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 나의 선생님

양민철,산업1부 2023. 9. 9. 04: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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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민철 산업1부 기자


지난 4일 서울 여의도에서 열린 ‘공교육 멈춤의 날’ 추모 집회를 보며 잊고 있던 기억이 떠올랐다. 초등학교 4학년 시절 등굣길이었다. 학교 앞 문방구에 들어갔는데 주인아저씨가 어두운 얼굴로 말을 건넸다. “4학년 2반은 준비물 안 사가도 돼. 어젯밤에 담임선생님이 돌아가셨대.” 학교로 뛰어가자 교실은 온통 눈물바다였다. 돌이켜보면 그때 선생님은 지금 내 나이와 비슷했던 것 같다.

선생님이 돌아가신 이유는 잘 기억나지 않는다. 갑작스럽게 아프셨다는 설명 정도만 어렴풋이 남아 있다. 다만 운구차가 학교 운동장을 한 바퀴 돌아 나가던 날의 풍경과 새로 오신 담임선생님이 마치 새엄마처럼 느껴지던 순간의 감정은 28년이 흐른 지금도 생생하다.

근래 매일같이 이어지는 선생님들의 안타까운 사연이 아이들에게 어떤 기억으로 남을지 생각한다. 시간이 흘러도 두고두고 잊을 수 없는 아픈 기억이자 소중한 사람을 지키지 못한 쓰린 상처로 남을 것이다. 숨진 선생님의 49재였던 4일 서울 서초구 서이초등학교 추모 공간에는 여전히 고인을 추모하는 메모지가 가득했다. 아이들은 그 광경을 나이가 들어서도 잊지 못할 것이다.

한국 사회에서 교사란 직업은 안정성의 상징과 같았다. 학창 시절 부모님은 귀에 못이 박히도록 ‘교대에 가서 선생님이 되라’고 권유했다. 정년에 연금까지 보장된 데다 방학에 쉴 수 있고 존경받는 직업이란 점에서 이보다 더 좋을 수 없다는 이유였다. 일부 극성 학부모의 악성 민원과 무분별한 송사에 대한 대책 마련을 호소하는 지금의 교사들로선 공감할 수 없는 철 지난 레퍼토리일 것이다. 과거엔 언론도 학업 스트레스와 과도한 교권 행사로 안타까운 선택을 하는 학생들을 조명했다. 이제는 상황이 반대가 됐다.

모든 게 그렇듯 훌륭한 선생님이 있으면 그렇지 못한 선생님도 있다. 대한민국에서 공교육을 받은 이라면 모두 선생님에 대한 상반된 기억이 있을 것이다. 옛날의 심한 체벌이나 촌지 요구 등은 악몽으로 남아 있다. 반대로 좁은 교실에서 책걸상을 붙이고 앉은 제자들에게 넓은 세상을 향한 꿈과 희망을 심어주었던 선생님들은 떠올리는 것만으로 그 시절이 그리워진다. 대다수 사람은 이런 저마다의 기억에 머무른 채 교육 현장의 아우성을 극히 일부의 사례로 치부했을지 모른다.

교실 내 권력 관계는 교사가 학생보다 우위에 있는 것이 현실이다. 그래서 평범한 부모들은 자녀가 선생님에게 혹시나 밉보이는 일이 생길까 여전히 불안해한다. 한편으로는 교실에서 문제를 일으키는 다른 학생들로 인해 우리 아이가 피해를 입지 않도록 교사의 적극적인 역할을 원한다. 하지만 지금의 선생님들은 집중력 부족, 충동성, 감정 및 행동조절 능력 부족 등으로 과잉 행동과 폭력성을 보이는 학생을 제어할 힘을 잃은 지 오래다. 오죽하면 학부모들 사이에서도 “교권이 너무 하락해 교실 문제를 학생들끼리 해결해야 할 지경”이라는 말이 나올까.

공교육 멈춤의 날 집회에선 “수업시간에 자는 아이를 깨우다가 변호사를 만나고, 학교폭력을 말리다가 아동학대로 신고를 당한다”는 교사들의 성토가 쏟아졌다. 문제를 일으킨 아이를 꾸중하면 ‘정서적 아동학대’로 몰리고, 가만히 두면 문제가 커져 ‘아동학대 방임’으로 입건되는 외통수에 놓여 있다는 것이 교사들의 호소다. 과거에도 비슷한 성토가 있었지만 과장인 줄 알았다. 자신의 삶과 교육 철학을 부정당한 선생님들의 안타까운 선택이 줄을 잇고 나서야 심각성이 부각됐다.

교권 회복 문제는 법률 개정의 단계로 넘어가고 있다. 교원의 정당한 생활지도는 아동학대로 보지 않는다는 ‘초·중등교육법’ 개정안 등이 국회 문턱을 넘어가려 하지만, 교사들은 아동복지법 자체를 고쳐야 한다고 주장한다. 정서적 학대행위의 정의가 모호해 무분별한 신고로 악용될 수 있다는 것이다. 어설픈 법 조항이 문제를 해결하기보다 오히려 악용하는 사람과 선의의 피해자를 양산하는 것을 우리는 너무 많이 봐 왔다.

글을 쓰며 학창 시절 은사들을 오랜만에 떠올렸다. 젊었던 선생님들은 어느새 교감 교장이 됐고, 건강 문제로 교편을 놓거나 세상을 떠난 분도 계셨다. 지금 우리 아이들에게 선생님은 어떤 존재로 남을까. 교육 현장의 아픈 상처가 오래 남지 않길 바랄 뿐이다.

양민철 산업1부 기자 listen@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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