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내 괴롭히는 남편의 수면장애, 이 영화의 '공백' 활용법
[조영준 기자]
▲ 영화 <잠> 스틸컷 |
ⓒ 롯데컬처웍스(주)롯데엔터테인먼트 |
01.
"둘이 함께라면 극복 못할 문제는 없다."
현수(이선균 분)와 수진(정유미 분)은 곧 출산을 앞둔 사랑스러운 부부다. 이제 막 두각을 드러내며 TV 드라마에 조연으로 얼굴을 비치기 시작한 배우 남편을 뒷바라지하면서도 아내 수진은 행복해한다. 만삭에 외벌이나 다름없는 생활에 현실적인 어려움이 적지 않을 것 같지만, 강아지 한 마리까지 함께 이제 네 식구가 되는 날만 기다리는 두 사람의 가정에는 자그마한 구김 하나도 없어 보인다. 이 작고 소중한 가족에게 문제가 시작된 것은 어느 날 밤이다. 뒤척이다 잠이 깬 수진의 곁에 현수가 일어나 앉아 '누가 들어왔어'라는 말을 섬뜩한 말을 내뱉는다.
다음 날 아침, 아랫집에 새로 이사 왔다는 민정(김국희 분)은 어렵게 이야기하는 거라며 일주일 내내 새벽만 되면 쿵쾅거리고 비명 소리가 들려 힘들다는 말을 한다. 수진도 기억한다. 냉장고 앞에서 아무 음식이나 집어 먹던, 불러도 대답하지 않던 남편의 이상한 행동을. 잠에서 깬 그는 이제껏 자신이 알던 남편과는 완전히 다른 사람인 것만 같아 보였다. 행복하기만 할 것 같던 두 사람의 관계에 균열이 생기기 시작하는 순간이다.
영화 <잠>은 램(REM) 수면장애로 인해 밤마다 정신이 나간 채로 이상한 행동을 일삼는 현수와 그런 남편의 증세가 병인지 귀접인지 의심하기 시작하는 아내 수진의 이야기를 다루고 있는 작품이다. 이 영화에서 가장 중요한 부분은 두 사람의 관계를 어떻게 바라보고 있는가 하는 것이다. 이들 관계 사이에 의심한다는 표현을 쓰긴 했으나 작품의 시선에서 두 사람은 서로 의지하고 함께 나아가아 가고자 한다. 극 중에서 몇 차례나 강조되는 가훈 '둘이 함께라면 극복 못할 문제는 없다'가 핵심과도 같다. 그런 마음 위에서 만나게 되는 배우자의 두렵고 무서운 모습은 훨씬 더 큰 공포로 다가온다. 일부러 그러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과 쉽게 포기해서는 안된다는 믿음 사이에 홀로 던져지게 되기 때문이다.
02.
이 영화의 가장 큰 특징은 세 개의 큰 장(章)으로 이루어져 있다는 것이다. 과거 다른 영화에서 시도되지 않았던 처음의 형식은 분명 아니다. 이 구조가 이번 영화에서 특히 주목이 되는 이유는 두 사람의 관계, 특히 남편을 대하는 아내의 태도가 급격히 바뀌는 지점에서 분절되어 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이 영화 전체가 '공백'을 공통된 이미지로 삼고 있기 때문이기도 하다.
기본적으로 영화 <잠>은 인지적 공백과 시각적 공백을 극대화하여 활용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인지적 공백이라는 것은 '잠'이라는 소재가 기본적으로 갖고 있는 특성을 말한다. 누구나 자신이 잠을 자고 있는 상태에서는 주변 상황의 변화를 인지할 수 없는 상황에 놓이게 되는데, 영화의 기본적인 컨셉 자체가 여기에서부터 시작된다. 수면장애로 인해 자신이 어떤 행동을 하는지 전혀 인지하지 못하는 현수는 물론, 자신이 잠든 사이에 남편이 어떤 행동을 하고 있는지 알 수 없는 수진 역시 마찬가지다. 실제로 극 중 문제는 항상 그 공백 속에서 발생하고, 그로부터 불안이 발생된다.
▲ 영화 <잠> 스틸컷 |
ⓒ 롯데컬처웍스(주)롯데엔터테인먼트 |
"포기해서 쉬운 거야. 가족은 쉽게 포기하면 안 돼."
한편, 이 영화는 매 장(章)이 시작되는 장면에서 긍정적인 메시지가 내포된 새로운 시작점(1장의 아침, 2장의 출산, 3장의 완치)으로 구성되고 있다. 이 시작점은 이전에 주어졌던 장면을, 마치 꿈에서 깨어난 이후의 모습을 묘사라도 하는 듯이, 분절시키고 앞으로 나아간다. 문제의 해결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대신 이 시작은 각각의 이야기를 지나는 동안 또 다른 문제로 발화되는데, 이 과정에서 또 하나의 공백이 발생하는 구조가 형성된다. 무대 위의 연극에서 막과 막 사이에 존재하는 암전의 공백과 유사하다. 그런 의미에서 이 영화가 세 개의 큰 장(章)을 통해 하나의 이야기를 완성하는 것은 앞서 이야기했던 시각적 공백, 인지적 공백과 더불어 '공백'이라는 개념이 영화 전체를 관통하는 단어로 포집할 수 있게 만든다.
영화의 구조적인 지점과 외적인 지점에서 '공백'이 관객들에게 긴장감을 부여하고 극의 서스펜스를 지지하는 역할을 한다면, 내부의 인물들에게 있어서는 불안을 일으키는 요소라고 할 수 있다. 현수와 수진 사이에서는 그의 행동 장애가 완치될 때까지 '시간이 조금 걸리고 완치를 장담할 수 없다'는 부분이 이 공백의 핵심이 된다. 얼마의 시간이 걸릴지는 알 수 없으나, 아내의 입장에서는 그 시간 동안 자신이 기억하는 진짜 남편의 공백, 부재를 경험하게 되는 셈이다. 극의 후반에서는 이를 빙의된 존재, 아랫집 할아버지의 영혼으로 이어낸다.
극 중 인물들이 경험하게 되는 공백은 자연스럽게 모든 상황을 홀로 감내해야 하는 아내 수진의 불안으로 연결된다. 실제로 그녀는 2장(章)의 중반부까지 가족은 쉽게 포기해선 안된다며 남편의 불안까지 떠안으려는 용기 있는 모습을 보이지만, 자신은 물론 딸까지 위험에 처하게 될지 모른다는 극한의 공포 속에서 점차 그 불안에 잠식당하기 시작한다. 후반부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보살(김금순 분)과 미신에 대한 내러티브가 바로 이 틈에서부터 시작된다. 영화의 뼈대 위에서만 보더라도 한번 시작된 불안은 가족의 믿음과 수진의 사랑이 있던 자리에 불신과 맹신으로 채워 넣는다.
04.
영화 전체의 형태를 다시 생각해 보면, 내내 지켜지던 부부의 믿음과 사랑이 2막 후반과 3막 초반에 이르러 해체되었다가 마지막에 다시 연결되는 과정을 그리고 있다고 봐도 무방하다. 남편이 잠이 들어 있던 사이 몰래 신굿을 벌이고 몸에 부적을 새기는 수진은 물론, 아내를 홀로 정신병원에 입원까지 시키는 현수의 행동 모두는 '둘이 함께라면 극복 못할 문제가 없다'던 두 사람의 다짐에 배반되는 행위다. 다시 말해, '포기해서 쉽다고, 가족은 쉽게 포기하면 안 되는 것'이라던 수진의 말로부터도 멀리 떨어져 있다. 표현 상 아랫집 할아버지의 이야기가 덧씌워지고, 눈에 보이지 않는 존재에 대한 사건을 마련하는 것은 극적 흥미를 위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
▲ 영화 <잠> 스틸컷 |
ⓒ 롯데컬처웍스(주)롯데엔터테인먼트 |
호러에서 오컬트 장르까지. 이 영화가 외면적으로 드러내는 극의 장르는 생각보다 꽤 어둡고 음침하다. 그렇다고 시각적으로 직접 공포적인 분위기를 형성하거나 관객들을 위협하려고 들지는 않는다. 기존의 문법에서 묘하게 벗어나 있는 이 작품이 단단하게 느껴지는 것은 서로를 밀고 끌어당기는 장면들의 힘이 예상보다 더 강하기 때문이다. 이 글을 통해 계속해서 이야기하고 있는 '공백'이라는 단어가 개인적으로는 이 작품의 핵심이며 그 핵심을 영화 곳곳에서 잘 드러내고 이어가는 것이 이유라고 생각하지만, 다른 무엇이 놓이더라도 큰 문제가 되지는 않을 것이다. 중요한 것은 제대로 연결되어 잘 표현되고 있다는 사실 하나뿐이다.
영화의 첫 시작에서 잠을 자고 있는 수진을 카메라가 바라본다. 곁에 잠을 자고 있을 줄 알았던 남편은 혼수상태로 깨어있는 상태다. 이제 영화의 마지막에서 막 잠이 든 아내를 카메라가 내려다본다. 역시 그녀의 곁에 있는 현수지만 이번에는 제대로 깨어있다. 영화 전체를 통틀어 처음으로 누군가의 보호를 받으며 편안하게 잠이 들 수 있는 수진이다. 어쩌면 이질적인 장르의 옷을 입은 채로 하는 사랑에 대한 찬사인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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