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땅끝' 해남에 현무암이 여기저기 보이는 이유

이돈삼 2023. 9. 9. 16: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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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유재란 때 이순신 장군 들르고, 일제강점기 항일 독립운동에도 앞장선 이진마을

[이돈삼 기자]

 이진진성의 전망데크에서 내려다 본 이진마을 전경. 바다 건너편은 완도에 속한다.
ⓒ 이돈삼
 
이진은 그리 알려진 마을이 아니다. 독특한 볼거리가 있는 것도 아니다. 국보나 보물 같은 문화유산도 없다. 큰 도로의 나들목이나 교차로가 지나는 곳도 아니다. 하지만 알고 보면, 속이 꽉 찬 마을이다. '알토란' 같다. 일본에 맞선, 항일의 '대표주자'로 불릴 만한 곳이다.

역사도 깊다. 정유재란 때 이순신 장군도 들렀다. 1597년 8월 20일(양력 9월 30일), 회령포에서 배를 타고 울돌목으로 가는 길이었다. 뱃속이 요동을 치고, 머리는 깨질 듯이 아팠다. 구역질과 구토가 계속됐다. 몸을 가눌 수 없었다.

날마다 강행군한 탓일까? 모함을 받아 의금부에 압송돼 모진 고문을 당했다. 피폐해진 몸으로 백의종군 명령을 받아 아산과 구례를 거쳐 합천까지 내려왔고, 삼도수군통제사에 다시 임명돼 조선수군 재건에 나선 터였다.

아니면, 오랜만에 배를 타 멀미라도 한 걸까? 이순신은 몸을 따뜻하게 해보려고 술을 들이켰다. 나아지는 건 고사하고, 구토만 계속 나왔다. 일본군한테 쫓기는 상황이지만, 다른 방법이 없었다. 가까운 뭍에 함대를 대고, 배에서 내렸다.
 
 이진마을 풍경. 한적한 농어촌의 전형을 보여준다.
ⓒ 이돈삼
  
 옛 모습 그대로의 우물. 마을사람들은 장군샘으로 부르고 있다.
ⓒ 이돈삼
 
이순신 장군이 '정유일기'에 적은 내용이다. 배에서 내린 장군이 찾아간 곳이 해남 이진마을이다. 이순신 장군은 마을에서 주민들의 걱정과 환대를 받으며 몸을 추스렸다. 주민들은 몸에 좋다는 것을 다 가져왔다. 따뜻한 죽 한 그릇이 기운을 차리게 했다.

이순신은 주민들의 보살핌을 받으며 밤새 푹 쉬었다. 몸이 거짓말처럼 나아졌다. 이순신은 주민들의 극진한 돌봄에 고마움을 전하고, 다시 배에 올랐다.

"명량대첩에서 호남민중의 역할이 컸는데, 이진마을 주민들도 큰일을 한 겁니다. 이순신 장군을 정성껏 보살펴서 명량으로 갈 수 있게 했으니까요. 마을주민들도 자긍심을 갖고 있습니다."

이진마을에서 만난 박미례 해남문화관광해설사의 말이다.
 
 바다에서 본 이진마을 전경. 바다를 사이에 두고 완도와 군계를 이루고 있다.
ⓒ 이돈삼
  
 이진마을의 한낮 풍경. 마을회관에서 나온 어르신이 보행보조기에 의지해 집으로 가고 있다.
ⓒ 이돈삼
 
이진마을은 전라남도 해남군 북평면에 속한다. 바다를 사이에 두고 완도와 마주하고 있다. 뒤로는 기암괴석으로 키재기를 하는 달마산이 병풍처럼 펼쳐져 있다. 두륜산도 저만치 자리하고 있다.

마을의 지형이 먹는 배를 닮았고, 바닷가의 나루라고 '이진(梨津)'으로 이름 붙었다. 한때 '배진'으로도 불렸다. 주민들은 벼농사를 주로 짓는다. 마늘, 배추도 심는다. 앞바다에서 숭어와 낙지를 잡기도 한다.

바닷가의 이진은 나라를 지키는 데 중요한 땅이었다. 을묘왜변을 겪은 뒤인 1588년에 군대가 머무는 진(鎭)이 설치됐다. 1627년엔 만호진으로 승격됐다. 이진진은 1895년까지 300년 가까이 유지됐다.

진성(鎭城)은 1648년에 처음 쌓았다. 남쪽과 북쪽의 높은 구릉을 이용했다. 성벽의 바깥은 돌로 쌓고, 안쪽은 자갈과 흙으로 채웠다. 가운데가 낮은 타원형의 성이다. 성안에는 2개의 샘과 객사, 동헌, 군기고가 있었다. 방어시설인 해자와 목책도 뒀다. 마을은 성안에 자리하고 있다.
 
 이진마을을 둘러싸고 있는 이진진성의 성곽. 성곽이 벼논과 어우러져 더 아름답다.
ⓒ 이돈삼
  
 이진진성 옹성의 흔적. 마을로 들어가는 길목, 서문 자리에서 만난다.
ⓒ 이돈삼
 
1700년대 중반 나온 〈여지도서〉에 의하면 이진성은 둘레 1470척(445m), 높이 8척(2.4m) 규모였다. 성곽이 지금도 남아 있다. 일부는 복원했다. 서문 자리에 옹성이 있고, 밖으로 해자의 흔적도 보인다. 문앞에 목책도 있었다고 전한다. 문이 설치된 초석도 남았다.

옛 모습 그대로의 우물도 마을에 있다. 성터의 바위틈에서 내려오는 물이다. 수량은 많지 않지만, 일정한 편이다. 주민들은 '약수'로 여기며 아꼈다고 전해진다. 이순신 장군도 주민들이 떠다 준 이 물을 마셨을 것이다. 마을사람들은 '장군샘'으로 부르고 있다.

성곽을 둘러싼 방풍림이 눈길을 끈다. 수령 100∼300년 된 해송 60여 그루가 무리를 지어 있다. 해송숲에 전망데크도 만들어져 있다. 우거진 풀숲을 헤치고 올라가니, 시원한 숲그늘을 선사한다.

기둥이 두 갈래로 쭈욱- 뻗어 여인을 연상케 하는 소나무도 있다. 70년대 후반 '하사와 병장'이 부른 노래 '해남아가씨'가 절로 흥얼거려진다. '구름도 내맘인 양 그님 모습 그리고…. 바람도 반기는 양 내뺨을 스치고….'
 
 우거진 해송으로 방풍림을 이루고 있는 이진진성의 성곽. 해송숲에 전망데크도 만들어져 있다.
ⓒ 이돈삼
  
 이진마을에서 만나는 제주산 현무암. 제주에서 기른 말을 수송하는 배가 함께 싣고 와서 내려놓은 것으로 전해진다.
ⓒ 이돈삼
 
이진진성은 제주도와의 물자를 교류한 통제소 역할도 했다. 이진은 우수영과 함께 해남을 대표하는 포구였다. 제주에서 기른 말이 이진을 통해 들어왔다. 말을 수송하는 배는 돌덩이도 함께 실었다. 말은 위에, 돌덩이는 아래에 실어 배의 균형을 잡았다.

제주로 돌아갈 때는 돌덩이를 내려놓고, 대신 곡식을 실었다. 이진마을에 제주산 현무암이 여기저기 보이는 이유다. 마을에 돌담이 즐비하다. 최근에 다시 쌓은 것도 있지만, 옛 모습 그대로 정겨운 돌담이 많다. 보행보조기에 의지한 어르신이 돌담을 따라 지난다. 시멘트 담장에 그려진 벽화도 흥미롭다.

고샅에 만호비 4기가 서 있다. 1800년대 수군만호를 지낸 4명의 공덕을 기리는 영세불망비(永世不忘碑)다. 마을입구 도로변에 있던 것을 몇 해 전에 옮겼다.
 
 이진마을에 세워져 있는 만호비. 1800년대 수군만호를 지낸 4명의 공덕을 기리는 영세불망비다.
ⓒ 이돈삼
  
 이진마을 풍경. 골목 담장에 그려진 벽화도 볼거리를 선사하며 발걸음을 느리게 한다.
ⓒ 이돈삼
 
이진마을은 일제강점기에도 빛났다. 항일의식이 어디보다 강했다. 한말 의병장 황두일이 이 마을 출신이다. 마을주민들도 그를 따라 의병에 많이 참여했다. 황두일은 100명이 넘는 의병부대를 이끌고 일제에 맞서 싸웠다. 두륜산이 주된 활동무대였다. 일본군에 밀린 황두일 의병부대는 대흥사 심적암에서 최후의 일전을 벌였다.
일제강점기 많은 사람들에게 독립정신을 심어준 동광학원도 이진마을에 있었다. 1927년 강기동에 의해 설립된 사설학원이다. 동광학원은 문밖에 일장기를 걸고, 안에선 항일정신을 일깨웠다. 일본 유학파인 김홍배가 돌아오면서 북평 일대의 항일운동에 불을 당겼다. 김홍배도 이진마을 출신이었다.
 
 이진마을의 돌담길. 최근 다시 쌓은 것도 있지만, 옛 모습 그대로 정겨운 돌담이 많다.
ⓒ 이돈삼
 
김홍배 주도로 전남운동협의회가 결성됐다. 그 중심지도 이진마을이었다. 전남운동협의회는 해남과 완도를 비롯 장흥, 강진, 진도, 보성, 목포, 여수 등지에서 조직됐다. 호남에서 가장 큰 항일조직이 됐다. 동광학원 출신들이 이끌었다.

전남운동협의회가 일제에 발각되면서 동광학원도 강제 폐쇄됐다. 학원 설립자 강기동은 합자회사를 세워 또 다른 사회운동을 꿈꿨다.

일본의 오염수 방류로 반일감정이 어느 때보다 높은 지금이다. 때맞춰 정치권에서 쏘아 올린 이념논쟁도 뜨겁다. 일본에 맞선 이순신 장군과 독립운동가들의 숨결이 서린 이진마을을 다시 한번 찾은 이유다.
 
 이진마을을 둘러싸고 있는 이진진성의 성곽. 벼논과 어우러진 성곽이 옛 성터였음을 짐작케 한다.
ⓒ 이돈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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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전남일보에도 실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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