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뷰] 광화문의 두 ‘카르멘’, 시대정신과 거리가 있다
교제 살인 담은 원작의 비윤리성에 대한 고민 부족 아쉬워
오페라는 여주인공의 상당수가 남자 때문에 폭력적인 죽음에 이르기 때문에 예술 장르 가운데 가장 ‘여성 혐오’적이란 말을 듣는다. 물론 18~19세기 남성 작가 및 작곡가가 쓴 작품을 현대에 와서 일방적으로 단죄할 수는 없다. 하지만 남녀평등이 상식이 된 현대에 오페라의 상당수가 오늘날의 감성이나 가치관과 어긋나는 것은 분명하다. 그래서 1970년대 이후 유럽을 중심으로 원작을 파격적으로 재해석하는 ‘레지테아터(Regietheater)’ 연출이 퍼지면서 오페라의 남성 중심적 스토리나 캐릭터를 바꾸는 사례가 많아졌다. 레지테아터는 원래 1930년대 독일 연극 연출가 막스 라인하르트가 창안한 것으로 오페라계는 뒤늦게 받아들였다.
비제의 ‘카르멘’은 현대에 올수록 관객의 거부감을 사는 오페라로 꼽힌다. 남자 주인공 돈 호세가 질투에 사로잡혀 여주인공 카르멘을 죽이는 결말이 ‘교제 살인’에 해당하기 때문이다. 돈 호세가 카르멘을 죽인 뒤 울부짖는 장면이 오랫동안 안타깝고 슬픈 사랑으로 받아들여졌지만 여성 관객에게는 위화감을 넘어 불쾌함을 준다. 요즘 이곳저곳에서 공격받는 페미니즘을 거론하지 않더라도 말이다.
특히 지난 2017년 ‘미투 운동’ 등장 이후 서구에서는 ‘카르멘’을 원작대로 무대에 올리는 것을 피하고 있다. 예를 들어 2018년 이탈리아 피렌체 마지오 극장은 카르멘이 자신을 죽이려는 돈 호세와 몸싸움 끝에 정당방위로 죽이는 결말을 채택했다. 그리고 같은 해 영국 로열 오페라는 돈 호세에게 살해된 카르멘이 무대막이 내리기 직전 일어나서 객석을 향해 어깨를 으쓱한 뒤 퇴장했다. 여성 살해로 끝나는 오페라를 풍자한 것이다. 또 올해 스코틀랜드 오페라는 돈 호세가 경찰서에서 수사받는 장면으로 시작하는데, 돈 호세가 카르멘을 죽인 채 끝나는 엔딩 대신 범죄에 대한 처벌을 강조했다.
결말 변경 외에도 남성의 이국적 환상에서 나온 카르멘 캐릭터를 바꾸는 프로덕션도 늘어나고 있다. 성적 매력을 풀풀 풍기며 남자들을 유혹하던 과거와 달리 자기 결정권을 가진 주체적인 캐릭터로 바꾸고 있지만 그마저도 온전하지 못하다는 비판이 있다. 실례로 집시들이 많이 거주했던 스페인 안달루시아 출신 여성 예술가들이 카르멘의 성적 자유를 비현실적이라고 비판해 왔다. 집시 사회는 매우 가부장적이서 카르멘 같은 캐릭터는 찾아보기 어렵다는 것이다. 지난해 롱보로 페스티벌 오페라가 카르멘과 집시들을 살기 위해 애쓰는 현대의 소시민 공장 노동자로 설정한 것이 여기에 해당한다. 이 작품에서는 카르멘에 집착하는 돈 호세를 영화 ‘사이코’에서 어머니에게 집착하는 노먼 베이츠처럼 그리고 있다.
지난 8일 광화문에서 약속이나 한 듯 두 편의 ‘카르멘’이 무대에 올라갔다. 서울시오페라단의 ‘카르멘’은 9일까지 광화문 광장 야외 특설무대에서 진행됐고, 서울시극단의 ‘카르멘’은 10월 1일까지 M씨어터에서 공연된다.
서울시오페라단의 ‘카르멘’은 3시간이 조금 안되게 걸리는 전막 공연을 주요 아리아와 중창들을 연결해 70분으로 압축했다. 음악은 사전에 녹음된 음원을 이용했는데, 성악가나 합창단이 무대 아래 음악코치의 사인을 받는 방식으로 이뤄졌다. 광화문 광장이 자동차가 시끄럽게 오가는 등 오페라를 선보이기에 좋은 환경이 아닌 데다 무료로 진행되는 만큼 가볍게 만든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눈길을 끈 것은 전문 오페라합창단 20명과 함께 한 시민합창단 71명이다. 자원해서 선발된 이들 시민합창단은 최선을 다해 프랑스어 합창을 선보였다.
서울시오페라단의 ‘카르멘’은 광화문 광장을 활성화하고 서울 시민에게 즐길거리를 제공하는 ‘세종썸머페스티벌’의 일환인 만큼 초심자 관객을 주요 관객층으로 삼았다. 그래서 산만한 야외에서 관객을 무대에 집중시킬 수 있도록 폴댄스와 불쇼를 넣기도 했다. 하지만 오페라와 맥락이 닿지 않아서 다소 생뚱맞게 느껴졌다.
이날 공연에서 가장 아쉬웠던 부분은 ‘카르멘’을 연출적 해석 없이 원작대로 표현한 캐릭터와 결말이다. 하루가 멀다하고 언론에 나오는 데이트 폭력을 생각할 때 ‘카르멘’을 사랑 이야기라고 할 수 있을까? 원작대로 했다는 설명은 비윤리적 재현에 대한 변명이 될 수 있을까? 아무리 초심자를 대상으로 가볍게 만드는 프로덕션이라고 하더라도 작품의 비윤리성에 대한 고민을 반영하면 좋지 않았을까? 연출적으로 무엇인가를 추가하기 어려웠다면 박혜진 단장이 인사말을 전할 때 차라리 작품에 대한 설명을 넣는 형태라도 취했으면 좋았을 듯하다.
서울시오페라단의 ‘카르멘’에 비해 서울시극단의 ‘카르멘’은 원작의 비윤리성을 고심한 흔적이 보였다. 고선웅 서울시극단장이 연출한 이 작품은 원작 소설과 카르멘을 섞었다. 즉, 오페라에만 나오는 호세 약혼녀 미카엘라를 등장시킨 것이나 소설에서 비중이 컸지만 오페라에서는 빠졌던 카르멘의 남편 가르시아를 등장시켰다.
고선웅은 이번에 카르멘을 남성편력이 심한 ‘바람둥이 여자’ 대신 자유의지를 가진 주체적 인간으로 그렸다. 그리고 카르멘을 사랑한다는 이유만으로 소유하려는 돈 호세의 집착과 광기를 보여줬다. 앞서 수많은 ‘카르멘’에서 돈 호세를 팜므파탈에게 놀아난 불쌍한 남자로 그리던 것과 달리 찌질한 스토커로 바라본 것이다.
고선웅은 이번에 ‘카르멘’을 선택한 가장 중요한 이유로 “카르멘이 명예를 회복하길 바랐다”고 말했다. 하지만 미카엘라가 돈 호세에게 집착하다가 자살하는 결말을 보여줌으로써 카르멘의 명예를 회복하기보다는 돈 호세의 범죄를 희석시키고 말았다. 오페라 ‘카르멘’에서 카르멘의 문란함을 강조하기 위한 캐릭터로 만들어진 미카엘라는 이번 고선웅의 ‘카르멘’에선 돈 호세의 범죄를 희석시키기 위해 활용된다는 점에서 가장 불쌍하다. 돈 호세의 범죄만 강조하거나 단죄하는 편이 더 설득력 있지 않았을까?
앞서 고선웅은 국립창극단의 ‘옹녀’ 등에서 진보적이고 여성주의적인 시각을 보여줬다. 페미니즘의 영향을 받은 것인지 아니면 의식한 것인지 최근 서울시극단 부임 이후 첫 작품으로도 미국에서 페미니즘 연극의 새로운 지평을 열었다는 평가를 받는 미샤 노먼의 ‘겟팅 아웃’을 올린 바 있다. 그래서 지독히 여성혐오적인 ‘카르멘’을 올린다고 했을 때 기대가 컸지만 아쉬움을 남기고 말았다.
장지영 선임기자 jyjang@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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