美서 논란 된 ‘빈곤 시뮬레이션’…공감일까, 모욕일까?
“빈곤, 개인 문제 아니라 사회 문제임을 인식하자는 것”
미국 일리노이주 시카고 교외의 하이랜드파크 당국이 ‘빈곤 시뮬레이션 행사(Poverty Simulation Event)’를 열기로 해 논란이 일고 있다. 빈곤층에 대한 모욕이라는 반응이 즉각적으로 쏟아졌다. 이에 맞서 빈곤을 이해하기 위해 수십 년 동안 시행하며 공신력을 쌓아온 프로그램이라는 반박도 나온다.
논란은 미국 하이랜드파크 당국의 SNS에서 시작됐다. 당국은 오는 9일(현지시간) ‘빈곤 시뮬레이션 행사’를 개최한다며 “레이크 카운티 주민들은 몰입하는 경험을 통해 ‘빈곤한 한 달’이 어떤 느낌인지 체험할 수 있다”고 소개했다. 그러면서 “자원이 충분하지 않은 참가자는 자신과 가족에게 부정적인 영향을 미칠 수 있는 선택을 강요당하게 될 것”이라고 적었다. 빈곤에 대한 이해와 인식을 높여 빈곤층 지원의 필요성에 대한 사회적 합의를 증진할 수 있다는 취지였다.
그러나 미국 누리꾼들 사이에선 부정적인 반응이 빗발쳤다. 특히 하이랜드파크가 시카고의 대표적인 부촌인 데다 프로그램이 골프장에서 열린다는 사실이 알려지면서 성난 여론에 기름을 부었다. 온라인에선 “빈곤은 시뮬레이션이 아니다. 현실이다” “실제로 가난한 사람들에 대해 모욕적인 표현이다” “빈곤층을 돕고 싶다면 식량, 학용품, 의료비 등을 제공하기 위한 기금을 모금해라” 등의 반응이 쏟아졌다.
외신 소식을 접한 국내 온라인 커뮤니티에서도 “부자들이 가난마저 훔치는 꼴” “가난이 뺏기다 뺏기다 못해 상품화됐다” “빈곤을 탈부착 가능한 패션스타일로 정도로 취급하니까 반발을 사는 것”이라는 등의 반응이 이어졌다.
빈곤 시뮬레이션은 저소득 가정의 한 달 생활을 경험해볼 수 있도록 설계된 2~3시간 체험형 워크숍을 말한다. 참여자와 자원봉사자는 미국 기준 26가지 유형의 저소득 가정과 15가지 유형의 정부·민간 단체 등의 역할을 나눠 맡는다. 지역 사회의 저소득층 여건과 실제 보건 복지 제도 등을 프로그램에 반영하고 있는 것이 특징이다.
한국 실정에 맞게 적용해보면, 참여자는 2~3시간 동안 한부모 가정, 1인 청년 가구, 빈곤 노인 가구 등 역할을 정한 뒤 워크숍을 시작한다. 제한적인 자원을 토대로 생필품을 구매하고, 공과금을 내는 등 일상이 시작된다. 프로그램 중간에 실직, 병 간호, 절도 피해, 건강 이상 등 예상치 못한 상황이 주어지기도 한다. 참여자는 이 과정에서 주민센터, 데이케어 돌봄센터, 대부 업체 등 지역 사회 자원을 활용하는 경험을 하게 된다. 현실 제도를 그대로 적용하고 있기 때문에 실제 저소득층이 마주하는 한계도 직면할 수밖에 없다. 시뮬레이션을 마치고 나면 참여자들이 모여 느낀 점과 제도적인 개선 방안 등을 논의한다. 지역 사회 시민은 물론, 전공 학생, 활동가, 정치인 등 다양한 주체가 참여할 수 있다.
한국에선 시민단체 ‘복지세상을 열어가는 시민모임’이 2015년 6월 크라우드펀딩을 통해 후원자 105명으로부터 모금액 234만5000원을 확보해 국내 최초로 도입해 운영하고 있다. 이 빈곤 시뮬레이션은 여러 활동가와 각계 전문가의 의견을 거쳐 한국 사회에 맞게 개정됐다.
미국의 복지개혁기구(ROWEL)가 1970년대 개발한 ‘키트’가 시초이고, 이후 저작권을 구매한 ‘커뮤니티액션을 위한 미주리협회(MACA)’가 사회적 변화에 맞추어 개정한 것이 지금까지 이어졌다. MACA는 “빈곤은 누군가에게 현실이지만, 경험하지 않는다면 참된 이해가 어렵다”며 “빈곤에 대한 오해와 이해의 간극을 좁힐 수 있다”고 개발 취지를 밝혔다. 이어 “빈곤 시뮬레이션은 실제 삶에 기반을 두고 있다. 결코 게임이 아니다”고 강조했다.
이선영 복지세상 사무국장은 프로그램의 효용에 대해 “빈곤은 개인의 탓이 아니라 사회 구조적인 산물이라는 것을 경험하게 된다”며 “빈곤한 상황에 부닥쳤을 때 국가의 어떤 지원이 필요하고 어떤 식으로 어려움을 해소할 수 있는지 미리 체험해보면서 빈곤이 개인의 문제가 아니라 우리의 문제라는 것을 알 수 있다”고 설명했다.
그동안 한국에서도 ‘빈곤 체험’이 논란이 된 사례가 적지 않다. 주로 유사한 활동이 ‘빈곤’을 목적이 아닌 수단으로 이용한다는 이유로 숱한 비판을 받아왔다. 2017년 6월 ‘대학생 쪽방촌 체험’을 기획한 서울 중구청(당시 최창식 전 구청장)은 “스펙쌓기용”이라는 비판이 쏟아지면서 사업을 취소했다. 박원순 전 서울시장도 ‘강남·북 균형 발전’을 취지로 2018년 7월 강북구의 한 옥탑방에서 한 달 살이를 했는데 이를 두고 일각에선 정치적인 선전에 가난을 이용한다는 비판을 내놓기도 했다.
하지만 빈곤 시뮬레이션은 빈곤을 수단화하는 것과 전혀 다르다는 견해도 있다. 한국판 ‘빈곤 시뮬레이션’의 자문을 맡았던 장동호 남서울대 사회복지학과 교수는 “빈부격차가 극심한 미국 사회에선 (프로그램이) 중산층과 대학생 등 빈곤을 경험하지 못하는 사람들을 주 대상으로 한다”며 “실제 빈곤과 지역 사회 자원을 구현하고 있기 때문에 기존에 존재하는 빈곤에 대한 간접 체험 중에선 짧지만 대단히 효과적인 방법”이라고 말했다.
이어 “참여자들은 무언가를 선택하고 포기해야 하는 상황에 직면하면서 감정 이입을 하고 가난에 대해 이해하게 된다”며 “가난은 하루 굶는 문제가 아니다. 부양 의무자, 실업, 월세, 채무 등의 문제를 마주하다 보면, 빈곤의 원인이 오롯이 개인이 아니라 사회에 있다는 점도 깨닫게 된다”고 설명했다.
이정헌 기자 hlee@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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