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화점을 지척에 두고도 살아남은 전통시장 [우리 도시 에세이]

이영천 2023. 9. 10. 17: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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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동쪽의 관문, 구리 전통시장과 돌다리 곱창거리

오랜 시간 삶의 ‘흔적’이 쌓인 작은 공간조직이 인접한 그것과 섞이면서 골목과 마을이 되고, 이들이 모이고 쌓여 도시 공동체가 된다. 수려하고 과시적인 곳보다는, 삶이 꿈틀거리는 골목이 더 아름답다 믿는다. 이런 흔적이 많은 도시를 더 좋아한다. 우리 도시 곳곳에 남겨진 삶의 흔적을 찾아보려 한다. 그곳에서 지금을 살아가는 우리를 기쁘게 만나보려 한다. <기자말>

[이영천 기자]

결절점은 사람을 끌어모은다. 이는 지리적으로 필연이다. 보행에만 의존하던 시절에도 결절점은 있었다. 길이 교차하는 사거리나 주막, 관청가 같은 곳들 말이다. 사람이 모이면, 이런 시설이나 거리를 중심으로 자연스레 시장이 형성되었다.

나루터도 그런 곳 중 하나다. 강이나 하천을 건너려면 배를 기다려야 했고, 그런 곳에 생겨난 장터는 안성맞춤이었다. 시간과 함께 발달한 기술로 나루터에 다리가 놓이고, 이 역시 훌륭한 결절점이었다. 이미 터를 잡은 장터가 영역을 넓혀가며 시장으로 커나간다. 시장이 커지면서 한 지역의 중심지로 자리매김한다. 강을 끼고 있는 도시의 초기 형성에서부터 확산에 이르는 전형적인 과정이다.
 
▲ 돌다리 구리 전통시장 주변, 돌다리 사거리 부근에 재현해 놓은 옛 돌다리.
ⓒ 이영천
국도 6호선이 지나는 교문동과 수택동도 이런 곳 중 하나다. 이곳엔 왕숙천으로 흘러드는 제법 너른 하천이 있다. 구리역 남쪽, 경춘로 아래 복개된 주차장이 그 흔적이다. 이 하천에도 물론 돌다리가 있었다.

본디 큰 다리라는 의미의 '한 다리'가 어음 변화로 '흰 다리'가 되었고, 일제 강점기를 거치면서 백교(白橋)였다가 행정구역 변화로 橋門洞(교문동)의 '橋'로 남았다. 이 한 다리 남쪽에 1950년대 후반부터 생겨난 장터가 지금의 '구리 전통시장'이다.

잘 지켜온 시장

수도권이 거대도시화하기 이전, 구리 전통시장은 서울 동쪽을 대표하던 시장으로 이 지역 중심지 역할을 톡톡히 해냈다. 사방 수십여 리를 아우르며 30여 년 전성기를 구가한다. 변곡점은 1980년 말 도래한 소위 '마이카 시대'라는 도로교통이었다. 이는 일상생활은 물론 도시와 국토 공간구조에도 획기적인 변화를 요구하는 '추진요인'으로 작용한다.
 
▲ 구리 전통시장 주차장과 주변 건물, 상부 지붕 등 현대적 감각에 맞게 얼굴을 바꾼 시장. 세대를 가리지 않고 이용하는 몇 남지 않은 오래된 공간이다.
ⓒ 이영천
 
전국이 자동차 교통체계로 급속히 전환한다. 이에 맞춰 도시 공간도 이를 뒤따르기 바빠지고, 곳곳에서 교통난 등 도시문제가 생겨난다. 특히 주차 문제는, 밀집된 원도심에선 해결 난망한 골칫거리였다. 이에 주차장 확보 경쟁이 일어난다. 공간 생존의 문제였기 때문이다. 특히 집약적 토지이용을 보이는 백화점 등 대형 소매점에선 필수요소로 대두한다.

교통 발달과 함께 가장 큰 취약성을 드러낸 시설이 재래시장이다. 무엇보다 보행과 대중교통에 의존해 성장해 온 한계는, 주차와 결부되어 존립에 직결된 문제로 다가왔기 때문이다.

곳곳에서 재래시장이 쇠락과 퇴락을 거듭한다. 여러 활성화 운동이나 캠페인을 벌여봐도 일시적 현상에 불과하다. 너른 주차장을 확보한 백화점 등 현대식 집약적 소매점과 경쟁에서 뒤처졌기 때문이다. 결국 주차장이라는 인프라 확보 문제였다. 물론 이용객을 끌어들이기 위한 소프트웨어가 무용지물이라는 얘기는 아니다.
 
▲ 공영 주차장 늦었고 충분치는 않으나, 시장의 존립과 활성화를 위해 들어선 공영 주차장. 배송센터를 두어 이용객 편의를 도모하고 있다.
ⓒ 이영천
 
이를 비교적 잘 지켜온 곳 중 하나가 구리 전통시장이다. 충분치는 않으나 주차장을 확보해, 무엇보다 이용자 편의를 고려했다. 아울러 이웃한 공간과 상생을 도모하고, 활력을 불어넣기 위해 젊은이들의 발길을 끌어들일 고민을 끝까지 포기하지 않았다.

이로써 재래시장 기능이 현대적 감각 및 인프라와 결합해 방문객이 놀고, 즐기고, 느끼며, 즐겁게 먹고 가는 공간으로 거듭나게 되었다. 심지어 불과 수백 미터 거리에 경쟁 관계의 거대 백화점을 두고서도, 살아남을 수 있었던 이유와 흔적, 노력이 곳곳에서 엿보인다.

상생하는 공간

시장통 포장마차에서 팔던 곱창이 입소문을 타기 시작한다. 바짝 익힌 곱창을 매콤한 초장에 찍어 상추 쌈 하는 맛은 기가 막혔다. 무엇보다 가격이 저렴해 부담이 적었다. 시장통 포장마차로 성공한 상인들이 점포를 얻어 독립하기 시작한다. 맛과 가격이 보장되었으니, 발길을 끄는 건 정해진 순서였다. 1990년대 후반부터 젊은이들이 문전성시를 이룬다. 그렇게 만들어진 골목이 '돌다리 곱창 골목'이다.
 
▲ 돌다리 곱창 거리 시장통에서 성공한 상인들이 자리를 잡아 집단화한 돌다리 곱창 거리. 맛과 가격으로 젊은이 발길을 끌어모은다.
ⓒ 이영천
 
2005년 개통된 구리역은 곱창 골목을 한층 더 키우는 역할을 한다. 한창 번화하였을 때 50여 업체가 성업하기도 했다. 곱창 골목이 점차 유명해지기 시작하자, 다른 식당들이 들어서 지금 같은 먹거리 문화가 갖춰졌다. 몇은 근동에서 소문난 맛집이기도 하다.

하지만 교통 발달이 늘 순기능만 가져다주는 건 아니다. 고속·광역화한 교통은 역으로 공간의 쇠락을 불러오기도 한다. 여러 사정이 있었을 것이나, 돌다리 곱창 골목의 상대적인 쇠락도 발달한 교통에 영향받았음을 추정해 볼 수 있다. 24시간 운영하는 가게가 있음에도 십수 개로 규모가 줄어들었음이 이를 증명하는 셈이다.

그러함에도 구리 전통시장과 상생을 끊임없이 모색하고 있다. 태생지가 시장이었음을 기억하고 있는 까닭일까? 시장과 곱창 골목이 한 몸처럼 움직인다. 우선 기능적으로 보완관계다. 장을 보고 허기진 배를 싼 가격의 음식으로 달랠 수 있다.
 
▲ 시장 앞 저잣길 시장에서 곱창 거리로 향하는 저잣거리. 젊은이들 발길을 끄는 시설이 다수다.
ⓒ 이영천
 
아련한 옛 정취는 덤이다. 활성화를 위해 매년 개최하는 행사에도 한 몸으로 움직인다. 이런 노력으로 젊은이 발길이 여전하다는 점이다. 왁자하고 사람 내음 물씬한 풍경이 늘 펼쳐진다. 정(情)이 물씬 넘치는 공간이라는 얘기다.

관동대로 옆 장터

공간의 생명력은 발걸음이다. 발걸음이 와 닿고 머물다 가야 한다. 이는 한 공간에서 보고, 즐기고, 맛볼 수 있어야 한다는 의미다. 이를 어떻게 꾸미느냐가 공간의 지속성을 담보하는 생명선이다.

완벽하지는 않으나, 시장은 이를 위해 끊임없이 변신 중이다. 백화점 못지않은 다양성은 시장이 내세우는 강점이다. 이는 무엇보다 젊은이 발길이 머물고 다시 찾게 하는 효과를 가져왔다. 나이 지긋한 세대와 2030 세대가 골목을 채운 모습에서, 번성하던 옛 저잣거리가 연상되는 건 당연한 귀결이다.
 
▲ 구리 전통시장 입구 경춘로(국도 6호선)에서 시장으로 들어서는 골목에 상징물을 세웠다. 사람들로 붐비는 골목이 인상적이다.
ⓒ 이영천
 
시장 시설개선 등 하드웨어에 무척 유연한 소프트웨어가 결합한 결과다. 원도심 상징으로 시민참여를 통해 '와구리' 캐릭터를 상표화하였다. 무엇보다 고령층 이용자를 위한 '장보기 서비스'가 혁신적이다. 도우미가 대신 장을 봐주는 혁신적 아이디어다. 매년 봄 밤이면, 시민들 참여로 이뤄지는 길거리 공연은 또 다른 볼거리다.

정기적 문화공연과 상인이 운영하는 라디오 방송은 이미 하나의 상징으로 자리 잡았다. 이 모든 게 공간을 지켜내려는 시장 주역인 상인, 이 공간을 사랑하는 고객인 시민의 자발적 참여가 만들어낸 결과여서 더욱 값져 보인다.

이처럼 변화한 장터의 변신은, 경기 옛길인 관동대로(평해길)와 함께한다. 서울에서 강원도와 경상 북부를 오가던 길이다. 저잣거리 형태로 명맥을 지키고 있다는 게 신기할 정도다.

길은 지형 극복의 결정체다. 가장 짧고 험난하지 않은 지형을 따라 길이 생겨나기 때문이다. 길은 또한 교행과 만남의 장소다. 길을 통해 사람과 물자, 정보가 교환되고 소비된다. 따라서 자연스레 장시(場市)를 형성시키는 바탕이다.
 
▲ 복고 감각 보행자 전용공간은 물론 곳곳에 재래와 현대가 공존하도록 노력한 흔적들이 엿보인다.
ⓒ 이영천
 
아차산, 용마산, 망우산 동쪽에서 관동대로는 이런 역할을 맡았을 터이다. 이제 흔적으로 남은, 그리 멀지 않은 재래를 받아 다시 현재라는 시간을 지나고 있다. 옛길은 분명 무척 풍부한 이야기를 품고 있을 것이다.

재래와 현대의 공존

지리적 중심성은 몸이 기억하는 특성 중 하나다. 어느 공간에서 건 중심을 향하기 마련이다. 우리 몸에 새겨진 DNA 지도 때문이다. 공간 중심성은 따라서 구심력이 강하다. 구심력이 해체되면 공간은 필연적으로 쇠락한다. 지속가능성을 찾으려면 끊임없이 변신을 거듭해야 하는 이유다.

그런 측면에서 구리 전통시장과 주변 공간은 일정의 구심력을 확보한 셈이다. 다만 스토리텔링은 좀 부족해 보인다. 서울을 향하는 인문 지리적 관문이다. 관동대로 길의 역사, 옛 저잣거리가 품은 이야기, 장돌뱅이가 봇짐 매고 걸었을 고단함은 충분한 이야기 감이다. 지난 시대를 풍미하던 이야기 중 하나일 수 있다. 기억이다.
 
▲ 관동대로(평해길) 일부 서울에서 강원도와 경상 북부를 향하던 관동대로의 일부. 길은 시장을 통과해 동으로 향한다.
ⓒ 이영천
 
현대적 감각에 어울리는, 변신한 옛길이라는 하나의 전형을 세워 보는 건 어떤가. 전주 한옥마을의 변신이 매번 새로움으로 다가오듯, 하회마을이 지켜낸 가치가 더욱 빛을 발하듯 말이다. 이곳은 서울 동쪽에서 거의 유일한 '오래된' 공간이다.

얼핏 보아 우리 도시 어디에나 있을 법한 곳에서 새로움을 보았다. 상생은 물론 공간을 지키려는 주체의 노력, 이를 아끼고 사랑하는 시민의 자발적 참여가 무척 아름다워 보였다.

깡그리 밀어버리고 새로 짓는 건 누구나 할 수 있다. 하지만 이어져 온 공간을 지키고 가꾸는 일은 차원이 다른 영역이다. 사람과 세대를 포용할 줄 알아야 하고, 공간을 읽어낼 줄 알아야 하기 때문이다. 결국 끊임없이 변화하는 시대에 적응하는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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