격정적 희망, 행위미술가 임택준 개인전

이혁발 2023. 9. 10. 14: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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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합문화예술공간 'MERGE?'에서 오는 15일까지

[이혁발 기자]

행위의 순수성이 강조되는 전면회화
 
▲ <gap></gap> 길이 10m 높이 4m 크기의 작품 제작 과정
ⓒ 임택준
 
복합문화예술공간 'MERGE?'에서 열리는 임택준 개인전 'GAP'(9.3~9.15)에서 눈을 확 사로잡는 것은 길이 10m 높이 4m 크기의 작품이다. 이 작품은 크기 때문에 그림 안으로 들어가서 그릴 수밖에 없다. 미국 말로 '올오버페인팅(all over painting)'이라 하는 '전면회화'다.

이 단어는 그림 안으로 들어가서 뿌리기 작업을 한 잭슨 폴록 그림에 대한 칭호이다. '뿌리기'와 '그리기'의 차이일 뿐 그림 안에 들어가서 그림을 그리며 여백이 없이 전면을 다 메운다는 의미에서 이 임택준의 그림도 전면회화이다.

잭슨 폴록 전면회화의 특징은 '무의식', '우연', '자동기술'이다. 그리는 행위 과정에서 그림의 조형적 요소, 미학적 쾌감을 은연중 생각하지 않을 순 없겠지만 무엇을 그린다는 의식이 아니라 순수한 무의식, 자동기술에 의한 회화라는 것이다.
 
▲ <gap></gap> 전시 광경
ⓒ 이혁발
임택준의 이 그림은 폴록보다 형태들이 들어가기는 하지만 그림을 바닥에 펼쳐놓고 그리며, 그림의 가운데서 작업을 하며, 어떤 것을 표현해야 한다는 명확한 목적의식이 개입되지 않은 순수 무의식의 상태로 작업을 하였다는 점이 폴록 작품과 유사하다.

잭슨 폴록처럼 결과 중심이 아니라 과정 중시에 있다고 봐도 무방한 것이다. 즉 그림의 완성도보다 그림을 그리는 그 과정의 행위, 그 '행위의 순수성'이 강조된다면 잭슨 폴록의 전면회화와 같은 사상의 그림이라 할 수 있다는 것이다. 임택준은 그림을 그리는 그 날, 그 순간의 감정과 주변 상황에 따라 자유롭게 색깔을 선택하고 형태를 그려나간 것이다.

그림 안에서 무엇을 그린다는 목적 없이 자유롭게 그린다는 것은 그 '행위' 자체에 의미부여를 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것은 행위미술작품에서 의미 두고 있는 '현존' 개념이다. 즉 '지금, 여기' 내가 존재하는 자각 속에서의 존재를 말한다.

폭록은 "존재의 한 상태"라는 말로 표현했다. 이것처럼 '행위'가 강조된 전면회화는 존재의 중앙에 서서 진정 살아있음을 만끽하는 것이다. 그린다는 행위 자체의 즐거움을 이 작품 속에서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 <black></black> 우측 화면에 산불현장에서 펼친 행위미술 작품의 영상이 나오고 있다.
ⓒ 복합문화예술공간 MERGE?
 
산불현장, 그 검은 땅에서 알몸 행위미술

 이번 전시에서는 2022년 강원도 대형 산불이 일어났던 현장에서 이뤄진 행위작업 <Black>을 영상으로 만날 수 있다. 산불로 인해 모든 것이 검게 변해버린 산에서 작가는 타다남은 나무 기둥을 옮겨서 커다란 원 형태로 만든다.

검은 나무 기둥들 몇 개가 모여 어설픈 원이 만들어졌다. 그리고 그 나무 기둥 옆에 알몸으로 비스듬히 누웠다. 검은 풍경속에서 밝은 색의 인체의 대비는 장중한 서사극인 듯, 모노톤의 현대미술인 듯, 처연한 감정을 불러일으킨다. 인체는 그대로 멈춰있고, 카메라는 인체가 아주 작아 보일 때까지 하늘 위로 올라간다.

원은 시작과 끝이 없으므로 끝없는 순환을 말한다. 다시 말해 생성과 소멸의 무한 반복, 영원성을 의미한다. 또 원은 모든 생명체가 가지고 있는 관계의 연결을 의미하기도 한다. '원만한' 관계, 순리대로의 관계를 말한다. 그리고 원은 움직임, 변화를 의미하며 에너지가 분출되는 진원지이기도 하다.

이 장소 특정적 행위는 예술가가 할 수 있는 아주 적절하고 훌륭한 작업이었다. 누가 돈이나 떡 하나 주지 않는 산불현장에 올라가 이런 짓을 하겠는가? 그의 행위는 아무것도 살아남지 못해 모두 타버린 산불현장에서 알몸으로 사라진 뭇 생명을 안아주며 생명의 입김을 불어넣어 주고 온 것이다.

원이라는 형태와 알몸(생명)은 공존과 새싹이 움트는 희망의 기호들인 것이다. 그리하여 그리 머지 않은 시간에 그의 입김의 힘으로 생명들이 돋아나 그 검은 풍경들은 다시 초록의 옷을 입게 될 것이다.
 
▲ 행위미술 <gap> 실연 중</gap> 여러 갈래의 경계선을 만들고 그 가운데에서 투명 투구에 드로잉을 하고 있다.
ⓒ 이혁발
 
희망을 위해 보이지 않는 경계선을 보게 하다

전시회 개막일에는 전시회 주제와 같은 'GAP'이란 행위미술이 이뤄졌다. 검은 끈으로 전시장을 가로지르는 경계선을 만들고서 그 경계선의 안과 바깥을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여기와 이곳", "이쪽과 여기", "너와 나" 등의 말을 하였다.

경계 지어진 숱한 현실(공간적 상태와 심리적 상황)을 시각적으로 보여주는 것이다. 그리고 선을 여러 군데 더 연결하여 많은 경계선이 복잡하게 교차하게 되었다. 물질이나 사람 간의 관계에서의 틈과 사이를 검은 선으로 시각화하였다.

그리고 투명한 구(원통형)를 머리에 쓰고, 거기에 실타래 같은 드로잉을 한다. 이어 그 구를 손바닥으로 치고, 두드리고 급기야 여기저기 벽에 그 투명투구(머리)를 부딪친다. 그리고 바닥에도 텅텅텅 머리를 부딪친다.

틈이나 사이, 그 보이지 않는 숱한 경계선에 사는 우리들의 모습이 시각화된 것이다. 사람과의 관계의 틈은 아주 좁더라도 그 틈을 결국 못 메우고 결별하고 이혼한다. 관계 맺기만큼 어려운 것이 없다. 투명투구에 그려지는 실타래 같은 드로잉은 어려운 상황에 부닥친 머릿속을 표현한 것이다.

그렇지만 우리들은 부딪쳐야 하고, 머리가 깨질 듯이 반성하고, 성찰하여 새로운 국면으로 가야 한다. 작가는 힘들어하는 상황을 보여주면서 동시에 그 경계들이 없어지고 어울렁더울렁 잘 살아가는 희망적 미래를 그려보자고 제안하는 것이다.
 
 <GAP>, 116.8cm×80cm, 혼합재료, 2023
ⓒ 임택준
 
충분히 익은 색감들의 조화로우며 격정적인 회화작품들

임택준의 회화는 격정적이다. 틈, 사이, 경계에서 힘들어하는 인체가 경직된 자세로 서 있는 회화 작품은 소외되고 힘들어하는 인상을 주지만 작가가 말하듯이 좌절이 아니라 희망을 말한다. 틈 사이로 비치는 햇살 같은 것을 말한다.

<사랑나무> 같은 작품은 대작가의 경지를 보여준다. 많은 생각을 던지게 하는 색감들은 40년이 넘는 작업과정의 숙성된 고도의 수준을 보여준다. 그 색감 위에 에너지 넘치는 격정적인 붓 터치는 한없는 위로와 기쁨을 준다.
 
 전시 광경. 좌측의 첫 작품이 <사랑나무>다
ⓒ 이혁발
27번째 임택준 개인전에 가면 화려한 색감들과 기하학 도형들의 조화롭고 격정적인 회화작품을 만날 수 있다. 덤으로 산불현장에서의 행위작업 영상도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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