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사 고르면 나아질까요?"…직장 내 갑질 여전한 이유 [전민정의 출근 중]
[한국경제TV 전민정 기자]
● 술 안 따랐더니 강제 발령...장기자랑까지 강요
# A 지역 축협 임원은 여직원에게 고객과의 식사 자리에 강제로 참석하도록 해 이 자리에서 술 따르기와 마시기를 강요했습니다. 여직원이 이를 거부하고 중단할 것을 요구하자, 임원은 합리적 이유 없이 이 여직원을 다른 지점으로 발령을 냈습니다.
# B 지역 축협의 한 조합장은 매주 월요일이면 전 직원에게 율동 동영상을 촬영해 SNS에 올리도록 했습니다. 그러면서 영상에 나오는 여직원들의 외모와 복장을 지적했습니다.
# C 지역 신협의 한 임원은 "나에게 잘 보이면 보너스 점수를 준다"며 워크숍에서 장기자랑과 공연을 하도록 강요했습니다.
직원들은 워크숍 뮤지컬 공연을 위해 3개월간 학원까지 다니며 연습까지 했는데 워크숍 심사위원으로 참석한 이 임원은 "너희와 그 노래는 안 어울린다"고 평가했습니다.
최근 고용노동부에 적발된 지역 금융기관들의 직장 내 갑질과 관련된 위법 사례들입니다.
2019년 7월, 직장 내 괴롭힘 금지법이 시행 된지 4년이 지났지만 여전히 곳곳에서 직장내 괴롭힘으로 인한 문제가 발생하고 있습니다.
고용노동부에 따르면 신고 건수는 금지법 2019년 시행 첫해 6개월간 2,130건에서 2020년 5,823건, 2021년 7,774건으로 급증했습니다.
지난해에도 7,814건이나 신고가 됐습니다. 괴롭힘 유형은 폭언이 1만124건(54.7%)으로 가장 많았고, 그 외 부당인사(13.8%)와 따돌림·험담(11%), 차별(3.2%) 순이었습니다.
● 해외선 "주 1회 반복되면 처벌"…객관적 판단기준 있어야
직장 내 괴롭힘은 직장에서의 지위 또는 관계의 우위를 이용해 업무상 적정 범위를 넘어 다른 근로자에게 신체적, 정신적 고통을 주거나 근무환경을 악화시키는 행위를 말합니다.
직장 내 괴롭힘 금지법에 따르면 누구든지 괴롭힘 발생사실을 사용자(회사)에게 신고가 가능하며, 직장 내 괴롭힘 발생사실을 신고받거나 인지한 경우 사용자는 지체 없이 당사자등 대상으로 객관적으로 조사할 의무가 있습니다.
또 조사기간 중 사용자는 피해자의 의견을 들어 피해자의 근무장소 변경, 유급휴가 명령 등 적절한 조치를 취해야 합니다.
직장 내 괴롭힘이 확인된 경우엔 사용자는 가해자에 대한 징계나 근무장소 변경 등 필요한 조치를 할 의무가 있습니다.
이렇듯 직장 내 괴롭힘이 발생했을 때 과거와 달리 즉각적인 조치가 가능해졌지만, 왜 일터 현장에선 여전히 괴롭힘이 만연해 있는 걸까요.
현장과 전문가들은 우선 '괴롭힘으로 정의내리기에 어려운 경우가 많다'는 점을 지적합니다.
직장 내 괴롭힘의 신고나 처벌이 주관적인 판단에 의존하기 때문인데요.
우리나라 이외에 호주, 프랑스, 브라질, 노르웨이 등 직장 내 괴롭힘과 관련한 처벌조항이 있는 국가들은 지속성이나 반복성 등 명확하고 객관적인 괴롭힘 판단기준을 갖추고 있습니다.
예컨대 6개월 이상 지속이라는 지속성이나 주1회 반복 이라는 반복성들을 적용해서 직장 내 괴롭힘에 판단을 쉽게 할 수 있도록 하는 거죠.
또 해외에선 괴롭힘 대응이 사용자의 책임이라는 공감대가 형성돼 있고, 전담 인력이 객관적인 판단을 내리기도 합니다.
노르웨이의 경우 전담 인력을 양성하는 관련 석사 학위(Prevention Advisor 과정)가 있고, 벨기에선 심리학이나 사회학 관련 학위, 1.5년 전문교육, 5년 실무경이 필수 요건인 전문 인력을 키우고 있습니다.
우리나라에선 피해자의 신고에 의존하는 사후구제 중심의 대응 체계로 직장 내 괴롭힘이 근절되지 않는다는 지적도 있습니다.
서유정 한국직업능력연구원 연구위원은 "직장 내 괴롭힘에 제대로 대응하는 국가들은 예방 중심의 대응체계를 갖추고 있다"며 "특히 우리는 사용자의 책임의식이 부족하고 사건 신고를 차단하거나 방치하는 등의 사업장의 편법, 위법 조치의 심각성 때문에 예방부터 사건처리까지 사업장 모니터링이 필요하다"고 강조했습니다.
● "허위 괴롭힘 신고로 기피 부서 피한다?" 우리나라에선 직장 내 괴롬힘과 관련해 모호한 규정에 허위·과장 신고가 남발되는 경우도 적지 않습니다.
근로기준법의 '괴롭힘 피해를 신고한 자에게 인사 불이익을 줘선 안 된다'는 규정 때문인데요.
직장 내 괴롭힘 신고자를 보호하기 위한 규정이 악의적인 의도가 나타날 수 있게 하고, 기피 부서 발령을 피하기 위한 수단으로 악용될 수 있는 셈입니다.
서유정 연구위원도 "허위신고는 악의를 가지고 누명을 씌우기 위한 괴롭힘의 한 형태로 조직과 동료, 관련 외부 기관 등에 대한 불신을 유발하고, 가해자로 낙인 찍히는 등 2차 가해를 당하게 된다"면서 △명확하고 객관적인 괴롭힘 기준 마련 △사업장이 아닌 행정기관 바로 신고시 피해자로서 보호받을 권리 상실 △전문성 높은 전문인력 참여 등을 대처방법으로 제시했습니다.
실제 우리나라는 몇년이 지난 사건에 대해서도 신고 접수를 받고 있고 퇴직자의 신고 건수도 많은데요.
허위 신고를 막기 위해선 아일랜드 등 해외 국가 처럼 사건 발생 6개월 이내, 괴롭힘 피해로 정신적 피해를 겪었음을 입증할 수 있을 때만 신고 접수가 가능하도록 하고 취업규칙에 허위신고인 징계 등 대응지침을 마련해야 한다는 의견도 있습니다.
또 괴롭힘 신고 조치시 반드시 전문성 높은 전문인력이 참여할 수 있도록 함으로써 허위신고를 줄여야 한다는 목소리도 제기됩니다.
● 상사선택제로 갑질 줄인다?…수평적 조직문화 조성돼야
최근 채용플랫폼인 인크루트가 20~30대 직장인을 대상으로 '상사선택제'에 대해 설문조사한 결과가 나와 눈길을 끌고 있습니다.
상사선택제는 일반 사원 등 직원이 직장 상사를 선택할 수 있는 제도를 말하는데요.
일본의 '사쿠라 구조'라는 설계회사가 2019년 이 제도를 도입해 4년 만에 이직률을 11.3%에서 0%까지 낮추면서 화제를 모았습니다.
이 회사는 2018년 직원 한 명이 '상사와 맞지 않는다'며 퇴직하면서 상사선택제를 도입했는데, 이 회사 직원 100여 명은 매년 3월마다 상사가 자신의 업무 스타일을 문항별로 소개한 '상사 활용 매뉴얼'과 다른 직원들의 평가서까지 받아 상사를 선택한다고 합니다.
아직 우리나라에선 생소한 상사선택제에 대해 인크루트가 2030 직장인 767명을 대상으로 조사한 결과, 10명 중 9명이 '긍정적'이라고 답했는데요.
갑질과 직장 내 괴롭힘이 줄어들 것으로 기대된다는 것이 가장 큰 이유였습니다.
이번 설문조사 결과에선 부하가 상사를 직접 선택해 수직적인 회사 문화에서 탈피하고자 하는 MZ 직장인들의 바람이 그대로 반영됐는데요.
정부도 현재 관계부처를 중심으로 준법감시인 선임 의무화 등 제도개선 방안 등을 논의 중인데요.
직장 내 괴롭힘 근절을 위해선 아직까지 5인 미만 사업장에 직장 내 괴롭힘 금지법이 적용되지 않고 있는 만큼 법 체계 보완과 함께 합리적·수평적 조직문화를 만들어가려는 노력도 필수적이라 하겠습니다.
김승현 노무법인 시선 노무사는 "모두가 원만하고 좋은 인간관계를 맺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하며 이해관계, 사내 정치 등 갈등 요소는 늘상 발생한다"며 "정당한 업무명령과 그 내용만을 전달하는 습관을 가져야 하고 업무 명령에 감정을 담아 전달하는 불필요한 언행도 주의할 필요가 있다"고 조언했습니다.
전민정기자 jmj@wowtv.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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