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잔해 속 비명 들려도 장비 없다"…모로코 재앙 키운 부실건축

이유정, 서유진, 조수진, 이승호 2023. 9. 10. 17: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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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아프리카 모로코의 북동부의 하이 아틀라스 산맥에서 8일 밤(현지시간) 강진이 발생하면서 최소 2000여명이 사망했다고 AFP통신·영국 BBC·미 뉴욕타임스(NYT) 등이 보도했다.

매체들에 따르면 이날 오후 11시 11분 북부의 중세 고도(古都) 마라케시에서 남서쪽으로 71㎞ 떨어진 알 하우즈주 서남부 아틀라스 산맥에서 최소 규모 6.8의 지진이 발생했다. 미 지질조사국(USGS)은 규모 6.8로 측정했고, 모로코 국립 지구물리학연구소는 규모 7.2라고 발표했다. 첫 지진이 발생한 이후 규모 4.9를 비롯한 수백 차례의 여진이 뒤따랐다. 왕립 모로코군은 9일 “현재까지 최소 2012명이 사망하고 2059명이 부상 중”이라고 밝혔다. 부상자 가운데 1404명은 위독한 상태라고 군은 설명했다.

지진이 강타한 모로코 마라케시의 구시가지에서 9일(현지시간) 한 주민이 무너진 집 앞에서 망연자실한 모습으로 서 있다. AFP=연합뉴스


모로코의 마라케시에서 한인 식당을 운영하는 이승곤씨는 중앙일보와의 전화 인터뷰에서 “지진 당일(8일) 가족들과 집 밖으로 뛰쳐나와 차에서 잤고, 9일에 집으로 돌아갔더니 내벽에 금이 가 있었다”면서 “불안한 마음으로 잠자리에 겨우 들었다”고 밝혔다. 이씨는 “여전히 많은 이들이 집이 내려앉을까 두려운 마음에 공원에서 노숙을 하며 밤을 보내고 있다”고 전했다.

박재용 모로코 한인회장도 중앙일보에 “8일 밤 11시쯤 지진이 발생했을 땐 가재도구가 떨어질 정도로 건물이 크게 흔들렸다”며 “현지 경찰이 긴급하게 건물 밖으로 나오라고 안내해서 모두들 급하게 밖으로 나와 긴장 속에 밤을 지새웠다”고 말했다. 박 회장은 “다행히 여진은 거의 없어 카사블랑카나 라바트 등에서는 일상적인 생활이 이뤄지고 있다”며 현지 분위기를 전했다.

외교부에 따르면 현재 모로코에 머무르고 있는 한국인은 360여명이다. 10일 현재까지 교민들의 피해는 접수되지 않았다. 외교부 당국자는 “현지 대사관이 우리 교민들의 피해 상황을 면밀히 점검 중”이라면서 “교민들은 주로 카사블랑카 등에 거주하고 있어 현재까지 큰 피해는 없는 것으로 파악하고 있다”고 밝혔다.


“아직도 몸이 떨린다”


BBC는 “이번 지진은 이 지역에서 1900년 이후 100년 만에 가장 강력한 지진”이라고 전했다. 진앙지인 알 하우즈주를 비롯해 치차우아, 타루단트 등 험준한 고산 지대의 시골 마을들이 인명 피해가 컸다. 알 하우즈주의 물라이 브라힘 마을에 사는 라센(40)은 아내와 네 명의 자녀를 하루아침에 잃었다. 그는 AFP통신에 “나는 모든 것을 잃었다”며 망연자실해 했다. 그는 무너진 집의 잔해 속에서 세 딸의 시신을 꺼냈지만, 아내와 아들은 찾지 못하고 있다. 같은 마을의 여성인 부크라는 “아이들이 많이 죽어 온 마을이 슬퍼하고 있다. 아직도 몸이 떨린다”면서 눈물을 흘렸다.

자신의 이름은 밝히지 않은 또 다른 여성도 모로코 국영TV에 사망한 남편과 아이들의 이름을 하나씩 부르며 눈물을 터뜨렸다. 그는 “내가 가진 모든 것이 사라졌다. 나는 혼자가 됐다”고 말했다. 모로코 왕국은 9일부터 3일간의 애도 기간을 선포하고 구조 작업에 군을 투입했다. 세계보건기구(WHO)는 이재민과 부상자 등을 더하면 최소 30만 명이 피해를 보았을 것으로 추정했다.


“한밤중 아내 비명 듣고 뛰쳐나와”


북아프리카 모로코의 대도시 마라케시에서 9일(현지시간) 주민들이 광장에 나와 밤을 지새고 있다. AFP=연합뉴스
이번 지진은 여러 면에서 사망자가 5만 명에 육박했던 올 초 튀르키예·시리아 강진(규모 7.8)과 닮은꼴이다. 미 USGS와 모로코 국립연구소를 종합하면 알 하우즈의 진원은 지표면에서 18.5㎞ 아래로 비교적 ‘얕은 지진’이었다. 올해 2월 튀르키예 강진 때는 첫 지진의 진원은 지하 18㎞였고, 곧 이은 여진(규모 7.5)은 10㎞에서 비롯됐다. 지표면과 가까울수록 흔들림이 커 인명 피해가 클 수밖에 없다. 이 때문에 8일 지진은 북부 해안 도시인 카사블랑카와 수도 라바트에서도 느껴졌으며, 대서양을 건너 포르투갈에서까지 진동이 감지됐다.

한밤중에 지진이 일어났다는 점도 비슷했다. 11세기 무렵 지어진 모로코의 옛 수도 마라케시는 유명 관광지로, 현지인뿐 아니라 외국인들도 많이 있다. 마라케시에 거주하는 영국인 마틴 제이는 BBC 라디오에 “막 잠자리에 들었는데 아내의 비명이 들렸다”면서 “눈을 뜨니 침대와 바닥, 네 개의 벽까지 모든 것이 흔들리고 있었다”고 말했다. 그는 “모두가 여진을 걱정해 집 밖으로 나와 땅바닥에 앉아서 밤을 지냈다”고 말했다. 프랑스 국적의 스테판 귀린은 월스트리트저널(WSJ)에 “TV와 꽃병이 바닥으로 떨어져 부서지는 동안 건물 벽에 밀착해 있었다”면서 “내 인생의 가장 긴 15초가 끝난 뒤 맨발로 뛰어나왔다”고 말했다.

일부 주민들은 10일까지 마라케시 중심부의 제마 엘 프나 광장과 공원 등에서 담요와 매트리스 등을 깔고 노숙을 했다. 제마 엘 프나 광장 인근의 쿠투비아 모스크(첨탑)도 이번 지진으로 파손됐다.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지정된 구시가지 메디나의 상징인 붉은 사암의 흙벽도 일부 무너져 내렸다.

9일(현지시간) 물라이 브라힘 마을의 주민들이 잔해 위로 조심스럽게 움직이고 있다. AP=연합뉴스

모로코 국영 매체 2M에 따르면 알 하우즈의 산골 마을들은 구불구불하고 좁은 도로로 연결돼 있어 구조 작업이 더디게 진행되고 있다. 이곳은 최고봉이 1만 3000피트(약 3962m)에 이르는 험준한 산간 지대다. 주민 대다수가 내진 설계는커녕 벽돌과 진흙으로 지어진 전통 가옥에 살고 있다. 미 USGS도 “지진에 매우 취약한 가옥들로 인해 피해는 더 커질 수 있다”고 지적했다. 일부 지역은 통신·전기이 끊겼다.


“잔해 밑에서 계속 비명이 들려”


중장비가 아직 닿지 않은 산골 마을 주민들은 맨손으로 흙더미를 파헤쳐 가며 가족과 이웃들을 찾고 있다. 알 하우즈주의 아스니 마을에 사는 하야트 부차마는 WSJ에 “잔해 밑에서 비명이 계속 들리는데 꺼낼 수 있는 장비가 없다”면서 “마을 주민들이 손으로 구조하고 있다”고 말했다.

모로코 시골 마을의 부실 건축 문제는 오래전부터 거론됐지만, 재앙을 막지는 못했다. 모로코 국립건축가협회의 오마르 파르카니 전 회장은 NYT에 “시골 주민들은 가난해서 건축업자를 고용할 수 없어 스스로 집을 짓거나 저숙련 노동자의 도움을 받아 집을 짓곤 한다”고 말했다. 카사블랑카의 건축가 아나스 아마지르도 “부실 건축물들을 생각하면 막대한 사망자 수는 어느 정도 예견된 것”이라고 했다.

모로코 구조대가 9일(현지시간) 지진의 진원지인 알 하우즈주의 물라이 브라힘 마을에서 무너진 가옥 밑에 깔린 사람을 구조하고 있다. AFP=연합뉴스


미 USGS는 이번 지진으로 모로코 국내총생산(GDP)의 최대 8%(약 100억 달러, 약 13조원)에 이르는 경제적 손해가 발생할 것으로 예상했다. 세계은행에 따르면 지난해 기준 모로코의 GDP는 1341억 8000만 달러(약 173조)였다. 이와 관련 WSJ는 “이미 심각한 경제 위축을 겪고 있는 모로코에 또 다른 타격”이라고 짚었다.

전문가들은 아프리카판과 유라시아판의 충돌을 이번 지진의 원인으로 보고 있다. 아틀라스 산맥 자체가 유라시아판과 아프리카판의 충돌로 융기한 지형이다. 모로코와 알제리, 튀니지까지 약 2300㎞에 걸쳐 있다. 다만 아프리카판은 유럽 방향으로 연간 4㎜씩 이동하는데, 미 캘리포니아주의 샌 안드레아스 단층이 연간 50㎜씩 이동하는 데 비해 매우 느리게 움직이는 편이다. 이 때문에 모로코는 상대적으로 지진 빈도가 높지는 않았다. 미 USGS가 “흔치는 않지만, 예상에 없던 것은 아니었다”고 진단한 배경이다.

앞서 2004년 모로코 북동부 알 호세이마에서 규모 6.3의 지진이 발생해 600명 이상이 사망했다. 1960년에는 서부 아가디르에서 규모 5.8의 지진이 발생해 최소 1만 2000~1만 5000명이 사망했다.

서유진·이승호·이유정 기자 uuu@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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