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읽는 '홍범도 일지'... 그가 걸은 가시밭길
[황광우 작가]
▲ 국방부가 육군사관학교 교내뿐 아니라 국방부 청사 앞에 설치된 고 홍범도 장군 흉상에 대해서도 필요시 이전을 검토하고 있다고 밝힌 8월 28일 서울 용산구 국방부 청사 앞에 설치된 고 홍범도 장군 흉상 모습. |
ⓒ 연합뉴스 |
어수선합니다. 머나먼 이국에 묻힌 지 80여 년의 세월이 지난 시점에서야 뒤늦게 조국으로 모셔온 것도 부끄러운 일이었는데, 되먹지 못한 후손들이 장군의 이름을 먹칠하고 있어 몸 둘 바를 모르겠습니다.
김좌진 장군은 알아도 홍범도 장군은 참 모르고 살았습니다. 홍범도 장군은 포수로, 농부로, 금광 노동자로, 도망자로 살았습니다. 봉오동 전투의 주역이었으나 분단과 냉전의 그늘에 가리어져 있었습니다.
홍범도 장군은 70세 즈음에 일지를 남겼습니다. 그런데 장군의 평안도 사투리는 읽기 힘들었습니다. 홍범도 연보의 도움을 받아 홍범도 일지를 다시 작성합니다. 홍범도 장군이 걸어간 가시밭길, 그 한 자락이라도 배울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홍범도 일지
1868년 나는 평양 서문(西門)안에서 태어났습니다. 어머니는 태어난 지 칠 일만에 죽고 동냥 젖을 먹으면서 아버지 품에서 자랐습니다. 아홉 살 때, 아버지가 세상을 떠난 후 남의 집에서 머슴살이를 하였습니다.
열다섯 살 때 나팔수로 군인 생활을 하였습니다. 군대에서 사고를 치고 황해도 수안으로 도피하였습니다. 종이 만드는 지소(紙所)에서 3년간 제지(製紙)노동자로 일하였습니다. 악랄한 지소 주인이 임금을 체불하길래 주인을 때려 죽이고 산골로 숨었습니다.
이름을 바꾸고 금강산에서 중노릇을 하였습니다. 여승을 만나 함께 도망하였습니다. 강원도 회양 먹패장골에 들어가 사격연습을 하였습니다. 청일전쟁 당시 일본군이 무고한 백성들을 살해하는 것을 보았고, 명성황후 시해 사건을 듣고 산골에서 나왔습니다.
1895년 강원도에서 김수협과 의기투합하여 의병을 조직하기로 결의하였습니다. 일본놈들이 멘 총을 보니 과연 욕심이 나서 못 견디겠습디다. 김수협과 함께 일본군을 습격하고 총을 빼앗았습니다. 의병을 모집했습니다.
포수와 빈농으로 의병부대를 만들어 의병장 유석진의 부대와 연합하였습니다. 세 차례 전투를 치렀는데 대패하였습니다. 김수협도 그곳에서 죽었습니다. 나 혼자 살아남아 금광에 숨었습니다. 일본군에게 붙잡힐 뻔한 위기에서 일본군 세 명을 죽였습니다. 산간지방을 다니며 혼자 의병을 하였습니다. 총탄도 떨어지고 신발도 없어 고생만 하다가 농사를 지으며 포수로 살았습니다.
▲ 여천 홍범도 장군 생전 모습. |
ⓒ 홍범도장군기념사업회 |
4월 2일 임재덕, 김원흥을 체포하여 처형하였습니다. 일본놈은 남의 강토를 빼앗자고 패악질을 한다지만, 동포를 배신하고 일본의 앞잡이짓을 하는 놈을 그대로 둘 수 없었습니다. 화형에 처하였습니다.
5월 7일 함남 장진 평풍바위 밑에서 의병 연합회의를 개최하였습니다. 1800여 명의 의병을 11개 중대로 편제하였습니다. 6월 16일 정평 바맥이 전투에서 500명의 일본군과 교전하여 일본군 107명을 사상시켰고, 아들 양순과 의병 6명이 전사하였습니다.
일본군의 대공세가 시작되었습니다. 의병 부대들이 모두 해산하는 상황에서 해외로 이동하기로 하였습니다. 10월 삼수군에서 야밤에 압록강을 건너 중국으로 넘어갔습니다. 길림을 거쳐 러시아로 떠났습니다.
1909년 연해주에 도착하였습니다. 1910년 다시 국내로 진입하여 무산에서 일본군과 전투하였습니다. 무산 왜가림의 일본병참소를 공격하였습니다. 종성에서 포위되어 혼자만 살아남아 다시 블라디보스토크로 돌아왔습니다. 1911년 부두에서 짐꾼 일을 했습니다. 노동회를 결성하고 회원들의 임금을 모았습니다. 금광에서 일하면서 자금을 비축하였습니다.
1914년 제1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자 일본과 동맹국이 된 러시아 당국의 감시를 받게 되었습니다. 금광에서 모은 돈으로 오연발총을 구입하여 무장투쟁을 준비하였습니다.
1919년 3·1운동에 호응하여 만세운동을 전개하였습니다. 한인사회당의 당수 이동휘가 '독립군총사령관'으로 나를 임명하였습니다. 상해 임정의 대일선전포고에 호응하여 무장투쟁을 전개하기로 선언하였습니다.
1920년 6월 7일 나는 봉오동 골짜기에 포위진을 짜고 일본군을 유인하였습니다. 소나기가 막 쏟아지고, 운무가 자욱하게 끼여 앞을 구분할 수 없었습니다. 일본군이 선봉으로 올라가던 저희들의 부대를 독립군으로 오인하여 사격을 가하였습니다. 우리 부대는 고지 꼭대기까지 올라가 산 정상에서 일본군을 격파했습니다.
10월 김좌진, 이범석이 이끄는 북로군정서와 연합하여 청산리 대첩에 참가했습니다. 청산리 일대에서 일본군을 대파하였습니다.
만주에서 무기도 식량도 구하기 어려워 연해주로 이동하였습니다. 1921년 3월 경, 연해주에서 활동하던 한인독립군부대들은 자유시에 집결해 있었습니다. 당시 한인무장세력은 총 1900명 정도였습니다. 같은 해 6월 28일, 러시아 정부는 자신의 명령에 협조하지 않는 한인독립군을 진압했습니다. 나는 땅을 치며 통곡했습니다.
▲ 1922년 원동민족혁명단체대표회 당시 홍범도의 조사표. 빨간 원 안에 '고려 독립'이라는 문구가 선명하게 보인다. |
ⓒ 윤상원 |
1924년 러시아의 한인촌에서 3년간 농사를 지었습니다. 1927년 소련공산당에 입당하였습니다. 저의 목표는 '조선의 독립'이었습니다. 1934년부터 집단농장 콜호즈에서 수위로 일했습니다. 1937년 중앙아시아의 카자흐스탄으로 강제 이주를 당했습니다. 그곳에서 고려극장의 수위로 일했습니다.
고려인 작가 김준은 1928년 한인촌에서 농사를 짓던 홍범도를 이렇게 회상했다.
"신장이 구척(190cm), 실로 장대한 분이었다. 거의 다 그를 쳐다봤다. 시꺼먼 눈, 수북한 윗수염, 거무스레한 얼굴. 과연 홍범도 대장은 의병대를 거느리고 동에 번쩍, 서에 번쩍했다. 오늘은 삼수갑산, 내일은 북청, 모레는 봉오골..."(<홍범도 장군>, 22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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