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신 알리자 "낳으실 거예요?"…오디션 붙은 라미란이 들은 말
육아와 가사에 집중하다 보니 7년이라는 시간이 지나갔다. 재취업에 도전한 계기에 대해 “누구의 엄마, 누구의 아내도 아니라 제 인생을 되찾기 위해서”라고 씩씩하게 말해보지만, 면접관들은 공감하지 못한다. 독종처럼 일하며 줄곧 성과를 냈던, 소위 ‘잘 나가던’ 시기를 호소해봐도 돌아오는 반응은 비슷하다. “그건 7년 전이잖아요.”
현재 공개 중인 티빙 오리지널 시리즈 ‘잔혹한 인턴’(12부작)의 한 장면이다. 연극 무대까지 포함해 30년 가까이 연기를 해 온 배우 라미란(48)에게도 비슷한 시기가 있었다. 드라마에서 40대 경력단절 여성 고해라를 연기한 그는 “출산 당시 2년 정도 공백이 있었다”면서 “죽을 때까지 할 일이라 여겼던 연기를 더는 할 수 없다는 생각에 불안감에 시달리던 시기였다”고 했다. 당시 느꼈던 초조함과 절실함을 재취업을 위해 고군분투하는 고해라를 표현하는 데 고스란히 담았다.
“출산 후 2년 공백…연기하는 것은 큰 복”
지난 5일 서울 삼청동에서 만난 라미란은 “내 나이에 가까운 데다 내가 겪어온 과정이기도 해서 공감이 많이 됐다”며 캐릭터에 대한 애정을 드러냈다. 극 중 고해라는 출산 후에도 일에 매진하며 상품기획자(MD)로 승승장구하지만, 육아를 돕던 친정어머니가 쓰러지면서 7년간 일터를 떠나게 된다. 이후 재취업에 번번이 실패하다가 과거 입사 동기이자 지금은 실장이 된 최지원(엄지원)의 권유로 인턴으로 입사한다.
라미란은 “(출산 후) 아이의 돌이 다가올 무렵 영화 ‘친절한 금자씨’(2005) 오디션을 보고 다시 연기를 시작하게 됐다”며 “(첫 영화였기 때문에) 촬영을 한 번도 해본 적이 없어 불안하기도 했지만, 연기를 계속할 수 있다는 것 자체로 날아갈 것만 같았다”고 회상했다. “연기할 수 있는 것만으로도 큰 복이라 생각했고, 이후에는 대사나 분량에 상관없이 가리지 않고 작품을 맡았다”고 말했다. 그렇게 19년 동안 90개가 넘는 영화·드라마에 출연했다. 조연·단역·특별출연 등 가리지 않았다.
7년 전 잘 나가는 과장이었지만, 밑바닥 인턴으로 다시 일을 시작하는 고해라. 아쉬움보다 설렘과 기대가 가득한 모습의 캐릭터를 그려낸 건 라미란 자신의 경험과 느낌이 있어서다.
고해라는 최지원으로부터 출산휴가와 육아 휴직을 쓰려는 직원 두 명을 퇴직하도록 유도하면 과장직을 주겠다는 제안을 받는다. 워킹맘 동료들의 약점을 이용해 자신의 이익을 챙길 것인지 딜레마에 놓인 상황. 제안에 흔들리면서도, 오히려 그들의 퇴직을 막으려는 고해라의 모습을 라미란은 설득력 있게 표현한다. 그는 “실제라면 당연히 거절했겠지만, 끊긴 경력을 다시 잇는다는 게 얼마나 힘든지 알기에 고민이 정말 많이 따랐을 것 같다”고 말했다.
그 역시 과거 오디션 중 출산에 대한 회의적인 질문을 받은 경험이 있다고 했다. “1차(오디션)를 붙은 상태에서 임신 사실을 알게 돼 2차 때 말씀드렸더니 ‘아이 낳으실 거예요?’ 하더라”면서 “‘안 낳을 것 아니냐’는 뉘앙스라 기분이 나빴지만, ‘네, 낳을 겁니다’하고 나왔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임신과 육아를 바라보는 사회의 시각이 달라지고 있지만, 한참 나아가야 할 단계”라고 덧붙였다.
'다작 배우' 임에도 “늘 불안감 갖고 살아”
과장 시절의 고해라는 워킹맘 동료들이 일에 어려움을 겪을 때마다 “다른 엄마들도 싸잡아 욕먹게 한다”며 냉정하고 싸늘한 태도를 보인다. 하지만 경력 단절 후엔 동료들의 고충에 공감하며 180도 바뀐다. 이에 대해 라미란은 “캐릭터 자체가 변했다기보다는, 환경이 바뀌면서 삶과 인생의 중요한 가치가 달라진 것”이라면서 “최지원 역시 과거엔 임신 포기 각서에 대해 부정적이던 인물인데 사회의 불합리 속에서 현재의 냉정한 모습으로 바뀌었다. 환경에 의해 이러한 변화가 생긴 것”이라고 말했다.
‘잔혹한 인턴’은 사회와 환경에 지배받을 수밖에 없는 개인의 한계를 다양한 인물을 통해 보여준다. 임신 중 힘쓰는 일을 하지 못해 동료들에게 민폐가 될까 노심초사하는 대리, 3개 국어 능력자지만 초등학교 1학년 아들을 키우며 육아 휴직을 고민하는 과장 등이다. 고해라의 남편 공수표(이종혁)는 정리해고를 당한 뒤에야 적성검사를 하며 자신이 진짜 좋아하는 일이 무엇인지 모색한다. 라미란은 “드라마에 '공감된다'는 댓글을 볼 때면 슬프고 씁쓸하다”면서 “고해라가 다시 일어서는 모습을 통해 조금이라도 위로가 됐으면 한다”고 말했다.
영화 ‘정직한 후보’ 시리즈, 드라마 '나쁜엄마'(2023) 등 다수의 흥행작에 이름을 올렸지만 그는 “한 치 앞도 볼 수 없는 게 배우의 일이고 잊히는 것도 한순간이다. 늘 불안하다”고 했다. “다작을 하고 있지만 (대중이) 지겨움을 느낄 수도 있고, 피로도가 쌓일 수 있어 이런 부분을 경계한다”며 “불안감은 늘 있지만, 스트레스로 받지 않으려고 노력한다”고 말했다.
“대사 하나짜리 단역을 하더라도 하고 싶은 작품을 하려고 해요. 지금 일이 있다는 것에 감사하고 행복해하면서요.”
어환희 기자 eo.hwanhee@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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