갑질 기획사에 대놓고 응징…10년째 C급 영화, 백승기의 고집
인천 웨스턴 표방 패러디 영화
10년차 C급 영화감독 백승기
꿈을 볼모로 잡혀 빚에 허덕이는 청년들을 현대판 노예에 빗댄 영화 ‘잔고: 분노의 적자(이하, '잔고')’(감독 백승기)가 13일 개봉한다. 쿠엔틴 타란티노 감독의 할리우드 서부영화 ‘장고: 분노의 추적자’(2012)를 패러디했다.
데뷔작 ‘숫호구’(2014)부터 10년째 C급 패러디 영화를 고집해온 인천 토박이 백승기(41) 감독의 5번째 장편 영화다. 인류의 기원을 네팔 히말라야까지 가서 찍어온 ‘시발, 놈: 인류의 시작’(2016), 스텔라 차량을 타고 우주를 나는 SF ‘인천스텔라’(2021) 등에 이어서다.
이번 영화에선 갑질 연예 기획사에 속은 배우 지망생 여동생과 전재산을 잃은 가난한 영화학도 잔고(정광우)가 전설의 총잡이가 되어 복수에 나선다. 과장된 캐릭터, 엉터리 영어 대사에 진지한 자막까지 ‘잔고’엔 날것의 유머가 가득하다.
단돈 6000만원 패러디, 장르팬 호응
“티켓 구매에 쓴 잔고가 아깝지 않다” “콩글리시 개그에 저항없이 웃는 내가 싫다ㅋㅋ” 등 호응에 더해 ‘화평동 세숫대야냉면(인천 명물) 웨스턴 장르’란 명명도 나왔다. 이탈리아식 서부극을 ‘스파게티 웨스턴’이라 부르는 걸 빗댔다.
Q : -어떻게 '잔고'에 착안했나.
“전작 ‘인천스텔라’ 이후 상업영화를 해보자고 마음먹었는데 코로나19가 왔다. 할 수 있는 게 글쓰기 밖에 없으니까 무기력해지더라. 당장 영화가 찍고 싶었다. 그러던 차에 타란티노 영화를 보고 자극을 받았다. 흑인 노예들이 걸어가는 첫 장면부터 나라면 어떻게 찍을까 막 상상되더라. 한달 안에 영화를 만들겠다고 멤버를 짰다.”
‘잔고’도 헐벗은 청년들이 10만원‧5만원 등 몸값이 프린트된 팬티만 입고 손목이 묶인 채 끌려가는 게 첫 장면이다. 대규모 전투신에서 총을 맞고 죽는 악역들의 모습은 시민들에게 찍어보내 달라고 공모해 절묘한 편집으로 장면을 완성했다.
타란티노 영화의 흑인 노예, 한국 청년 현실로 오마주
Q : -영화에 한국 청년 현실을 담았다. 하루 20시간 택배일을 해도 잔고가 바닥이고, 연예인 지망생은 악덕업주에 고통 받는다.
“패러디도 재해석이 중요하다. 아무리 웃겨도 독립영화가 살아남으려면 의미가 담겨야 한다. 저 자신도 진지한 면이 있고(백 감독은 10년 넘게 미술 교사로 재직했다), 타란티노도 오리지널 ‘장고’(1966)의 백인 장고를 흑인 노예로 바꾸면서 자기만의 이야기를 했잖나. 영화를 꿈꾸면서 저와 동료들이 느낀 답답한 현실을 ‘잔고’에 담았다. 싸게 빨리 재밌게 찍는 내 특기를 십분 활용했다.”
-‘잔고’의 사막조차 고향 인천에서 찾았다고.
“배로 편도 4시간 걸리는 대청도 해안사구다. 촬영 도중 같은 배에 확진자가 나와서 섬에서 자가격리하느라 일정이 꼬여 섬을 두 번 다녀왔다. 제작비 상승에 한몫 했다.”
Q : -‘시발, 놈’의 영어 내레이션에 이어 콩글리시 대사를 썼는데.
“미국발 서부극이니 더할 나위 없는 선택이었다. 너무 창조적인 영어로만 가면 지치니까 정상 문법도 섞었다. 균형감, 리듬이 중요하다.”
Q : -해외 관객용 영어자막은 어떻게 달았나.
“고백하자면 부천영화제 상영 때 영어자막은 캐나다에서 살다 온 한국 중학생이 작업했다. 같은 학교에서 근무했던 영어 교사에게 부탁했는데 그분이 딸한테 맡긴 거다. 마침 캐나다 영화제를 가게 된 게 ‘신의 한수’ 같기도 하고.”
차기작은 틱톡 세대 위한 패러디 영화
Q : -‘C급 영화 정신’을 표방해왔는데 ‘잔고’에선 서부극, 흑백 무성영화 등 고전을 돌아보기도 했다.
“사실 C급 영화, 저만의 색깔은 충분히 보여드린 것 같다. 10편, 20편 다작해서 이 방면의 ‘레전드’로 살다 죽을 수도 있지만, 지난 10년간 내 영화를 같이 해준 친구들한테 도움이 될까, 그런 고민이 계속되더라. 어느 순간부터 ‘C급’이란 단어는 자제하고 있다. ‘잔고’가 C급 영화론 마지막이 될 수도 있다.”
Q : -지난 10년을 돌이켜보면.
“‘숫호구’ 때부터 연기하던 손이용은 최근 상업 드라마에 캐스팅돼 하던 사업까지 접고 전업 배우를 선언했다. 정광우‧서현민 배우도 연극을 했지만, 영화는 ‘오늘도 평화로운’이 처음이다. 우리 영화가 꿈을 포기하지 않고 해나가는 발판이 됐다는 게 뿌듯하다. 교사 시절 저를 담임으로 만난 중학생 제자가 영화과에 간 사례도 있다.”
Q : -차기작은 어떤 작품인가.
“상업영화를 준비중이다. 요즘 10대들은 하루 종일 휴대폰 작은 화면으로 틱톡‧릴스‧쇼츠‧게임을 본다. 영화를 보는 건 등산과 비슷하다. 좋지만 수고롭다. 우리 세대에게 극장은 낭만과 신비의 공간이었는데 지금 세대에겐 볼거리가 과잉이다. 패러디해도 그 친구들이 보는 유튜브 짤이 나와야 재밌어할 것 같다. 큰 줄거리는 영화의 익숙한 구성을 따르더라도, 그런 요즘 취향을 적극적으로 차용해보고 싶다.”
나원정 기자 na.wonjeong@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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