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이군인을 위한 ‘존중의 장’으로…2023 인빅터스 게임 개막
#2023년 '인빅터스 게임'에 참가한 한국 선수단의 기수는 이은주(여·45) 씨다. 그는 군 복무 중 세 번의 사고를 겪었다. 사단 체육대회에서 처음 다친 뒤 작전 중 교통사고도 당했다. 기어이 회복해 군 생활을 이어가다 훈련 중 무너지는 군수품을 피하는 과정에서 다시 부상을 입었다. 학창시절 단거리 육상선수로 전국체전까지 참가했던 몸이었지만 망가진 척추로 군 생활은 더 이상 무리였다.
2008년 대위로 전역한 이 씨는 2015년 상이군경회 부산지부에서 근무를 시작했다. 상이군인에 대한 사회적 예우를 끌어올리기 위해 고민이 깊어질 무렵 국제 상이군인 체육대회 '인빅터스(invictus) 게임' 참가 제의가 들어왔다. 다른 나라 상이군인들은 어떤 대우를 받고, 어떤 생각을 갖고 있는지 궁금해 참가를 결정했다.
이 씨는 “대회 개막 전 환영행사에서 외국 상이군인들을 만나보니 모두들 국가를 위한 희생과 헌신에 자긍심이 대단했다”며 “한국에 돌아가 이런 자긍심을 사회 전체와 공유하고 싶다”고 말했다.
2023년 인빅터스 게임이 9일 오후(현지시간) 독일 뒤셀도르프 메르쿠어 스필 아레나에서 개막했다. 이 대회는 전세계 상이군인의 화합, 재활 촉진, 예우 분위기 조성을 목표로 2014년 처음 열린 후 올해로 여섯 번째를 맞는다. ‘존중의 장(A Home for Respect)’을 표어로 내건 이번 인빅터스 게임에는 21개국 500여 명 선수가 양궁, 역도, 로드사이클, 실내 조정, 육상 등 10개 종목을 놓고 오는 16일까지 시합을 벌인다.
한국은 올해 두 번째 참가다. 미국, 영국, 독일, 네덜란드, 캐나다, 호주, 뉴질랜드 등 나토 회원국과 영연방 국가 중심으로 치러지던 인빅터스 게임에 한국은 지난해 네덜란드 대회 때 처음 참가했다.
이 씨를 기수로 한 한국 선수단은 이날 개회식에서 17번째로 입장했다. 등장음악으로 BTS의 버터가 흘러나오자 다른 나라 선수단과 2만여 명 관객들은 열띤 환호로 답했다. 11명의 소규모 선수단이었지만 미국·영국 등 100명이 넘는 대규모 선수단이 입장할 때 못지않은 함성이 터져 나왔다. 한태호 선수단장은 “등장음악 선정에 공을 들였다”며 “널리 알려진 케이팝(K-POP)이 다른 나라 선수들에게 익숙함으로 다가온 듯하다”고 말했다.
한국에 이어 우크라이나가 입장하자 경기장 내 분위기는 절정에 달했다. 관객들은 러시아와 전쟁을 벌이는 상황에서도 대회 참가를 결정한 우크라이나 선수들을 기립박수로 맞이했다. 어떤 선수는 열렬한 환영에 감정이 북받쳤는지 눈시울을 붉히기도 했다. 전날(9일) 선수단 환영행사에서 우크라이나 선수들과 대화를 나눴다는 이 씨는 “전쟁의 현실을 받아들이되 이 순간을 즐긴 뒤 다시 전장으로 돌아가겠다는 얘기를 들었다”며 “조국을 향한 무한한 애정이 느껴졌다”고 말했다.
선수단 입장 후 영국의 해리 왕자가 무대에 섰다. 그는 아프가니스탄 전쟁 참전 경험을 살려 상이군인에 대한 지원책을 구상하다가 인빅터스 게임을 창설했다. 상이군인을 위해 ‘공동체’, ‘연대’, ‘응원’의 순간을 쌓고, 여기서 나오는 긍정적인 에너지로 사회를 변화시키자는 취지다.
해리 왕자는 이날 인빅터스 게임을 다룬 넷플릭스 다큐멘터리 시리즈를 언급했다. 그는 최근 공개된 이 다큐멘터리에서 한국의 나형윤 선수가 “장애를 극복하기보다 우리의 장애를 향한 사회의 인식을 극복해야 한다”고 말한 점을 거론하며 “인빅터스 게임은 메달, 기록, 완주에 대한 것뿐 아니라 자신에게 가해진 인식을 극복하는 것과 관련이 있다”고 강조했다.
이어 우크라이나 선수단 사이에서 ‘타이라’라는 선수를 호명했다. 본명 율리야 파예우스카라는 이 퇴역 여군은 지난해 3월 이 다큐멘터리를 찍던 중 전쟁에 참전했다가 러시아 군에 포로로 잡혔다. 타이라는 출전이 예정돼있던 네덜란드 대회에 참가하지 못했지만 대회 기간 동료들은 전세계 언론을 대상으로 석방 운동을 벌였다. 지난해 6월 풀려나 올해 대회에 참가한 타이라를 향해 해리 왕자는 “이처럼 용기 있고 회복력이 뛰어난 사람을 본 적이 없다”며 “그런 에너지를 직접 보고 느낄 수 있어 다행”이라고 말했다.
이번 대회에는 박민식 보훈부 장관도 참석해 선수단을 격려했다. 박 장관은 “‘인빅터스(invictus)’가 라틴어로 ‘불굴의’, ‘불패의’라는 의미를 지닌다고 한다”며 “나라를 위해 헌신한 분들 예우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스스로가 굴복하지 않고 다시 일어설 수 있도록 응원하는 것도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한국 선수단은 이번 대회에서 권현주(양궁·탁구), 김종준(사이클·실내조정), 최승민(사이클·실내조정), 이지익(사이클·수영·육상), 홍미향(사이클·실내조정), 정은창(탁구·양궁), 최일상(탁구·실내조정), 신법기(탁구·휠체어 럭비), 김인희(실내조정·양궁·탁구), 이주은(실내조정·역도), 이은주(육상·실내조정·탁구) 선수 등 11명이 8개 종목에 출전한다. 한 단장은 “책임감을 갖고 경기에 임하겠다”며 “인빅터스 정신에 부합되도록 최선을 다할 것”이라고 말했다.
이근평 기자 lee.keunpyung@joongang.co.kr 독일 뒤셀도르프=공동취재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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