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승섭의 금융라이트]냅킨에 휘갈긴 낙서, 감세 열풍을 만들다
자신의 이름 딴 '래퍼 곡선'을 세상에 알리다
로널드 레이건 대통령의 감세정책 설계·주도
"사기꾼의 감언이설"…경제학계의 강한 비판
트럼프도, 윤석열도…현대까지 이어진 감세론
1974년 이름 없는 미국의 한 30대 경제학자가 수도 워싱턴 D.C의 식당에서 밥을 먹고 있었습니다. 같이 밥을 먹던 사람은 당시 백악관의 핵심 실세였던 딕 체니와 도널드 럼즈펠드였습니다. 대화 주제는 미국 대통령이었던 제럴드 포드의 증세 정책이었습니다. 이 경제학자는 세율을 지나치게 높이면 전체 세수가 줄어들기 때문에, 오히려 감세를 해야 더 많은 세금을 걷을 수 있다고 역설했습니다. 식당에 있던 냅킨에 자신의 이론을 담은 그래프까지 그려가면서요.
일화 속 주인공은 바로 아서 베츠 래퍼(Arthur Betz Laffe)입니다. 그가 냅킨에 휘갈긴 곡선에는 ‘래퍼 곡선’이라는 이름이 붙었죠. 이들의 이야기는 월스트리트저널 기자였던 주드 와니스키가 1978년 출간한 책에서 처음 등장합니다. 2005년 와니스키가 사망한 이후 그의 부인이 유물을 정리하다 래퍼 곡선이 그려진 냅킨을 발견하고 이를 기증하죠. 현재는 미국사 박물관에 소장된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이 일화에 대해 래퍼는 “그 레스토랑은 천으로 된 냅킨만 사용한다”며 부인했지만요.
진짜든 거짓이든 래퍼 곡선과 냅킨 이야기는 미국 전역에 널리 퍼졌습니다. 무명의 경제학자 설명까지 흘려듣지 않고 경청하는 애국적인 정치인들의 얘기로 각색되면서요. 이후 1981년 당선된 로널드 레이건은 래퍼를 백악관 경제자문위원회에 임명합니다. 레이건 대통령은 래퍼의 이론을 대폭 받아들이고 대대적인 감세정책을 펼칩니다. 래퍼 곡선이 레이건 정부의 경제정책을 뜻하는 ‘레이거노믹스’의 기초가 된 겁니다.
"세금을 더 걷고 싶다면, 세율을 내려라"
래퍼 곡선은 알파벳 U를 뒤집어 놓은 단순한 모양입니다. 세율에 따라 달라지는 조세수입을 보여주죠. 세율이 0%라면 조세수입은 얼마나 될까요? 아무도 세금을 내지 않기 때문에 당연히 0이 됩니다. 세율이 100%라면요? 돈을 버는 순간 전부 국가에 바쳐야 합니다. 개인도, 기업도 모든 경제활동을 멈추겠죠. 왜 굳이 돈을 벌겠어요? 따라서 세율이 100%일 때도 정부가 걷는 세금은 0원이 됩니다.
그렇다면 세금을 가장 많이 걷으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래퍼 곡선의 핵심은 바로 이 질문에 있습니다. 세율이 0%에서 점차 높아지면 세수가 늘어난다는 건 확실하죠. 세율이 100%에 가까워질수록 다시 세수가 줄어든다는 것도 분명하고요. 따라서 세율이 너무 높은 경우에는 오히려 감세를 해야 조세수입이 더 늘어난다는 게 래퍼의 주장이었습니다.
래퍼는 현실에서도 자신의 이론이 적용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는 1965년 미국의 소득세 최고세율이 91%에서 70%로 낮아진 것에 주목했습니다. 세율을 내리기 전 4년 동안은 소득세 수입이 연평균 2.1%씩 늘었습니다. 반면 세율을 내린 후 4년은 연평균 8.6%씩 세수가 늘어났죠. 그의 곡선처럼 세율을 내렸는데 세수가 늘어난 겁니다.
레이건 대통령 시절 했던 감세정책도 결과적으로 긍정적이었다고 판단했습니다. 레이건 대통령은 개인소득세 최고세율을 70%에서 28%로, 법인세율을 48%에서 34%로 낮췄습니다. 그러자 집권 초 7.6%였던 실업률은 임기 말 5.5%로 낮아졌습니다. 임기 내 실질 국내총생산(GDP) 연평균 성장률은 과거보다 훨씬 높은 3.2%를 기록했고요.
'사기꾼의 감언이설' 비판에도 이어져 온 래퍼 곡선
하지만 래퍼 곡선에 대한 비판도 만만치 않습니다. 래퍼 곡선의 가장 큰 문제는 적정세율이 어딘지 찾기 어렵다는 점입니다. 지금의 세율이 지나치게 높은 상태인지 아닌지 알 방법이 없다는 거죠. 세율을 얼마나 내려야 하는지 파악하기도 어렵고요. 만약 판단을 잘못하게 되면 부작용만 생깁니다. 이미 세율이 낮은 상황에서 세금을 또 내리면 조세수입이 증가하기는커녕 오히려 더 줄어드니까요. 그럼 세수가 줄면서 재정적자가 발생합니다. 레이건 대통령 때도 GDP 대비 26%였던 국가부채가 퇴임 전해 41%까지 폭증했죠.
학계의 비판도 많습니다. ‘맨큐의 경제학’을 작성한 그레고리 맨큐는 래퍼 곡선에 대해 ‘사기꾼의 감언이설’이라고 지적했습니다. 맨큐는 “감세로 인해 투자와 소비, 생산성 향상 등 기대한 효과가 과연 일어나느냐”고 꼬집었죠. 제프 프랭켈스 하버드대 교수도 ‘감세는 가짜 만병통치약’이라는 논문을 내고 “래퍼 이론은 가설에 불과하다”고 말했습니다.
래퍼 곡선을 둘러싼 논쟁에도 불구하고 그의 이론은 지금까지 이어져 오고 있습니다. 래퍼는 도널드 트럼프 전 대통령의 2016년 대선 캠페인 경제고문이었습니다. 이후 각종 세금 제도 인하를 트럼프 대통령에게 직접 제안했죠. 실제로 트럼프 대통령은 개인소득세 최고세율은 39.6%에서 37.0%로, 법인세 최고세율의 경우 35.0%에서 21.0%로 낮췄습니다. 기업이 반드시 내는 최저한세율(20%)도 폐지했고요. 2019년 트럼프 대통령은 래퍼의 공로를 높이 사 미국인 최고의 영예인 ‘자유메달’을 수여했습니다.
현재 윤석열 정부의 세수 정책도 래퍼의 생각과 맞닿아있습니다. 윤 대통령은 지난해 새 정부 경제정책 방향을 발표하면서 ‘민간주도 성장’을 강조하며 법인세와 종합부동산세 인하를 언급했습니다. 해당 정책에 대해 윤 대통령은 “기업이 제대로 뛸 수 있게 해줌으로써 시장 메커니즘이 역동적으로 돌아가게 만드는 게 중산층과 서민에게 큰 도움이 된다”고 말했죠. 이후 법인세 최고세율을 25%에서 22%로 낮추고 과표구간을 현행 4단계에서 3단계로 축소하기로 했으나, 야당의 반대에 구간별 세율을 1%포인트씩 낮춘 바 있습니다.
세종=송승섭 기자 tmdtjq8506@asia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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