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날 살린 복덩이" 뱃속 아이와 수술대…간암 이긴 기적의 산모
“아진이가 아니었으면 아마 말기쯤 암이 발견됐을 테니 아진이가 저를 살린 거죠. 엄마를 살렸으니 다들 ‘복덩이’라고 불러요.”
이하나(28)씨는 출산한 지 한 달도 채 안 된 아들을 두고 연신 고마운 아들, 날 살린 아들이라고 했다. 이씨는 임신 중기(23주차)에 간 종양을 확인했다. 기형아 검사를 하던 중 수치가 안 좋아 추가로 초음파 검사를 했더니 암 덩어리가 보였다. 조직검사를 했더니 간세포암이었다.
암 크기는 6.7㎝와 2.7㎝로 꽤 컸다. 수술 외에는 적절한 치료 방법이 없는 상태였다. 이씨의 간암 종양표지자(AFP)는 6330이었는데, 표지자가 높을수록 공격적인 암으로 알려져 있다고 한다. 이씨의 수술을 맡은 삼성서울병원은 “AFP 400ng/ml 이상일 때 간암일 가능성이 95% 정도 된다”고 설명했다.
임신 때 간암 알아…산모 “매일 눈물 쏟아”
의료진의 고민이 시작됐다. 일단 수술 시기가 문제였다. 암 치료를 위해 아이를 24주(6개월)에 빨리 낳을 경우 아이가 위험할 가능성이 컸다. 병원 측은 “24주 출산 시 100% 가까이 태아는 합병증을 갖게 되고 사망률이 상당히 높다”고 설명했다. 아이를 지키자니 산모의 건강이 우려됐다. 산모에서 간암이 있으면 암 진행 속도가 매우 빠르고, 예후가 좋지 않아서다. ‘엄마냐 아이냐’라는 선택 갈림길에 서게 된 이씨는 “매일 울었다. 2주를 고민해도 선뜻 결정할 수 없는 문제였다”고 떠올렸다.
이씨는 가족 의견을 들어 ‘아이는 다음에 갖고 치료부터 하자’라는 마음을 먹었다고 한다. 그런데 의료진은 뜻밖의 말을 건넸다. “아이를 데리고 수술하겠습니다.”
삼성서울병원의 소화기내과·이식외과·영상의학과·방사선종양학과 등 여러 과 의료진이 머리를 맞댔고 “일단 수술을 해보자”는 결론을 내렸다. 다학제 진료를 통해 유일하게 완치를 노려볼 방법은 수술적 절제이고 아이를 포기하지 말자는 일치된 의견이 나왔다.
결국 이씨는 임신 7개월(25주차) 때 뱃속 아이와 함께 수술대에 올랐다. 수십 년 경력의 의료진에게조차 “도전적인 수술”이었다고 한다. 이씨의 자궁이 커져 있어 복강경이 들어갈 자리가 좁았다. 유진수 이식외과 교수는 “암 크기나 산모 주 수를 봤을 때 어려웠던 수술이었다”고 떠올렸다.
복강경으로 간의 70%를 잘라냈고 그 결과는 기적적이었다. 수술 석 달 후 이씨는 8시간에 이르는 진통 끝에 3.37㎏의 건강한 아들을 자연분만으로 품에 안았다.
이씨는 7일 중앙일보와 통화에서 “아이에게 문제가 없다는 말을 들었을 땐 다행이라는 생각밖에 안 들었다”며 “지난주 검사에서 남은 종양이나 최종 재발이 없다는 판정을 받았다. 아진이를 잘 키워보겠다”라며 웃었다.
송병근 소화기내과 교수는 “임신부라 조영제를 쓰는 MRI(자기공명영상) 검사 등을 할 수 없어 암이 얼마나 퍼져있는지 볼 수 없었기 때문에 처음엔 고민이 컸다”라며 “산모와 태아를 선택해야 하는 과정이 어려웠지만, 의료진들이 함께 모여 우선 수술하자는 의견을 내니 산모와 태아를 모두 살릴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고 말했다.
유진수 교수는 “긴밀한 협조로 엄마가 건강한 아이를 낳는 데 도움이 된 것 같아 정말 기쁘다”고 말했다.
의료진도 이씨도 아진이를 두고 “엄마를 살린 아이”라고 말한다. “임신하지 않았다면 초음파를 받지 않았을 테고, 암이 매우 진행된 상태에서야 발견했을 건데 그랬다면 완치 기회가 없었을 것”이라는 이유에서다. 이씨는 “암 환자가 될 것이라고 생각도 못 했는데 수술에 출산까지 할 수 있었다. 무엇보다 아이를 포기하라고 하지 않은 교수님들께 감사하다”고 말했다.
임신 중 암을 진단받는 건 흔한 일이 아니다. 삼성서울병원 산부인과 최석주 교수 연구팀이 1995~2013년 18년간 임산부 5만412명을 분석했더니 1% 안 되는 87명(0.17%)이 악성종양(침윤성) 암 진단을 받았다. 삼성서울병원 관계자는 “산모가 임신 중 간암 절제술을 받은 뒤 자연분만으로 출산한 사례는 국내 최초일 것”이라고 말했다.
채혜선 기자 chae.hyeseon@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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