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회사에서 아이의 전화를 받지 못하는 이유
드라마 속 인물들의 심리를 탐구해봅니다. 그 때 그 장면 궁금했던 인물들의 심리를 펼쳐보면, 어느 새 우리 자신의 마음도 더 잘 보이게 될 것입니다. <편집자말>
[송주연 기자]
"도망친 거 같아요."
퇴사 후 7년 동안 전업주부로 살다 직장에 복귀해 인턴이 된 워킹맘 고해라(라미란)의 이야기를 담은 드라마 <잔혹한 인턴>. 해라는 7회 일을 좋아하면서도 왜 회사를 관두었냐는 회사동료 소진(김혜화)의 질문에 이렇게 답한다. 그러자 소진은 "(저도) 휴직하고 도망가려는 거예요. 내가 봐도 내 자신이 너무 한심하고 쪽팔려서"라고 답한다.
그리고 이들은 자신들의 '잘못'을 만회하기 위해 서로 도우며 회사에서 버텨내고자 애를 쓴다. 이들의 고군분투는 나 역시 워킹맘으로서 무척 애틋하게 다가왔다.
하지만,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과연 '도망'친 것이 이들의 '잘못'인 것일까. 이들이 서로를 도와 엄마임을 티 내지 않고 열심히 일하면 정말 직장에서 잘 버텨낼 수 있을까.
드라마의 배경이 되는 회사 '마켓 플레이스'의 근무 환경을 돌아보면 결코 이들만의 책임이라 말하기는 힘들어 보인다. 해라와 소진 역시 이를 잘 알 듯 8회엔 "우리가 정말 버텨낼 수 있을까요?"(소진) "우리가 힘을 합치면 뭐든 가능할 것 같습니다 라고 믿으면 더 낫지 않을까요?"(해라)라며 자조 섞인 대화를 나누기도 한다.
▲ 경쟁에 치우친 기업문화 속에서 고군분투하는 워킹맘들의 이야기를 담은 <잔혹한 인턴> 포스터. |
ⓒ tvN |
일과 돌봄 사이를 오가는 해라
해라는 '독하게 일해 온' 워킹맘이었다. 아이가 화상을 입었을 때조차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회의를 진행하고 승진을 위해 '임신 포기 각서'에도 서명을 한다. 임신과 육아로 힘들어하는 동료들에겐 "당신 같은 사람들 때문에 나같이 죽기 살기로 일하는 워킹맘까지 싸잡아 욕먹는 거 더는 못 참아"라고 말하며 모질게 대하는 상사였다.
하지만, 아이를 도맡아 키워주던 친정어머니가 쓰러지자, 해라는 아이와 친정엄마 둘을 돌봐야 하는 상황에 놓이고 결국 직장을 그만두고 만다. 우울하고 힘든 시간들을 버텨내면서 점차 전업주부의 삶에 적응해 간다. 그 사이 해라는 돌봄의 중요함을 알게 되고 워킹맘의 고충에 공감하는 인물로 변해간다. 그렇게 7년을 보내다 인턴 사원으로 복귀를 한다.
복귀한 해라에게 '실장'이 된 입사 동기 지원(엄지원)은 임신과 육아로 휴직 예정인 문정(이채은)과 소진의 퇴사를 유도하는 미션을 준다. 하지만, 해라는 문정의 퇴사 후 심한 양심의 가책을 느끼고 오히려 소진의 휴직을 막는다. 그리고 아이의 등하교 도우미를 소개시켜 주는 등 소진이 일에 집중할 수 있도록 함께 한다.
해라는 이처럼 일과 육아에 각각 전념하는 시간을 가지면서 큰 폭으로 변화한다. 하지만 달라지지 않은 모습이 하나 있는데 일과 육아 둘 중 하나를 선택하려 한다는 점이다. 해라는 육아의 소중함을 알지만, 여전히 회사에서는 육아를 티내지 않아야 한다고 여기고, 소진 역시 그럴 수 있도록 돕는다.
정말 이들의 잘못일까
하지만 복귀한 회사는 예전보다 더 삭막해졌다. 해라의 모진 모습에 '똑바로 살라'고 충고하던 동료 지원은 일하는 기계가 돼 있다. 경쟁사 온정기업의 '임신포기각서' 사건을 시대착오적이라 비난하면서도 회사 간부와 동료들의 입에서는 육아를 위해 휴직한다는 여직원들을 둘러싸고 이런 말들이 술술 나온다.
"저처럼 쓸 일 없는 사람들에겐 좀 억울한 제도죠."
"돌아오겠다고 자리는 맡아놔서 대체자를 앉히기도 애매하고 그렇다고 다른 직원들 업무를 무조건 늘릴 수도 없고."
"애가 없는 사람에게는 쓸 기회조차 없는 여러모로 불합리하고 이기적인 제도."
이는 기업문화 자체가 오직 경쟁과 성취로만 무장되어 있음을 잘 보여주는 말들이었다. 이런 말들이 난무하는 회사 안에서 누군가를 돌보는 일은 민폐를 끼치고, 경쟁에 뒤처지는 것이 되고 만다. 당연히 이런 구조에서는 그 누구도 '돌봄'을 티 낼 수 없다. 누군가를 돌본다는 것은 회사에 폐를 끼치는 일이라는 죄책감을 들게 하기 때문이다.
▲ 워킹맘 해라와 소진은 서로 도우며 회사에서 살아남기 위해 애쓴다. |
ⓒ tvN |
돌봄이 전제된 사회라면
사실, 조금만 더 시야를 넓혀보면 우리 주변엔 늘 돌볼 존재들이 있다. 아이 뿐 아니라, 부모나 다른 가족 구성원일 수도 있고, 때로는 반려동물, 혹은 나 자신일 수도 있다. 생명체이기에 언제든 몸과 마음이 아플 수 있고, 그럴 때 우리는 서로를 돌봐야 한다. 돌봄이 전제되어야만 일을 할 수 있고, 회사의 이윤을 창출할 수 있으며, 국가적 성장도 가능한 것이다.
그런데 드라마 속 회사처럼 우리 사회는 '돌봄'을 성장에 방해가 되는 것으로 여긴다. 앤 마리 슬로터가 <슈퍼우먼은 없다>에서 쓴 것처럼 이는 인류가 오랫동안 보살핌을 평가절하해왔던 것과 관련된다. 가부장적 이분법과 위계질서가 공고한 사회에서 남성-경쟁/ 여성-돌봄 이분법은 사람들의 정신세계를 지배했고, 앞의 것은 우월하고 뒤의 것은 열등한 것으로 분류되고 말았다. 이런 이유로 기업문화는 경쟁모델에만 기반해 형성됐다. 하지만, 앤 마리 슬로터가 말한 것처럼 보살핌 없이는 경쟁과 성취 또한 존재할 수 없다.
<잔혹한 인턴>은 이런 문화의 부작용을 잘 보여주고 있다. 지원처럼 회사에서 살아남기 위해 자기 자신을 잃어버린 여성, 모든 것을 '내 잘못'이라 여기고 늘 죄책감에 허덕이며 고군분투하는 여성들, 그리고 '돌봄'이 자신의 일이 아니라 여기며 성공과 성취만을 위해 살다 가정에서 설 자리를 잃거나 자기 자신도 잘 돌보지 못하는 남성들. 이런 인물들의 고통은 경쟁에만 치우친 기업문화에서 유래한 바가 크다.
하지만, 돌봄이 회사에 전제된다면 어떨까. 누군가를 돌보는 것을 경쟁에서 이기는 것과 똑같이 중요하게 여긴다면, 돌봄이 필요한 사람이 곁에 있을 때 누구든 이를 당당하게 직장에 밝히고 돌봄을 병행할 수 있을 것이다.
▲ 직장생활 초기, 성차별적인 문화에 반대했던 지원은 점차 성공을 위해 자기 자신마저 잃어버리는 인물로 변모한다. |
ⓒ tvN |
드라마를 보며 이런저런 생각에 빠져있을 때 고등학생 아들이 이런 소식을 전해왔다.
"엄마, 과학 선생님이 바뀌었어. 남자 선생님인데 아이를 돌봐야 해서 육아휴직을 하신대. 남자 선생님이 당당하게 육아휴직 쓴다고 말씀하시고 학교도 그걸 받아줘서 너무 좋아 보였어."
드라마보다 나은 현실이 있다는 게 무척 반가웠다. <아내가뭄>의 저자 애너벨 크랩은 '일하는 엄마'로 산다는 건 "마치 직업이 없는 사람처럼 아이를 기르면서 아이가 없는 사람처럼 일해야 한다는 압박에 시달리는 것이다"라고 했다. 나는 이 말이 완전히 뒤집어지길 바란다. "일이 있음을 전제하고 아이를 기르고, 아이가 있는 사람처럼 일하는 사회"가 된다면 어떨까.
<잔혹한 인턴>이 남은 후반부 동안 돌봄과 일을 병행할 수 있는 기업문화를 만들어가는 모습을 보여주기를, 그래서 해라나 소진이 직장에서 당당하게 아이의 전화를 받을 수 있게 된다면 정말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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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송주연 시민기자의 개인 블로그(https://blog.naver.com/serene_joo)와 브런치(https://brunch.co.kr/@serenity153)에도 실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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