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란히 ‘코너’ 몰린 북·러…국제 제재에도 ‘무기 거래’ 꺼내나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과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의 정상회담이 성사될 경우 4년 전 첫 김정은ㆍ푸틴 정상회담과는 전혀 다를 것이라는 관측이 잇따르고 있다.
김정은은 2019년 2월 ‘하노이 노딜’로 완전히 체면을 구긴 직후인 그해 4월 블라디보스토크에서 푸틴 대통령을 만났다. 당시 회담이 김정은의 정치적 입지 회복, 즉 북한의 필요에 의해 성사됐음을 의미한다. 그런데 이번엔 그때와 상황이 완전히 달라졌다.
코너에 몰린 북ㆍ러…맞아 떨어진 이해 관계
우크라이나 전쟁 이후 러시아는 강력한 국제 제재를 받고 있다. 전쟁이 장기화하면서 탄약 등 무기가 절실해진 상황에서 무기를 지원받을 수 있는 나라는 사실상 북한이 유일하다.
극심한 경제난에 봉착한 북한 역시 러시아의 식량, 에너지 지원을 바라고 있다. 여기에 러시아는 이미 두 차례 실패한 정찰위성을 비롯해 핵추진 잠수함, 핵무기, 대륙간탄도미사일 등 북한이 사활을 걸고 개발하고 있는 첨단 무기에 대한 원천기술을 보유하고 있다.
나란히 코너에 몰려 있는 북ㆍ러의 이해관계가 정확히 맞아떨어졌다는 의미다. 특히 이번엔 4년 전과 달리 러시아가 북한보다 오히려 더 급한 상황에 몰렸다는 관측도 적지 않다.
김용현 동국대 북한학과 교수는 10일 통화에서 “무기거래와 그에 따른 대북 물자 지원 등은 모두 유엔 제재 대상이지만 북ㆍ러 모두 이미 ‘더 이상 잃을 게 없다’는 판단을 하고 있는 것 같다”며 “특히 러시아의 입장이 지금 ‘찬밥·더운밥’을 가릴 처지가 아닌 상황으로 몰려 있고, 김정은이 이러한 상황을 최대한 유리하게 활용하려 할 것”이라고 말했다.
“전쟁 장기화…北 협상력 강화 계기”
푸틴 대통령은 북한의 정권수립(9ㆍ9절) 75주년을 맞아 김정은에게 보낸 축전에서 “우리들이 공동의 노력으로 모든 방면에서의 쌍무적 연계를 계획적으로 확대해나가게 될 것이라고 확신한다”고 밝혔다. 푸틴 대통령은 이어 “75년 전 소련은 조선 땅 위에 세워진 새 독립국가를 제일 먼저 인정했다”며 북한의 ‘가장 친한 친구’를 자처하기도 했다.
지금까지의 북ㆍ러 관계는 상대국이 외세의 공격을 받았을 때 ‘자동 개입’하고, 제재 속에서도 북한을 실질적으로 지원해온 동맹 성격의 북ㆍ중 관계와는 달리 사실상 ‘핵우산’을 제공하는 정도에 그쳤다. 푸틴 대통령이 직접 ‘모든 방면에서의 쌍무적 연계’를 강조한 것은 북ㆍ러 관계의 변화 가능성을 시사한 말로도 풀이된다.
임을출 경남대 극동문제연구소 교수는 “북한의 교역에서 러시아가 차지하는 비중은 3%에 불과한데, 북한은 이번 회담을 계기로 교역의 96%를 차지하는 중국 외에 러시아를 새로운 지원창구로 추가하려고 할 것”이라며 “특히 북한의 무기 지원을 통해 우크라이나 전쟁이 장기화할 경우, 미ㆍ중 경쟁 구도 속에서 불거진 향후 대만 문제와 관련해서도 전선을 한반도로 확장할 위치에 있는 북한의 대(對)서방 협상력이 예상 외로 확대될 가능성도 있다”고 말했다.
실제 시진핑(習近平) 중국 국가주석은 김정은에게 보낸 축전에서 “백년 이래 있어본 적이 없는 대변화가 급속히 일어나고 있다”며 미ㆍ중 경쟁으로 인한 국제 정세 변화를 먼저 언급했다. 그러면서 “국제 및 지역 정세가 어떻게 변하든 전통적인 중ㆍ조(북ㆍ중) 친선협조 관계를 훌륭히 수호하고 훌륭히 공고히 하며 훌륭히 발전시키는 것은 시종일관 중국 당과 정부의 확고부동한 입장”이라며 유사시 북한의 역할을 시사하는 듯한 표현을 쓰기도 했다.
북ㆍ러 ‘무기거래’는 상수
이 때문에 외교가에선 이번 회담에서 북ㆍ러간 무기거래와 관련된 논의가 이뤄질 가능성을 사실상 ‘상수’로 보고 있다.
제이크 설리번 백악관 국가안보보좌관은 지난 5일 “러시아에 공급한 무기가 다른 주권국가의 식량 저장고와 도시 난방시설을 공격하는 데 쓰인다면 북한은 국제사회에서 그 대가를 치러야 할 것”이라고 밝혔다. 무기를 매개로 한 거래를 전제하고, 이를 엄중히 경고한 발언이다.
그럼에도 김정은은 러시아를 향해 대놓고 ‘무기 세일즈’를 벌이고 있다.
김정은은 지난 7월 27일 북한의 전승절(정전기념일) 70주년 때 방문한 세르게이 쇼이구 러시아 국방장관에게 직접 최신 무기를 소개했다. 이후 김정은은 세차례에 걸쳐 대구경 방사포탄과 전략 순항미사일 및 무인공격기, 전술 미사일, 전투 장갑차 생산 시설을 공개적으로 둘러봤고, 북한 매체를 통해 이를 대대적으로 보도했다. 모두 러시아가 즉시 우크라이나 전장에 투입할 수 있는 무기들이다.
박원곤 이화여대 북한학과 교수는 “북ㆍ러 모두 제재를 받는 상황에서 공동성명 등을 통한 무기 거래를 발표할 가능성은 낮지만, 정상 차원의 무기거래 논의는 분명히 진행될 것”이라며 “그러나 유엔 안보리 상임이사국으로서 대북 제재결의안에 찬성했던 러시아가 스스로 이를 번복하는 데 따른 부담이 상당할 수밖에 없고, 북한 역시 전범 국가인 러시아와 한배를 탄다는 점에서 결과적으로 자충수가 될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고 말했다.
4년 전엔 20시간 기차 이동
일본의 NHK는 러시아 소식통을 인용해 김정은이 11일 전용열차로 평양을 출발할 가능성이 있다고 보도했다. 평양에서 블라디보스토크까지의 거리는 약 1200km다. 김정은은 4년 전에도 특별열차인 ‘태양호’를 타고 푸틴 대통령을 만났다. 당시 김정은의 열차는 열악한 북한의 철도 상황 때문에 북한 내 853km를 이동하는데 14시간이 걸렸고, 북ㆍ중 접경인 하산에서 블라디보스토크까지 327km를 가는데도 7시간이 추가로 소요됐다.
드미트리 페스코프 러시아 대통령궁(크렘린) 대변인은 지난 9일 “푸틴 대통령이 11일부터 이틀간 동방경제포럼에 참석하고, 12일 전체회의에서 연설을 할 예정”이라고 밝혔다. 정상회담이 11일 또는 12일 성사될 가능성이 있다는 의미다. 다만 크렘린은 김정은의 방문에 대해선 “할 말이 없다”며 직접적 언급을 피했다.
전문가들은 김정은이 블라디보스토크를 방문하더라도 “정상회담은 다자회의체인 동방경제포럼과 별도의 트랙으로 진행될 가능성이 있다”는 관측을 내놨다.
박원곤 교수는 “북한의 특성상 최고 지도자가 다자 회의에 ‘N분의 1’ 자격으로 참여한 전례가 없다”며 “12일 회담이 성사되더라도 동방경제포럼과 별개의 장소에서 하거나, 또는 포럼 직후 회담을 별도로 진행할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고 전망했다. 박 교수는 이어 “북한은 지금처럼 김정은의 동선이 노출됐을 경우엔 일정을 변경해왔다”며 “만약 김정은이 공개된 러시아행을 강행할 경우 이는 북한이 자신감을 의도적으로 노출하는 행위인 동시에 북한의 외교 문법을 새로 정립하는 계기가 될 수도 있다”고 덧붙였다.
강태화 기자 thkang@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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