4배 이상 차이가 나니 고객 유치에 한계가 있다”고 말했다.
다른 분야도 상황은 비슷하다. 시장조사업체 SNE리서치에 따르면 올 상반기 국내 배터리 3사의 전기차용 배터리 점유율은 23.9%로 전년 동기 대비 2.2%포인트 하락했지만, 중국 업체들은 57.1%로 오히려 지배력이 커졌다. 중국은 값싼 리튬인산철(LFP) 배터리의 성능을 개선하는 방식으로 세계 시장을 잠식해 가고 있다.
디스플레이 역시 한국은 유기발광다이오드(OLED) 시장 1위를 기록 중이지만, 중국의 액정표시장치(LCD) 기술이 올라오며 전체 디스플레이 시장 점유율(36.9%)은 중국(42.5%)에 선두 자리를 내줬다. 디스플레이 업계 관계자는 “중국 LCD가 OLED의 5분의 1~10분의 1 가격인데 소비자 입장에선 OLED와 차이를 크게 못 느끼니 시장을 뺏기는 것”이라고 말했다.
“적자 나는데 세액공제 무슨 소용”
한국 정부는 반도체·디스플레이·2차전지·바이오 등을 국가전략기술로 지정하고, 조세특례제한법을 개정해 세액공제율을 15~25%로 확대했다. 하지만 업계에선 주요국이 돈을 푸는 비상시국엔 한국도 특단의 정책이 필요하다고 입을 모은다. 익명을 원한 업계 관계자는 “첨단 산업은 이익이 나려면 최소 3~4년이 걸리는데, 정부 지원은 이익 나는 부분에 대해 세금을 깎아주는 데 맞춰져 있어 큰 도움이 안 된다”고 주장했다.
이와 함께 ▶정부의 산업 이해 부족 ▶지원 범위 제한 ▶지원 결정과 실제 집행 부서(기획재정부) 간 의사소통 부족 등을 애로점으로 꼽았다. 일례로 현재 바이오산업 지원은 백신에만 국한돼 있는데 실제 바이오 산업엔 바이오의약품·바이오테크·제조 전문·의료기관·원자재 등 다양한 기업과 사업이 존재한다.
강석구 대한상공회의소 조사본부장은 “과거 물량 공세로 대만과 일본의 D램 산업을 제쳐버린 게 한국”이라며 “미·중은 물론 인도와 일본, 이탈리아·아일랜드까지 보조금을 지급하는데 우리만 인센티브가 너무 소극적”이라고 지적했다. 그러면서 “보조금 지급과 함께 해외처럼 이익 창출과 무관하게 환급 형식으로 지원하는 등 적극적인 액션이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이소아 기자 lsa@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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