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권에 따라 바뀌는 역사 영웅들… 국민은 혼란스럽다
육군사관학교 내 홍범도 장군 흉상 이전을 둘러싼 ‘이념 논쟁’으로 한바탕 떠들썩했다. 일제강점기와 광복, 남북 분단과 6·25전쟁 등 근현대 정치적 격동기에 활동했던 역사적 인물을 두고 정권마다 ‘친북’이냐 ‘친일’이냐로 나뉘어 재평가하는 일이 끊이지 않는다. 문재인정부는 사회주의 계열이더라도 항일투쟁에 적극 나섰던 독립운동가를 재조명하는 데 주력했다. 대표적 인물이 김원봉과 홍범도 장군이다. 반면 윤석열정부는 공산주의 세력과의 대결에 앞장선 이승만 전 대통령과 백선엽 장군을 재평가하는 작업을 추진 중이다. 전문가들은 정치권이 역사를 지지층 결집 등 정치적 수단으로 활용하면서 소모적인 이념 논쟁이 반복되고 있다고 지적한다.
국가보훈부와 한미연합사령부는 지난 4월 백선엽 장군을 ‘6·25전쟁 10대 영웅’ 중 한 명으로 선정했다. 백 장군은 6·25전쟁 당시 경북 칠곡 다부동전투에서 북한군 사단을 격멸하는 등 큰 공을 세웠지만 일제강점기 만주군 간도특설대에서 복무한 이력 때문에 ‘친일’ 논란에서 자유롭지 못했다. 간도특설대는 조선인 독립군 토벌대로 악명 높았던 부대다.
보훈부는 지난 7월 백 장군의 국립현충원 홈페이지 안장 기록에서 ‘친일반민족행위자’라는 문구를 삭제했다. 지난 5월에는 김관진 전 국방부 장관이 이사장을 맡은 백선엽장군기념재단이 보훈부 소관 비영리단체로 공식 설립됐고, 7월 백 장군 3주기에는 다부동전적기념관에 백 장군 동상이 세워졌다. 박민식 보훈부 장관은 한 인터뷰에서 “6·25전쟁은 우리 최대 국난이었고, (백 장군은) 국난을 극복한 최고 영웅”이라며 “가당치도 않은 친일파 프레임으로 공격하는 건 옳지 않다”고 주장했다.
현 정부 들어 재평가받는 다른 인물은 대한민국 초대 대통령 이승만이다. 보수 진영에선 이 전 대통령에게 독재와 부정선거 등 과오가 있더라도 독립운동과 정부수립, 한미상호방위조약 체결 등의 업적은 제대로 인정받아야 한다고 주장한다.
정부는 예산 460억원을 배정해 이승만기념관 설립을 적극 추진 중이다. 배정된 예산은 박정희, 김영삼, 노무현 전 대통령 기념시설에 지원했던 국비보다 큰 규모다. 보훈부는 서울시와 함께 부지 선정 등을 위한 사전조사 작업에 착수한 것으로 전해졌다. 윤석열 대통령은 지난달 독립유공자 및 유족과의 오찬 자리에서 이종찬 광복회장에게 “(이승만기념관 건립추진위원장인) 김황식 전 총리가 하는 일에 많이 관심을 가져주면 좋겠다”고 말한 것으로 알려졌다.
‘김원봉 서훈’ 추진 논란은 문재인정부 때 이념 논쟁을 빚은 사례다. 김원봉은 일제강점기에 의열단을 조직해 요인 암살 등 무장투쟁을 전개했고 광복군 부사령관, 임시정부 국무위원을 맡기도 했다. 그러나 광복 후 월북해 북한 정권 수립에 가담하고 고위직을 지냈다.
문재인 전 대통령은 2019년 현충일 추념사에서 “임시정부는 1941년 12월 10일 광복군을 앞세워 일제와의 전면전을 선포했다”며 “광복군에는 무정부주의 세력 한국청년전지공작대에 이어 약산 김원봉 선생이 이끌던 조선의용대가 편입, 마침내 민족의 독립운동 역량을 집결했다”고 김원봉의 공적을 강조했다. 당시 야당인 자유한국당은 “6·25전쟁에서 세운 공훈으로 북한의 훈장까지 받고 북의 노동상까지 지낸 김원봉이 졸지에 국군 창설의 뿌리, 한·미동맹 토대의 위치에 함께 오르게 됐다”며 “귀를 의심하게 하는 추념사”라고 비판했다.
2019년 3월 당시 국가보훈처 자문기구가 김원봉에 대한 독립유공자 포상을 권고한 것이 알려지면서 본격화된 서훈 논란은 문 전 대통령의 현충일 기념사로 더욱 격렬해졌다. 이에 청와대는 ‘북한 정권 수립에 기여하고 적극적으로 동조한 것으로 판단되면 포상에서 제외한다’는 규정을 들어 서훈이 불가능하다고 발표하며 진화에 나섰다. 최근 논란이 된 홍범도 장군도 문재인정부 때 부각된 인물이다. 문 전 대통령은 2021년 광복절에 ‘대통령 특별사절단’을 카자흐스탄에 파견해 홍 장군 유해를 국내로 모셔왔고, 이틀 후 청와대에서 홍 장군에게 최고 훈장인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을 수여했다.
홍 장군도 사회주의 계열 독립운동가였지만 김원봉 서훈 논란과 같은 이념 논쟁은 문재인정부 시절엔 벌어지지 않았다. 광복 이전에 세상을 떠나 북한 정권과의 연계성이 떨어졌기 때문이다. 최근 흉상 이전 논란과 관련해 여권에서도 홍 장군의 독립운동 성과는 존중한다는 입장이다. 다만 북한과 대치한 상황에서 홍 장군을 국군의 뿌리로 기리는 것은 적절치 않다고 주장한다.
정권이 교체될 때마다 특정 역사적 인물을 두고 진영 간 이념 갈등이 벌어지는 현상에 대해 전문가들은 우려했다. 박상병 정치평론가는 “격동기의 역사를 두고 정권마다 유리한 쪽으로 해석하면서 지지층 결집의 수단으로 삼고 있기 때문에 소모적 이념 논쟁이 반복되고 있다”며 “정권교체 후에는 또다시 직전 정부가 추진했던 것을 다 뒤집을 텐데 역사를 정치적 목적을 달성하기 위한 수단으로 활용해선 안 된다”고 강조했다.
조진만 덕성여대 교수는 “한국 현대사가 굴곡졌기 때문에 역사와 정치를 분리해서 생각하기 어렵고 민감한 부분이 있다”면서 “어느 일방이 단정할 수 있는 역사가 아니다”고 지적했다. 그러면서 “정치적 진영을 떠나 공과를 명확하게 판단할 수 있도록 충분히 논의하고 국민적 공감대를 형성할 수 있는 정치적 리더십이 절실하다”고 말했다.
정우진 박준상 기자 uzi@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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