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길원 목사의 고백록] 어머니는 염장이였다

2023. 9. 9. 03: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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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머니, 이만 가 볼게요." 몸을 일으키는데 어머니도 따라 일어선다.

거동이 자유롭지 못한 어머니는 집 안에서도 엉금엉금 다니신다.

혹여 어머니의 변(便)이나 토한 것에 인상 찌푸리지 않고 비위 상해 헛구역질도 하지 않을 수 있다면 그때 내가 진짜 목사일 거라 여겼다.

어머니는 염장이 출신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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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이패밀리 대표
동서대 석좌교수

“어머니, 이만 가 볼게요.” 몸을 일으키는데 어머니도 따라 일어선다. 거동이 자유롭지 못한 어머니는 집 안에서도 엉금엉금 다니신다. 그런데도 어머니는 막무가내다. “우리 아들 얼굴 좀 더 봐야제.” 결국 둘은 엘리베이터에 갇힌다. 할 말이 없다. 나를 물끄러미 쳐다보는 어머니를 바라보다 장난기가 발동했다. 어머니 젖가슴을 확 만졌다. 효자가 되고 싶었다. 김선굉 시인이 말하지 않았나.

“아우야, 니가 만약 효자가 될라카머/ 너거무이 볼 때마다 다짜고짜 안아뿌라/ 그라고 젖 만져뿌라, 그라머 효자된다/ 너거무이 기겁을 하며 화를 벌컥 내실끼다/ 다 큰기 와 이카노, 미쳤나, 카실끼다/ 그래도 확 만져뿌라, 그라머 효자된다”(‘효자가 될라카머’ 전문).

바로 이때다. 뚱땡이 어머니의 얼굴이 빨개지면서 두 손으로 가슴을 감싼다. “야야, 왜 이러는데….” 그때 알았다. 목계(木鷄) 같던 어머니도 천상 ‘여자였구나!’ 그날 밤 어머니 모습이 떠올라 잠을 잘 수 없었다. 한번은 찾아올 어머니와의 이별이 마음을 흔들었다. ‘저런 어머니를 어떤 남자의 손에다 맡기는 거지?’ 그럴 수는 없었다. 아니, 그러면 안 되었다. 나는 결심했다. 어머니가 지구별 소풍을 끝내는 날, 어머니 시신은 내 손으로 씻어 드려야겠다고.

핏덩이로 태어난 나를 씻어준 것은 어머니였다. 똥 기저귀도 얼굴 하나 찡그리지 않고 갈아 주셨다. 손주들이 싸 놓은 똥조차 이쁘다며 맨손으로 치우셨다. 보답하고 싶었다. 혹여 어머니의 변(便)이나 토한 것에 인상 찌푸리지 않고 비위 상해 헛구역질도 하지 않을 수 있다면 그때 내가 진짜 목사일 거라 여겼다. 내 신분을 스스로 증명해 보고 싶었다. 내 버킷리스트였다.

그날로부터 염(殮)의 고수인 이정삼 목사님을 찾았다. 이유도 밝히지 않은 채 염에 대해 묻고 또 물었다. 순전히 원격교육으로 개인 과외를 받았다. 비로소 내 꿈 하나가 현실로 다가왔다. 그런데 덜컥 코로나가 찾아오더니 ‘무염습 장례’를 내놓았다. 당혹스러웠다.

어머니는 염장이 출신이었다. 아버지가 시골 학교 교장으로 재직하실 때 어머니는 교회 권사였다. 교회에서만큼은 두 분의 위치가 늘 바뀌었다. 날라리 무집사와 권사는 하늘과 땅 차이였다. 교회에 새로운 교역자가 부임하는 날이었다. 하필이면 이날 장례가 났다. 트럭을 몰고 와 막 이삿짐을 풀려는 찰나, 전도사에게 상(喪)이 났다고 전했더니 전도사는 고민도 없이 차를 돌려 내뺐다. 염습(斂襲)을 할 자신이 없었던 거다. 교회는 난리가 났다. 장례는 치러야 하고 결국 겁 없는 어머니가 팔을 걷어붙이셨다. 그 무섭고 엄청난 일을 해내셨다. 교회는 감동의 도가니였다.

이날로 동네 장례란 장례는 모조리 불려 다녔다. 그것도 돈 한 푼 받지 않았으니 오죽했겠는가. 동네 사람들은 손뼉 치며 좋아했지만, 자식들인 우리는 괴롭기 그지없었다. 위생장갑도, 마스크도 끼지 않은 채 시체를 매만진 손으로 나물을 무쳐 내놓는 저녁 밥상이 어떠했겠는가. 어느 날 어머니에게 조심스레 물었다. “뭐가 좋다고 그 험한 일을 하셨어요?” 어머니는 말했다. “내가 공부를 제대로 했냐? 뭘 했냐? 몸이라도 써서 한 사람이라도 전도해 보고 싶었던 거지.” 나는 울었다. 나야말로 ‘날라리’ ‘짝퉁’ 목사였구나.

어머니에게 전화했다. 나는 숨을 고르며 “요새 무염습 장례가 생겼다는데… 그때는….” 말이 끝나기도 전, 어머니는 단칼에 정리하신다. “그때는 냉장고는커녕 선풍기도 없었다. 시신은 썩어가지. 냄새는 진동하지. 산 사람 살아보자고 향도 피웠던 거지. 왜 사람을 꽁꽁 묶어 죄수 만드냐. 나는 (그 짓) 하지 마라.”

베테랑 염장이의 훈수에 나는 또 한 번 KO패 당했다. 어머니의 이 유전자가 나를 임종 감독으로 끌어냈다. 나는 요즘 ‘사후(死後) 메이크업’으로 어머니의 길을 걷고 있다. 이제야 목사가 되어가는 중이다. 아주 느리게.

픽사베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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