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과서 속 '빨갱이' 독립운동가들 간추려 보았습니다

서부원 2023. 9. 10. 17: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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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석열 정부 잣대로 하자면 절반 넘게 지워야... 독립운동 자체를 없애려는 걸까

[서부원 기자]

"당분간은 봉오동 전투와 청산리 대첩이 수능시험이나 모의고사에 출제되는 일은 없을 것이고, 진도 나가기에 바쁜 수업 시간에 굳이 중요하게 다룰 것 같지도 않다."

지금껏 홍범도 장군의 대한독립군과 봉오동 전투, 김좌진 장군의 북로군정서와 청산리 전투를 관련짓는 문제는 모든 한국사 시험의 '단골 문항'이었다. 아이들 모두가 익숙해하는 주제여서 여느 문항에 견줘 정답률도 확연히 높다. 지난 2020년 홍범도 장군의 유해가 국내로 봉환되고 영화 <봉오동>이 개봉하면서 출제 빈도가 더욱 높아졌다.

공교롭지만 지난 6일 고등학교 1, 2, 3학년이 모두 응시한 전국 연합 모의평가에서는 홍범도나 김좌진 등의 이름이 보이지 않았다. 흔히 특정 주제가 유독 부각이 되거나 늘 출제되던 '단골 문항'이 안 보이면, 출제자들이 정권의 눈치를 본 거라며 눈을 흘기곤 한다. 출제자들이 시험 문항을 만들 때 시의성 있는 주제를 다루되 '몸을 사리게 된다'고 여겨서다.

적어도 작년 모의평가에 출제됐던 홍범도 장군의 유해 봉환식이 지문으로 등장했던 식의 시험 문제를 대놓고 내긴 어렵게 됐다는 뜻이다. 봉오동 전투와 청산리 전투의 역사적 의의를 묻는 문항도 출제하기가 무척 껄끄러울 테다. '킬러 문항'을 배제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교육과정평가원장까지 내쫓는 마당이니, 출제자 모두가 돌다리도 두드려 보고 건너자는 심정일 것이다.

"공산 전체주의를 맹종하며 조작 선동으로 여론을 왜곡하고 사회를 교란하는 반국가세력들이 여전히 활개를 치고 있다."

윤석열 대통령이 지난 광복절 경축사에서 한 발언이다. "공산 전체주의 세력은 늘 민주주의 운동가, 인권 운동가, 진보주의 행동가로 위장하고 허위 선동과 야비하고 패륜적인 공작을 일삼아 왔다"면서 국무위원들 앞에서는 그들과 맞서 싸울 걸 주문했다. 이후 국방부와 국가보훈부, 통일부를 중심으로 대통령의 '홍위병'을 자처하며 '빨갱이 척결'에 나서는 형국이다.
  
 윤석열 대통령이 서울 서대문구 이화여대 대강당에서 열린 제78주년 광복절 경축식에서 경축사를 하고 있다. 2023.8.15
ⓒ 대통령실통신사진기자단
 
대통령의 발언은 시험 출제자에게 상당한 압박이 된다. 사실상 출제 지침으로 작용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분란의 소지가 있는 내용이라면 애초 피하는 게 상책이다. '공산 전체주의'라는 신조어까지 등장한 마당에, 일제강점기 사회주의 계열의 독립운동을 평가하는 내용은 배제하는 게 안전하다. 주제야 차고도 넘치는 게 한국사 시험이니 그리 어려운 일은 아니다.

일선 교사에게도 은연중에 수업 지침으로 작용한다. 문제는 현행 한국사 교과서는 대통령의 역사 인식과 아예 딴판이어서 더욱 부담스럽다는 점이다. 일제강점기 당시 사회주의 계열의 독립운동에 대해 비교적 상세히 서술되어있는 데다, 해방 후 월북한 인물들의 행적까지 정리해 놓고 있다. 기성세대가 자녀의 교과서를 읽어본다면 상전벽해의 느낌이 들 것이다.

현 정부에서 한국사 교과서를 새로 쓰게 된다면, 가장 먼저 일제강점기를 다룬 대단원부터 손보게 될 게 분명하다. 홍범도 장군마저 대놓고 욕보이는 판국에 교과서 속 다른 사회주의자들의 면면이 멀쩡할 리 없다. 대충 추려봐도 족히 십수 명은 된다. 독립운동을 위한 방편으로 삼은 사회주의 이념이 100년 뒤 그들의 업적을 폄훼하는 족쇄가 된 현실이 착잡하기만 하다.

현 정부와 '코드' 안 맞는 독립운동가

당장 연해주에서 고려 공산당의 대표로 활동한 이동휘부터 내쳐질 듯하다. 열혈 독립운동가로서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국무총리에 추대된 그는 뼛속 깊이 사회주의자였다. 임시정부의 초대 국무총리였다는 점보다 독립운동 방식을 두고 이승만 초대 대통령과 사사건건 대립한 사회주의자라는 점에서 '배제 0순위'가 될 게 불 보듯 환하다.

학생 신분으로 3.1 운동에 참여했다가 중국으로 망명한 뒤 신흥무관학교를 졸업하고 조선의용대 지도자가 된 윤세주도 지워져야 할 것이다. 의열단을 세운 김원봉의 고향 후배이자 핵심 측근으로 중국에서 항일 영웅으로 추앙되는 인물이니 무탈할 수 없다. 기생으로 3.1 운동에 참여한 뒤 사회주의자가 된 여성 독립운동가 정칠성의 업적도 현 정부의 코드에 맞지 않는다.

봉오동 전투 당시 홍범도의 대한독립군과 함께 일본군을 격파한 군무도독부의 최진동도 교과서에서 지워져야 한다. 그는 봉오동 전투 이후에도 줄곧 사회주의 러시아 혁명군과 손잡고 일본군과 맞서 싸운 대표적인 '빨치산'이다. 현 정부의 기준대로라면, 3.1 운동 이후 만주나 연해주에서 무장투쟁을 전개한 독립운동가 모두 현 정부엔 눈엣가시 같은 존재일 수밖에 없다.

해방 후 월북한 김원봉이 드리운 그늘이라고 해야 할까. 의열단의 서술 비중도 덩달아 축소될 듯하다. 나아가 일제 식민 통치기관의 파괴와 친일파 암살 등 민중의 직접 혁명을 도모한 의열단은 이현령비현령으로 사회주의에 엮일 가능성이 있다. 의열단원을 주축으로 김원봉이 창립한 조선의용대는 해방 후 북한 공산군으로 편입된 조선의용군의 주력이 된다.

김상옥, 나석주, 김익상, 박재혁, 김지섭 등 혈혈단신 총 한 자루, 폭탄 하나로 일제에 맞선 숱한 의열단원들이 그나마 그들의 지도자인 김원봉처럼 내쳐지지 않고 건국훈장을 받을 수 있었던 건, 해방을 보지 못하고 순국한 '덕분'이다. 만약 그들이 살아서 해방을 맞았다면, 김원봉을 따라 월북했을 게 틀림없다. '빨갱이'로 낙인찍혀 치도곤당할 뻔한 운명이었던 거다.

우리가 저항 시인으로만 기억하고 있는 이육사도 의열단원이었다. 그 역시 해방을 한 해 앞둔 1944년에 순국했으니, 천만다행이라고 해야 할지 모르겠다. 오매불망 꿈에 그리던 해방된 조국이 남북 분단으로 치달은 참담한 현실을 보았다면, 그는 어떤 선택을 했을까. 의열단의 행동 강령인 <조선혁명선언>을 작성한 신채호 역시 살아서 해방을 맞았다면 '큰일 날 뻔했다'.
  
▲ 홍범도 장군 찾은 대전 시민들 독립운동가 홍범도 장군 흉상을 육군사관학교에서 철거하는 문제를 놓고 국방부와 보훈단체들의 의견이 엇갈리는 가운데, 29일 오후 대전 유성구 국립대전현충원 독립유공자 3 묘역을 찾은 대전시민들이 홍범도 장군의 묘역을 살펴보고 있다.
ⓒ 연합뉴스
 
조선 공산당 초대 비서였던 김재봉의 어록비가 교과서에 실린 건, 현 정부의 기준엔 '이적 행위' 그 자체다. 그는 홍범도와 함께 참가한 동방 피압박 민족 대회에서 '조선 독립을 목적하고 공산주의를 희망한다'고 말했다. 해방 후 노동당과 일제강점기 공산당을 동일시하는 현 정부의 시각에선 결코 용납될 수 없는 일일 테다.

1920년대 중반 꺼져가던 독립운동의 불씨를 되살린 6.10 만세운동을 사회주의를 학습한 학생 단체들이 주도했다는 건 이미 상식이다. 3.1 운동 이후 최대의 민족운동으로 평가받는 광주학생독립운동 역시 사회주의에 빚졌다. 광주학생독립운동을 이끈 대표적인 사회주의 학습 단체였던 성진회의 간부 장재성 등은 6.25 전쟁 당시 북한군에 동조할 게 우려된다며 국군에 의해 살해되었다.

조선 여성 동우회를 조직해 사회주의 여성 운동을 이끈 주세죽, 허정숙, 고명자 등의 활동도 교과서에서 삭제될 것이다. 그들은 조선 공산당 여성 트로이카로 불리며, 독립운동과 여성해방운동을 주도했다. 여성운동은 백정의 신분 해방 운동이었던 형평 운동, 어린이의 인권 보장을 주장한 소년 운동과 더불어 사회적 차별을 거부하는 대중운동의 한 축이었다.

<조선 사회 경제사>를 저술해 일제의 식민사관을 논박한 역사학자 백남운과 국어사전 <말모이> 편찬 사업을 주도한 국어학자 김두봉은 이름을 거론하는 것조차 위험천만한 일이다. 그들은 북한 정권 수립에 참여한 자타공인 '빨갱이'다. 백남운은 북한 초대 내각의 교육상을 역임했고, 김두봉은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장과 김일성대학 초대 총장을 지냈다.

전북 고창 출신인 백남운과 부산 출신인 김두봉은 해방 후 수구초심을 뒤로 하고 북한을 택했다. 조선학술원 초대 위원장을 역임한 거물 경제학자도, 조선독립동맹을 이끌며 항일 무장투쟁에 앞장선 국어학자도 북한에 협력한 죄는 용서받을 수 없다. 특히 김두봉은 한힌샘 주시경 선생의 수제자로, 일제강점기 우리말과 우리글을 지켜내는 데 혁혁한 공을 세운 인물이다.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건국 강령과 제헌 헌법에도 반영된 '삼균주의'를 창시한 조소앙마저 지워질 수 있다. 서유럽뿐만 아니라 러시아에서 생활하면서 사회주의를 수용한 행적이 뚜렷하다. '삼균주의'는 국유제와 의무 교육제를 통해 개인 간의 균등을 이룰 수 있다는 등의 사회주의 이념을 담고 있다. 그는 6.25 전쟁 중 납북되어 현재 북한 애국열사릉에 잠들어 있다.

풍전등화의 위기에 놓인 독립운동사
  
 서울 한 서점에 진열된 한국사 교과서. 2015.4.2
ⓒ 연합뉴스
 
현행 고등학교 한국사 교과서 일제강점기 단원에 소개된 사회주의 성향의 독립운동가들을 대강 나열해 보았다. 이들의 행적과 관련된 서술, 삽화 등을 삭제하면, 쪽수를 헤아려 보니 단원 전체 분량의 절반이 날아간다. 4개의 대단원 중 하나가 일제강점기 독립운동사를 다루고 있는데, 그렇게 된다면 독립운동사가 전근대사나 대한민국의 역사 부분으로 편입될 수도 있다.

설마 현 정부는 이걸 노린 걸까. 무시로 보수와 진보, 남녀와 세대를 갈라치며 지지층 결속을 꾀하더니 이젠 핏빛 독립운동사까지 헤집어 숱한 독립운동가들을 욕보일 태세다. 사회주의 계열의 독립운동가들이 쓰러지고 나면, 독립운동의 나머지 한 축인 비타협적 민족주의 계열의 독립운동가들 역시 무사할 수 없다. 노골적인 친일파 백선엽 띄우기가 그 신호탄이다. 일제강점기 독립운동사가 풍전등화의 위기에 놓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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