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성관의 세계인문여행]소설 속의 빛나는 첫 문장들
“4월, 맑고 쌀쌀한 날이었다. 시계들의 종이 열세 번을 울리고 있었다.···”
조지 오웰의 장편소설 ‘1984’는 이렇게 첫 문장을 시작한다. 그다음 문장이다.
“윈스턴 스미스는 차가운 바람을 피해 턱을 가슴에 처박고 승리 맨션의 유리문으로 재빨리 들어갔다. 막을 새도 없이 모래바람이 그 뒤를 따라 들이닥쳤다.
복도에서는 삶은 양배추와 낡은 매트 냄새가 풍겼다. 복도 한쪽 끝 벽에 컬러 포스터가 붙어 있었다. 실내에 붙이기에 지나치게 큰 것이었다. 포스터에는 폭이 1m도 넘는 커다란 얼굴이 그려져 있었다. 덥수룩한 검은 수염에 마흔댓 살쯤 되어 보이는 잘생긴 남자 얼굴이었다. 윈스턴은 제단 쪽으로 향했다. 엘리베이터는 있으나 마나 한 것으로, 경기가 좋을 때도 좀처럼 가동되지 않았다.(…)”
소설의 첫 문장은 두 가지 임무를 지닌다. 하나는 작품의 주제와 분위기를 암시해야 한다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독자의 호기심을 자극해 끝까지 읽게 만들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래야만 독자들은 낚싯바늘을 물어버린 물고기처럼 마지막 페이지를 읽을 때까지 소설에서 빠져나갈 수 없게 된다.
13이라는 숫자는 기독교 문명권에서 불길함을 암시한다. 최후의 만찬에 참가한 예수와 12사도를 합한 숫자가 13이다. 완전수(數)로 여기는 12 다음에 오는 숫자가 또한 13이다. 우리가 ‘4’를 피하는 것처럼 기독교 문명권에서는 ‘13’을 꺼린다.
4월은 또 어떤가. 1년 열두달 중에서 가장 불안정한 시기다. 사월을 가리켜 환절기라고 한다. 자연도 그렇다. 사월의 숲을 가만히 살펴보라. 겨울의 칙칙함을 벗고 봄의 상큼함으로 갈아입는 숲은 어수선하고 혼란스럽다. ‘1984’는 첫 두 문장에서부터 불안과 불길을 복선으로 깔았다. 빅 브라더(Big Brother)의 세상에서 펼쳐질 기괴한 일들을 암시한다.
소설의 첫 문장은 영화의 ‘5분 효과’와도 비교할 수 있겠다. 모든 영화에서 초반 5분 동안 관객을 사로잡지 못하면 그 영화는 성공하기 어렵다는 게 영화의 정석이다. 내 경우도 초반이 지루하면 결국은 그 영화를 포기한다.
스티븐 스필버그의 ‘라이언 일병 구하기’가 초반 5분의 임팩트를 가장 극명하게 보여주는 대표적인 영화다. 초반 5분은 연합군의 노르망디 상륙작전의 현장이다. 독일군의 총탄이 비처럼 쏟아지는 가운데 연합군의 상륙작전이 전개된다. 연합군 병사들이 옥수수 대처럼 무참하게 쓰러진다.
영화 ‘아마데우스’의 런닝타임은 180분이다. 그럼에도 전혀 지루하게 느껴지지 않는다. ‘아마데우스’를 지배하는 긴장과 흥미는 초반 5분의 음악 덕분이다. 일명 잘츠부르크 교향곡이라 부리는 교향곡 25번이 극적 긴장감을 고조시키고 끝까지 몰입하게 만든다.
“국경의 긴 터널을 빠져나오니 설국이었다. 밤의 밑바닥이 하얘졌다. 신호소에 기차가 멈춰섰다. …”
가와바타 야스나리(川端康成)에게 노벨문학상을 안겨준 ‘설국(雪國)’의 첫 문장이다.
‘설국’의 배경은 니가타 현. 니가타 유자와의 다카한 료칸(高半 旅館)에서 작가는 이 소설을 썼다. 국(國)은 일본어에서 나라를 의미하기도 하고 지방을 뜻하기도 한다. 그러니까 ‘국경’은 지방의 경계를 말한다.
김훈의 장편소설 ‘칼의 노래’는 이렇게 시작한다.
‘버려진 섬마다 꽃이 피었다.~’
김훈은 ‘꽃이’라고 할지 ‘꽃은’이라고 할지를 놓고 오래 고민을 했다고 한다. 조사 ‘~이’와 ‘~은’에는 미묘한 뉘앙스의 차이가 있어서다. ‘버려진 섬마다’에서는 어떤 거역할 수 없는 운명적 상황이 감지된다. 그런 가운데 꽃이 피었다. 꽃은 생명과 희망의 상징이다.
카뮈에게 노벨문학상을 안겨준 소설 ‘이방인’은 첫 문장이 이렇게 시작된다.
‘오늘 어머니가 세상을 떠났다. 아니 어쩌면 어제였는지도 모르겠다~’.
아니, 자기 어머니가 언제 죽었는지도 정확히 모르는 사람이 있단 말인가. 이 첫 문장을 가리켜 ‘세상과 단절된 새로운 인간형의 탄생 선언’이라는 비평이 나온다.
신경숙의 ‘엄마를 부탁해’도 ‘이방인’과 흡사하다. 첫 문장에서 사건 발생의 시제(時制)로 강력한 호기심을 끌어내는 데 성공한 경우다.
‘엄마를 잃어버린 지 일주일째다’
독자는 이 문장을 접하는 순간, 지난 엿새에 대한 호기심이 코브라처럼 스르르 고개를 쳐든다. 작가는 치매 걸린 엄마가 집을 나가 잃어버린 첫째 날부터 여섯째 날까지 벌어진 일들을 하나씩 풀어가면 되는 것이다.
소설이든 산문이든 첫 문장을 쓰는 게 가장 힘들다. 머릿속에서 뒤죽박죽 섞여 있는 생각들을 한 줄의 실로 뽑아내는 일. 첫 문장이 쉽게 쓰여진다면 두 번째, 세 번째, 네 번째 문장도 술술술 풀려나갈 가능성이 높아진다. 오죽하면 첫 문장을 앞에 둔 이 세상 모든 작가의 번민을 노래한 시(詩)까지 나왔을까. 시인 심보선은 ‘첫줄’이라는 제목으로 시를 썼다.
‘첫줄을 기다리고 있다. 그것이 잘 써진다면 첫눈처럼 기쁠 것이다. 연서의 첫 줄과 선언문의 첫줄, 첫 아이처럼 기쁠 것이다’
산울림 작곡가 김창훈은 시에 노래를 붙이는 작업을 3년째 한다. 벌써 524곡이 넘었다. 김 작곡가가 ‘첫줄’에 곡을 붙였다. 그로 인해 ‘첫줄’이 음율(音律)을 타고 첫눈처럼 너울너울 춤춘다.
표도르 도스토옙스키의 ‘죄와 벌’은 이렇게 시작한다.
‘찌는 듯한 무더운 7월 초의 어느날 해 질 무렵, S골목의 하숙집에 살고 있던 한 청년이 자신의 작은 방에서 거리로 나와, 왠지 망설이는 듯한 모습으로 K다리를 향해 천천히 발걸음을 옮기고 있었다. 그는 다행히도 계단에서 여주인과 마주치는 것을 피할 수 있었다~’
시간은 찌는 듯한 7월 초 어느날 해 질 무렵이고, 공간은 작은 방과 K다리. 찌는 듯한 무더운 날 7월초 어느날 작은 다락방에 있던 청년은 뭔가를 결심한 듯 여주인의 눈을 피해 바깥으로 나와 목적지를 향해 걸어간다.
도스토옙스키 연구가들이 이 첫 문장에 홀려 다락방 하숙집이 있는 S골목을 찾았고, 청년의 걸음으로 K다리를 건넜다. S골목은 스톨랴르니 골목길이고, K다리는 코쿠쉬킨 다리를 각각 가리킨다. 도스토옙스키 연구자의 한 사람으로서 나도 상트 페테르부르크에서 해질 무렵 S골목에서 나와 K다리를 향해 걸어보았다. 그리고 청년의 발걸음으로 K다리를 지나 전당포 주인의 집까지 운하길을 따라 걸었다.
2000년대 이후 나온 소설 중에서 이민진의 소설 ‘파친코’의 첫 문장이 최고의 명문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알려진 것처럼 재미작가인 이민진은 영어로 ‘파친코’를 썼고, 미국에서 출간된 것을 다시 우리말로 옮겼다.
‘역사는 우리를 저버렸지만 그래도 상관없다.’(History has failed us, but no matter)
‘has failed us’가 초판에서는 ‘버렸지만’으로 번역되었다. 하지만 개정판에서는 ‘저버렸지만’이라고 바뀌었다.
‘파친코’는 일제식민지부터 1980년대까지를 배경으로 4대에 걸친 재일교포(자이니치)의 굴곡진 삶을 다룬 소설이다. 이민진 소설가의 개정판 출간 기자회견장에 이 첫 문장을 배경 판(백드롭)으로 내걸었다.
‘역사는 우리를 저버렸지만 그래도 상관없다.’
구한말 이후에 태어난 거의 모든 한국인은 불행한 운명의 톱니바퀴 속으로 빨려 들어갔다. 부국강병(富國强兵)에 실패한 못난 조상들로 인해 역사의 수레바퀴는 거친 굉음을 내며 한국인의 생명과 자유를 짓밟았다. 식민지, 이산, 혼돈, 전란, 그리고 폐허.
자이니치는 식민지 시절 먹고 살기 위해 일본으로 건너간 부모에게서 태어난 이들을 말한다. ‘파친코’는 일본에서 온갖 차별과 멸시를 받으며 몸부림친 이들의 생존사(史)다. 야구선수 장훈 같은 사람이 자이니치다. 앞으로 전개될 자이니치 4대가 겪는 수난사를 소설가는 ‘역사는 우리를 저버렸지만···’이라는 문장으로 함축했다.
‘그래도 상관없다’라는 문장에서 우리는 니체의 ‘아모르 파티(Amor Fati)’를 떠올리게 된다. 운명은 운명이고, 결코 운명 앞에 고분고분하지 않겠다는 결기가 느껴진다. 운명의 파도에 호락호락 휩쓸려가지 않겠다는 쿨한 당당함이라고나 할까.
첫 문장이 잘 써지면 나머지 문장들도 술술술 풀려나간다.
조성관 작가·천재 연구가
'지니어스 테이블' 운영자, 전 주간조선 편집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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