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잔보다 막잔이 맛있는 와인, 왜 그럴까?
<와인에 몹시진심입니다만,>의 저자 임승수 작가가 와인과 음식의 페어링에 대한 생생한 체험담을 들려드립니다. 와인을 더욱 맛있게 마시려는 집요한 탐구와 모색의 현장으로 여러분을 초대합니다. <기자말>
[임승수 기자]
와인을 마시다 보면 특히 아쉬운 순간이 있다. 바로 이 말이 튀어나올 때다.
"어휴, 막잔이 제일 좋았어…."
마지막 잔이 제일 좋았다는 건 무슨 의미일까? 마시는 동안 와인 맛이 변한다는 얘기다. 게다가 더 맛있어지는 방향으로 말이다. 우리가 섭취하는 음식은 대체로 조리해서 바로 먹을 때가 맛있다. 소고기도 갓 불판에 구워냈을 때가 제일이고, 칼국수도 불어 터지기 전에 빨리 먹는 게 이득이다.
하지만 와인의 경우는 마개를 열고 잔에 따라낸 후 삼십 분 혹은 한두 시간, 심지어는 다섯 시간 이상 지났을 때 맛과 향이 더욱 부드럽고 풍부해진다. 특히 타닌이 강하고 풀바디에 어린 레드 와인일수록 그러한 경향이 강하다.
브리딩 효과
왜 이런 일이 벌어질까? 와인이 공기 중의 산소와 접촉하면서 시나브로 성분 변화가 일어나기 때문인데, 노회한 애호가들은 이런 긍정적인 변화를 의식적으로 끌어내기 위해 '브리딩Breathing'을 한다. 문자 그대로 와인이 숨을 쉬게 해준다는 얘기다.
뭔가 특별한 기술을 부리는 건 아니고 마시기 한참 전에 와인을 개봉해 공기와 접촉하는 시간을 충분히 가질 뿐이다. 훨씬 더 맛있어지는 순간까지 인내심을 갖고 기다렸다가 마시면 된다. 물론 인내심이 과도해서 주야장천 방치한다면 과도하게 산화가 진행되어 바로 마시는 것만 못한 상황을 초래하기도 한다. 그러니 브리딩에서도 과유불급이기 마련이다.
어쨌든 풀바디 레드 와인을 개봉하자마자 벌컥벌컥 마셔댄다면 그 와인이 보여줄 수 있는 최고의 순간은 전혀 경험하지 못하는 셈이다. 와인은 소주와 맥주에 비해서 가격이 높은 술이니 참으로 돈 아까운 일이 아닐 수 없다.
기왕 돈 주고 샀으면 어떻게 해서든 뽕을 뽑아야 할 것 아니겠나. 게다가 고급 와인일수록 브리딩 전과 후의 차이가 극명하기 때문에, 더욱 신경 써서 브리딩 할 필요가 있다. 안 그러면 왜 이 정도밖에 안 되느냐고 한탄하다가 돈만 날리게 된다.
'그래, 이제부터는 좀 일찍 열어놔야겠다'라고 다짐하건만 음주의 순간이란 대체로 급작스럽고 충동적으로 다가오기 마련이다. 그러니 아무래도 몇 시간 전부터 미리 열어놓고 찬찬히 기다릴 정신적 시간적 여유를 가지기는 어렵다.
게다가 나와 아내는 타닌이 강한 레드 와인을 마시면 종종 가벼운 두통이나 숙취를 겪는데, 그렇다 보니 둘이 한 병을 비우는 게 다소 부담스럽다. 그렇다고 와인을 절반 정도 병에 남겨 하루 이틀 뒤에 마시면 유입된 대량의 산소가 와인과 긴 시간 반응해 맛과 향에서 앞서 언급한 과유불급의 사태가 벌어진다.
다행스럽게도 와인 애호가를 괴롭히는 이 두 가지 문제를 한꺼번에 해결할 수 있는 기가 막힌 방법이 있다. 바로 250mL 용량의 스윙보틀을 사용하는 것이다. 어떻게 가능하냐고? 내가 8월 28일부터 시작해 나흘에 걸쳐 시도한 간단한 실험을 통해 그 유용함을 알려주겠다. 실험에 동원된 두 와인은 다음과 같다.
B: 언쉐클드 카베르네 소비뇽 2021
▲ 브리딩 실험에 사용된 두 와인 왼쪽이 샤토 브란 캉트냑 2009이고 오른쪽이 언쉐클드 카베르네 소비뇽 2021이다. |
ⓒ 임승수 |
두 와인은 모두 카베르네 소비뇽 포도 품종을 기본으로 하고 몇 가지 다른 품종을 섞은 와인인데, 대조군으로서 삼기에 적절한 특징을 지니고 있다. A는 프랑스 와인이며 2009년 수확한 포도로 양조해 십수 년 동안 숙성이 진행된 고급 와인이고, B는 미국 와인이며 2021년 수확한 포도로 만든 상대적으로 저렴한 와인이다.
와인 한 병은 750mL이니 스윙보틀 세 개에 옮겨 담을 수 있는데, 일단 A와 B 와인을 각각 250mL 스윙보틀 두 개에 나눠 담았다. 그러면 와인 병에는 대략 250mL씩 남아 있을 것이다.
▲ 냉장고 안의 250mL 스윙보틀 왼쪽 두 병이 샤토 브란 캉트냑 2009이고 오른쪽 두 병이 언쉐클드 카베르네 소비뇽 2021이다. |
ⓒ 임승수 |
매일 매일 달라지는 맛
첫날인 8월 28일에는 병에 남아 있는 250mL 분량의 와인을 아내와 마시며 의견을 나누었다. 일단 아내에게 블라인드로 어느 쪽이 미국이고 어느 쪽이 프랑스인지를 맞춰보라고 했는데, 향기만 맡고서는 바로 가려낸다.
미국 와인에서 종종 경험하게 되는 그 달달한 캐러멜 향을 감지한 것이다. 둘 다 맛을 보더니 아내는 저렴한 미국 와인이 더 입맛에 맞는단다. 둘 중에 프랑스 와인이 상대적으로 신맛이 강한데 그게 자신의 취향에는 다소 부담스럽다는 것이다.
나는 프랑스 와인 쪽이 훨씬 마음에 들었다. 내가 좋아하는 동물적 뉘앙스와 숙성 와인 특유의 낙엽향이 뿜어져 나오는데, 그 향기에 홀려 잔에 코를 처박고서는 킁킁거릴 수밖에 없었다. 역시 가격보다 중요한 것은 마시는 사람의 취향이다.
평안감사도 자기가 싫으면 그만 아닌가. 간만에 안주도 힘을 줘 한우를 구웠다. 역시 레드 와인과 소고기구이의 궁합은 명불허전이어서, 한 달이나 흡혈하지 못한 드라큘라(소고기)에게 피(와인)가 주입되는 듯한 생명력이 느껴진다.
하루가 지나 8월 29일이다. 냉장고에서 A 와인과 B 와인 스윙보틀을 각각 하나씩 꺼냈다. 레드 와인이 너무 차가우면 맛을 제대로 음미할 수 없으니 잔에 따른 후 적당한 시음온도가 될 때까지 기다렸다. 아내는 어제와 달리 향기로는 헷갈리더니 마셔보고서야 정확히 가려낸다. 브리딩으로 인해 와인 향이 변했기 때문이다.
프랑스 와인의 경우 어제보다 확연하게 밸런스가 좋아져 한층 차분하고 정돈된 맛이 느껴진다. 정말 오래간만에 고급 프랑스 와인을 마시니 그 복합적인 맛의 여운이 입안에서 상당히 오래 지속된다. 대조군인 미국 와인의 경우 피니쉬가 짧은 편은 아니지만 상대적으로 잔당감과 타닌 위주의 단조로운 느낌이다.
하지만 몇 배 비싼 프랑스 와인과 비교당해서 그런 것이지 미국 와인도 그 자체로 꽤 만족스럽다. 아내는 오늘도 여전히 미국 와인을 더 선호한다. 샤토 브란 캉트냑이 좋은 와인인 것은 충분히 알겠지만 역시 신맛이 부담스럽단다.
추가로 이틀이 지난 8월 30일에 마지막 남은 스윙보틀을 꺼내 와인을 잔에 따라내어 마시기 시작했다. 오늘도 아내는 향에서 헷갈리다가 마시고 나서야 구분해낸다. 두 와인 모두 풍미가 극적으로 달라졌다. 앞선 날에서는 느낄 수 없었던 부드럽고 투명한 느낌을 받았다. 브리딩이 충분히 이루어져 밸런스가 완벽에 가깝게 잡혔을 때 머릿속에 그려지는 바로 그 이미지다. 프랑스, 미국 모두 그러하다.
아내도 너무 맛있다며 연신 술술 넘기는데 레드 와인을 부담스러워하는 아내한테 보기 힘든 장면이다. 오늘은 프랑스 와인도 신맛이 부담스럽지 않게 되어서 너무 맘에 든단다. 그래! 스윙보틀에 넣은 후 사나흘 정도 브리딩 해서 먹는 게 딱 좋겠구나. 250mL 분량으로 소분했으니 음주량 조절도 용이하고 말이야.
가만있어 보자. 그게 아닌가? 결국 이번에도 마지막 날이 가장 좋았단 말이야. 그러면 혹시 하루 정도 추가로 기다렸다면 더 나아지지 않았을까? 하지만 그동안의 경험으로 미루어 판단했을 때 이 정도로 투명한 느낌은 그야말로 최적의 순간에서나 만나게 되는 이미지가 분명한데.
다음에는 스윙보틀에 옮겨 담은 후 사흘에서 일주일 사이의 변화를 확인해볼까나? 에잇! 모르겠다. 그런 머리 아픈 고민은 나중에 하고 일단은 지금 내 혓바닥에 닿고 있는 이 순간의 와인에 집중하자. 그것이야말로 진정한 카르페 디엠을 추구하는 인간으로서의 올바른 자세일 테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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