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약 권하는 사회"... 사회학 교수의 신랄한 시집

정만진 2023. 9. 9. 12: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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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북대 김규원 명예교수 <다 같은 세상인 줄 알았어요> 출간

[정만진 기자]

 김규원 시집 <다 같은 사람인 줄 알았어요>
ⓒ 김규원
사회학자인 김규원 경북대 명예교수가 시집 <다 같은 사람인 줄 알았어요>를 발간하면서 '문학 신인'으로 갓 출발했다. 정년 퇴임 이후 시를 쓰기로 결심한 까닭이 잘 드러나 있는 '정년 신드롬'을 읽어본다.

자꾸 되새기자. 아직도 마음만은 좋게 쓸 수 있기에
온 세상 다 품고 살 수 있음을,
잊지 말자. 간밤엔 숨었지만 새벽녘 다시 솟는 태양은
짓궂은 구름이 앞을 가리고
비바람과 천둥소리가 길을 막아도
끈질기게 나를 찾아 헤매어 돌아다니고 있음을.
- '정년 신드롬' 일부

김규원은 "아직도 마음만은 좋게 쓸 수 있"다고 스스로를 독려한다. 시짓기가 마음을 좋게 쓰는 인간행동의 한 가지라는 뜻이다. 이는 유학의 존심양성(存心養性) 이론을 떠올리게 한다. 시집에 자주 등장하는 시어 '껍데기'를 원용하면, 그는 껍데기에 현혹되어 자꾸 흔들리는 마음(心)을 붙잡아(存) "좋게 쓸 수 있"는 참된 본성(性)으로 기르겠노라(養) 다짐하고 있다.

즉 인용구의 핵심어는 "자꾸 되새기자"와 "잊지 말자"이다. 유학에서는, 잊지 않으려면 반성관찰(反省觀察) 실천이 필수라고 가르친다. 시집의 표현을 빌리면, "거미보다 더 영리한 사람들"이 "나 혼자 살 수 없게 가두어 놓은 감옥"을 탈출해 잠시 존심양성을 이루었다 해도 쉼없이 스스로를 살피고[觀察] 뉘우쳐야[反省] "자기 세상"을 누릴 수 있다.

거미보다 영리한 사람들이 쳐놓은 사회의 감옥

따라서 김규원이 사회학적 시선과 인식을 자신의 시 속에 녹여놓은 것은 너무나 당연하다. 그렇게 해야 "자꾸 되새기자", "잊지 말자"고 공언한 자신의 사회적 약속을 지킬 수 있다. 그래야 사회학자로 평생을 살 수 있게 해준 사회에 대해 마음을 좋게 쓰는 행위가 된다. 시집 제목으로 선택된 시 '다 같은 사람인 줄 알았어요'를 읽어보자.

공중목욕탕에 가보면 안다고 했죠.
벌거벗은 몸뚱이엔 사회적 지위나 완장이 없다고요.
누구나 적나라한 원초적 모습에서 동등하다고요.
그런데 30년 남짓 동네목욕탕을 다녀보니 알게 되었습니다.(중략)
사람 다 같지 않다는 걸요.(중략)
큰 냉수 욕조를 독차지하여 헤엄치는 사람(중략)

산업화 덕분에 목욕은 특권 자리에서 물러나고
시민 평등의 상징이 되었죠.
대중목욕탕은 도회지 중산층의 사치가 아니고,
자본주의 착취에 찌든 노동자들의 노동재생산을 위한 휴식처가 되어
아편보다 중독이 심한 마약 같은 효능을 제공한다지요.(중략)

자유주의의 마지막 보루가 우리나라 동네목욕탕인 줄 아시나요?
사람들은 다 똑같이 잘 살 수 있다는 공산혁명의 허구성을 가르쳐주는 산교육 장소,
설사 정부비판과 정권교체의 밀담장소가 된다 한들
공중목욕탕 폐쇄는 안 될 일입니다.
동네목욕탕 존속을 위하여, 정부보조금 지원하고 이용요금 인상 막아야 합니다.
K-boom에 편승해서 K-목욕탕 세계진출을 도와야 할 때입니다. (후략)
- '다 같은 사람인 줄 알았어요' 일부

사람들은 흔히 공중목욕탕에 함께 드나들면 친해진다고 믿는다. "벌거벗은 몸뚱이엔 사회적 지위나 완장이 없다"는 판단을 근거로 공중목욕탕 안에서는 "누구나 적나라한 원초적 모습에서 동등하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김규원은 그렇지 않다고 지적한다. "시민 평등의 상징"으로 여겨지는 대중목욕탕이 사실은 "자본주의 착취에 찌든 노동자들의 노동재생산을 위한 휴식처가 되어/ 아편보다 중독이 심한 마약 같은 효능을 제공한다"는 것이다.

게다가 시 후반부로 가면 김규원은 사실주의적이었던 전반부와 매우 다른 문체를 보여준다. "자유주의의 마지막 보루"인 "우리나라 동네목욕탕"을 정부 보조금 및 요금 인상 금지 정책으로 지원하여 "K-목욕탕 세계 진출"의 성과를 거두자고 풍자(Satire)한다.

아편보다 중독 심한 마약 같은 대중목욕탕

시집을 통독해보면 그의 풍자는 '고향 도둑질', '세월 유감', '책과 시간의 싸움' 등 온유한 화풍으로 시작해서 '내버려 두세요', '계급과 마음씨', '거미줄', '매미가 소란한 이유' 등에 이르러서는 짙은 철학적 · 사회적 빛깔을 드러낸다. 그러다가 급기야 "제 답을 재촉하려고 조사관님께서 제 앞의 책상을 탁 하고 세게 내리치셨습니다. 저는 억 하고 깜짝 놀라 잠에서 깨어났습니다"라는 정치적 수사를 담은 '여름 한낮의 꿈'으로 나아간다.

"이제 전쟁 나면 도망갈 곳 없는 세상"임을 직시하자는 '손자의 세상', "할로윈 축제 즐기러간 젊은이들이 질식사한 사건"을 "정부가 공개적으로 조롱"한 '마약 권하는 사회' 등은 아예 직설적 화법을 구사한다. 이미 '다 같은 사람인 줄 알았어요'에서 "대중목욕탕은 아편보다 중독이 심한 마약 같은 효능을 (노동자에게) 제공한다지요"라면서 "마약"를 시어로 채택했던 김규원은 이제는 제목부터 '마약 권하는 사회'로 정해버린다.

할로윈 축제 즐기러간 젊은이들이 질식사한 사건이 있었다.
대통령실을 필두로 관계 부처장들은 책임 회피에 급급했다.
압사 원인을 마약에 취한 사람들의 난동이라고 추측하였다.
엉겁결에 마약을 황당한 비극의 무대 조연으로 등장시켰다.
황망하게 세상을 떠난 이들을 정부가 공개적으로 조롱했다.

마약을 권하는 사회의 서막인 줄은 그때는 정말 몰랐었다.
불행한 사고의 원인 제공자를 마약으로 지명하는 순간부터
마약 권하는 사회는 당당하게 거리를 활보하기에 이르렀다.
눈치 살피던 마약 공급자들은 잠재적인 수요층을 식별했다.
애먼 누명을 쓰고 숨어다니기보다는 커밍아웃을 택하였다.(중략)

마약 권하는 사회에서 마약이라는 말은 그만큼 품질이 좋고
만족스럽다는 비유적 의미이기에 법으로 규제해선 안 된다.
약드링크만 권할 것이 아니라, 마약학원과 마약특수학교를
만들고, 여론조사에서 별 인기 없으니까 지금 정당과 정부의
호칭을 마약정당, 마약정부라고 명칭변경을 시도하길 권한다.

김규원이 "내 껍데기/ 네 껍데기/ 겹겹이 쌓은/ 이 세상"을 현진건의 '술 권하는 사회'와도 견줄 수 없는 "마약 권하는 사회"로 풍자하는 것은 무엇 때문일까? 풍자(諷刺)는 교정과 개량을 목적으로 대상을 조소하고 비판하는 기법이다. 그러므로 김규원이 풍자 기법을 동원한 이유는 자명하다.

그는 "시라는 인간 장식품이 우주를 아름답게 꾸며주기를 간절히 바라"는 마음으로, "맨몸뚱이가 다 같지 않은 사람임에도/ 똑같이 대우하는" "정말 좋은 마음씨"를 가진 사람들로 가득 찬 세상에 대한 열망으로 시를 쓴다. "하루 벌어 하루 먹는 고달픈 삶"을 "몰라주는 자들이 많기에" 줄곧 매미처럼 울 수밖에 없는 "자본주의 착취에 찌든 노동자"들도 "세상천지에 신명이 넘쳐" 살아갈 수 있는 사회를 간절히 구하여 붓을 든다.

노동자들도 신명나게 살 수 있는 세상 기원

김규원의 그같은 인식은 시집을 관통해 감지된다. '세상 변화'를 보면 그는 "장소 가리지 않고 한꺼번에 봄꽃들이 피어"난 광경을 "난생 처음 보"고 놀라, 처음에는 그들을 "철부지 꽃들이라고 나무라고 싶"어한다. 그러나 이내 "따스한 햇살에/ 아이들도 꽃들도 마음대로 피어나야/ 헌 세상 가고 새 세상 오겠지."라고 생각하게 된다.

늦깎이로 문단에 나타난 김규원은 "세상 변화"를 바라는 사회학적 인식과 섬세한 시적 감수성이 잘 결합된 유장한 문체로 주목을 끈다.

물론 그의 시집이 하나같이 사회학적 시로만 가득 찬 것은 아니다. 김규원에게도 개인적 서정의 시간을 누릴 자유가 있다. 시집에 수록되어 있는 상당수 시들은 김규원이 여느 서정시인 못지않게 가녀린 심성의 사람이라는 사실을 확인시켜 준다.

'비밀 사랑'과 '사문진에서' 두 편을 그 예시로 들면서 글을 마칠까 한다.

지난 겨울 첫눈 내린 후 새해 입춘이 되도록 그대를 보지 못하면,
나는 그대가 그리워 한줄기 바람이 되고 말지요.
그대여, 진정한 사랑은 한평생 단둘이만 알고 있는 거죠.
새초롬한 봄나물 캐다가
향긋한 풀내 실은 바람 살랑 지나가거든
그리고
눈부시게 봄햇살 쬐다가
얌전히 외롭게 귓불 스치는 바람 있거든
그대여, 그 바람이 바로 나인 줄로 알아주세요.
- '비밀 사랑' 일부

날이면 날마다 해가 지는 것이 아니었음을
사문진 주막촌의 석양노을이
내 술잔에 담겼을 때 알게 되었다. (중략)
새로운 내일에 두렵고 가슴 설레던 그 시절을
사문진 석양아, 너만은 기억하고 있겠지. (중략)
매몰차게 야속스레 숨넘어간 석양이
내일의 황혼까지 영글게 할는지,
아련히 뒷모습을 남기고 홀연히 떠나버린
수녀 같은 여인은 알고 있으려나.
막걸리 주전자가 이미 비었는데
내 술잔은 아무런 말이 없다.
- '사문진에서' 일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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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붙이는 글 | 김규원, <다 같은 사람인 줄 알았어요>(국토, 2023년 7월), 127쪽, 1만2천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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