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한의 1인 지배체제는 왜 굳건할까

정일영 2023. 9. 10. 12: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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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석] 대북제제 효과 없어... 지도자가 스스로 변하도록 유인해야

[정일영 기자]

우리는 북한을 있는 그대로 이해하고 있는가? 가장 가까운 곳, 같은 언어를 사용하며 한민족임을 끊임없이 강조하고 통일을 기약하는 대상 북한, 아니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을 우리는 얼마나 제대로 이해하고 있는가? 우리 사회에서 회자되고 있는 북한에 대한 해석은 언뜻 서로 다른 나라를 설명하는 듯한 착각마저 일으킨다. 어쩌면 우리는 그들을 흐릿한 유리창 너머의 대상으로 남겨두고 각자의 시각에 따라 해석하고 있는 것 아닐까?

필자가 이 글에서 던지는 질문은 우리가 늘 궁금해하던 원초적인 질문과 맞닿아 있다. 북한은, 김일성은 어떻게 정치적 경쟁자도, 경쟁 세력도 없는 1인지배체제를 구축할 수 있었을까? 한국전쟁 이후 끊임없이 지속되는 국가의 위기상황 속에서 북한 사회가 유지되고, 통제되고 있는 이유는 무엇인가?

한국전쟁이 북한의 1인지배체제를 가능하게 했다?

1990년대 중반 '고난의 행군'으로 명명된 경제위기는 식량난에 따른 대량 아사와 탈북으로 이어졌고 엄청난 사회 혼란을 야기했다. 그러나 당시 북한에서는 어떠한 소요 사태나 집단적 저항도 확인된 바 없다. 배급 제도가 붕괴되면서 적게는 40만에서 많게는 300만으로 추정되는 아사자가 발생했는데도 북한 주민이 저항하지 않은 이유는 무엇인가? 필자는 이와 같은 질문에 답하기 위해 북한의 역사적 특수성, 즉 해방 이후 한국전쟁을 통해 성립된 김일성 1인지배체제를 이해해야 한다고 제안한다.

일반적으로 전쟁이라는 특수한 상황은 정치 권력, 특히 군통수권자의 권한을 강화시킨다. 전쟁은 적과의 물리적 충돌이라는 전시의 특수성으로 인해 구성원의 자유를 제한하고 국가의 억압적 사회 통제를 가능하게 한다. 다만 전쟁의 일반적 성격이 북한에서 억압적 1인지배체제의 형성과 직접적인 상관관계를 형성한다고 단정하기는 어렵다. 다만 전쟁의 발발과 전개 그리고 종결의 형태로부터 전후 정치체제가 다양한 형태로 강화될 수 있다.

필자는 전쟁이 갖는 일반적 특성이 북한의 1인지배체제를 주조했다고 해석하는 것을 넘어, '한국전쟁'이란 역사적 사건이 다른 여타의 국가에서 나타나는 정치체제와 다른 북한의 독특한 1인지배체제를 구축했다고 주장한다. 한국전쟁은 해방 이후 역사적 사건들이 응축된 결과로서 전쟁의 시작과 종결의 형태 그리고 사건들의 시간적 배열이 상호작용한 결과로 북한에서 1인지배체제를 가능케 했다.

김일성 1인지배체제를 가능케 한 한국전쟁의 세 가지 특징

한국전쟁은 크게 세 가지 특징으로 북한에서 1인지배체제, 즉 판옵티콘(panopticon)과 같은 1인지배체제를 가능케 했다.

첫 번째로, 김일성은 한국전쟁을 통해 정치적 경쟁자와 경쟁 세력을 제거했다. 김일성은 한국전쟁 발발과 함께 조선인민군 최고사령관으로 전시체제의 특수성을 활용해 정적들을 숙청해 나갔다. 소련파의 당 조직비서 허가이와 연안파의 무정을 제거했으며 남조선로동당의 거두로 김일성과 경쟁하던 박헌영을 미제국주의의 간첩 혐의로 체포해 사형에 처했다.

(소련파는 소련의 한반도 진주와 함께 입국한 고려인 소련공산당원으로 조선로동당의 조직사업을 담당했으며, 연안파는 중국 공산당과 함께 중국 연안 지역에서 항일무장투쟁을 펼친 세력이다.)

전후 남아 있던 소련파와 연안파의 잔여 세력은 1956년 8월 전원회의를 통해 김일성에 대한 반란을 시도했지만 실패하고 만다. 소위 8월 종파사건이 실패로 돌아가면서 연안파의 지도자들은 중국으로 망명했고, 소련파는 소련으로 돌아갔다. 또한 8월 종파사건 이후 진행된 사회조사사업은 박헌영을 따르던 남로당 출신들을 숙청하는 기회로 활용됐다. 결국 8월 종파사건을 승리로 장식한 김일성은 더 이상의 정치적 경쟁자도 경쟁 세력도 존재하지 않는 1인체제를 구축하게 된다.

두 번째로, 한국전쟁 초기 피점령 상황은 북한 당국이 주민의 전시행태를 준거로 사회계층을 재구성하고 억압적 사회통제체제를 구축하는 결과를 가져왔다. 전쟁의 발발과 함께 낙동강 전선까지 후퇴한 UN연합군은 1950년 9월 중순 인천상륙작전의 성공과 함께 압록강까지 전선을 북상시켰다. 이때부터 1951년 1월 조중연합군이 서울을 재점령할 때까지 약 3개월간 북한지역은 연합군의 피점령하에 놓이게 된다. 북한은 피점령지를 회복한 후 피점령하에서 적들에게 협조하거나 동조한 주민들을 처벌하고 군중심판회를 통해 이들을 이적행위자로 낙인찍었다.

북한 당국은 전쟁이 정전협정으로 일단락된 후 중앙당 집중 지도와 전국적인 사회조사사업을 통해 주민들을 핵심, 기본, 적대 계층으로 사회적 성분(신분)을 재분류하였다. 핵심 계층은 인민군대와 조선로동당원 그리고 전사자 가족 등으로 김일성에게 충성을 다하는 무의식적 충성집단이 되었으며, 월남자 가족 등 적대 계층은 강제 이주시키거나 조선노동당원 자격과 진급에 제한을 둠으로써 사회활동을 억압했다.

이와 함께 한국전쟁이 '종전'이 아닌 '정전'의 형태로 '지속'되면서 전시에 준한 억압적 사회통제체제가 지속됐다. 앞서 전후 정치적 경쟁자와 경쟁 세력을 제거한 김일성을 정점으로 수령-조선로동당-인민의 억압적 1인지배체제가 구축된 것이다.

세 번째로, 북한은 한국전쟁이 미제국주의의 침략으로 시작됐다고 주장한다. 북한은 지금까지도 역사 왜곡을 통해 한국전쟁이 미제의 침략으로부터 조국을 지켜낸 전쟁이라 교육하고 있다. 한국전쟁은 이론의 여지 없이 북한의 침략으로 시작됐다. 사실대로라면 김일성은 실패한 전쟁의 책임을 져야 했지만, 전쟁이 피침으로 왜곡되면서, 김일성은 세계 유일 초강대국, 미제국주의의 침략으로부터 조국을 지킨 '영웅'으로 둔갑했다.

미제국주의로부터 조국을 지켜낸 '영웅'이란 신화는 한국전쟁의 피해를 공유하는 약 500만 명의 무의식적 충성계층이 김일성의 강력한 지지 세력으로 자리 잡는 결과를 가져왔다. 그렇게 김일성은 북한이라는 사회정치적 생명체의 뇌수, 수령으로서 신격화될 수 있었던 것이다.
  
 북한이 8일 수중에서 핵 공격이 가능한 전술핵공격잠수함을 건조했다고 밝혔다. 조선중앙통신은 이날 '주체적 해군 무력강화의 새시대, 전환기의 도래를 알리는 일대 사변'이라는 제목의 기사에서 "우리 당의 혁명 위업에 무한히 충직한 영웅적인 군수노동계급과 과학자, 기술자들은 우리 식의 전술핵공격잠수함을 건조해 창건 75돌을 맞는 어머니 조국에 선물로 드렸다"고 보도했다. 지난 6일 열린 진수식에는 김정은 국무위원장과 함께 리병철·박정천 원수, 김덕훈 내각총리 등 참석했다. 2023.9.8
ⓒ 평양 조선중앙통신=연합뉴스
 
북한의 1인지배체제, 대북제재만으로 변화시킬 수 없다

북한에서 구축된, 아마도 근대 국가에서 그 유례를 찾기 힘든 강력한 1인지배체제는 제레미 벤담(Jeremy Bentham)이 제시한 판옵티콘(panopticon)과 같은 통제체제를 연상시킨다. 판옵티콘은 일방향의 수직적인 통제(시선)와 구성원 간 소통을 차단한 촘촘한 격자들로 이루어진 수평적인 단절로 구축된 감시체제를 말한다. 북한은 한국전쟁을 거치며 판옵티콘의 구조적 메커니즘이 반영된 1인지배체제를 건설하였고 그 핵심 요소는 지금까지도 지속되고 있다.

우리는 북한의 변화를 종종 이야기한다. 북한의 핵 개발과 위협은 이전에 없던 강력한 대북 제재를 가져왔다. 여기에 2020년 발발한 코로나19 팬데믹은 더 이상 북한이 버티지 못할 것이란 기대를 낳았다. 그러나 북한은 여전히 굳건하다. 경제위기는 지속되고 있지만, 북한의 1인지배체제는 여전히 공고해 보인다.

앞서 서술한 바와 같이 김일성과 그의 후대 지도자들에게 저항할 수 있는 정적이나 정치세력은 여전히 북한에 존재하지 않는다. 한국전쟁을 통해 형성된 무의식적 충성계층은 평양을 중심으로 우상화된 그들의 지도자에게 충성을 다하고 있다.

필자 또한 2017년 이후 UN안보리와 미국이 주도한 대북제재가 완벽히 이행될 수만 있다면 북한이 견디기 어려울 것이라 생각했다. 그러나 코로나19 팬데믹은 실제로 그러한 대북제재가 거의 완벽하게 이행된 상황을 연출했다.

그러나 북한은 스스로 국경을 봉쇄한 상황에서 3년 반을 버텨내고 있다. 결과적으로 외부로부터의 제재와 고립은 북한 주민들에게 고통을 줄 뿐 1인지배체제를 변화시키지 못했다. 이는 북한의 1인지배체제가 외부의 적, 특히 미제국주의와의 투쟁을 통해 작동하며 위기를 통해 지속돼왔다는 점을 다시 한번 상기시킨다(관련 기사: 잦은 '북한붕괴론', 그럼에도 견고한 북... 시각을 바꿔야 한다, https://omn.kr/212h1).

우리는 북한의 변화를 위해 대화할 준비가 되어 있나

그렇다면 북한의 변화는 어떻게 가능한가? 단기적으로, 북한의 지도자가 스스로 변화의 길을 선택할 수 있도록 유인할 필요가 있다. 우리가 북한의 지도자보다 북한의 주민들을 먼저 생각한다면, 북한 주민의 인권과 자유를 진심으로 바란다면, 우선은 이 공고한 1인지배체제의 변화를 위해 대화할 수 있어야 한다. 북한의 변화는 그 1인(지도자)의 변화와 그로부터 파생되는 지배 엘리트의 분화, 정치적 다양성이 확대되고 이러한 흐름이 북한 주민 스스로의 요구와 만날 때 현실로 다가올 가능성이 크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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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붙이는 글 | 글쓴이 정일영씨는 서강대학교 사회과학연구소 연구교수입니다. 관심분야는 북한 사회통제체제, 남북관계 제도화, 한반도 평화체제 등으로, <한반도 오디세이>, <한반도 스케치北>, <북한 사회통제체제의 기원> 등 집필에 참여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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