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시경제학 토대를 마련한 ‘최후의 고전’은? [홍기훈의 ‘세계를 바꾼 경제학 고전’] (13)
책의 저자인 존 리처드 힉스는 옥스퍼드대 베일리얼 칼리지에서 수학을 전공하면서 학업을 시작했다. 이후 전공을 철학·정치학·경제학 과정으로 바꿔 1926년 졸업했다. 공부를 마치고 LSE(런던 정치경제대학), 케임브리지대, 맨체스터대에서 강의를 한 후 1946년 옥스퍼드대로 돌아왔다. 1989년 사망할 때까지 옥스퍼드대에서 일했다. 그는 일반균형이론과 후생경제학에 대한 기여를 인정받아 1972년 케네스 애로와 함께 노벨 경제학상을 수상했다. 노벨상으로 받은 상금을 첫 직장이었던 LSE의 도서관에 기부했다고 한다. 1964년 힉스는 기사 작위를 받았다.
힉스는 크게 네 가지 측면에서 경제학에 기여했다. 첫째, 미시경제학에 대체탄력성 개념을 도입했다. 힉스는 대체탄력성이라는 개념을 통해 노동 효율을 향상시키는 기술의 진보가 국민 소득 중 노동자 몫을 줄이지 않을 수 있음을 보여줬다. 결과적으로 기술 진보가 노동자 권익을 줄일 것이라는 마르크스의 주장을 반박했다. 둘째, 거시경제학에 이자율과 국민 소득 관계를 분석하는 IS-LM 모델을 개발했다. 힉스는 정책적 효과를 단순화해 시각적(그래프)으로 보여주면서 경제학을 쉽게 이해할 수 있게 도와줬다. 셋째, 일반균형이론을 발전시켰다. 그가 1939년에 발간한 책 ‘가치와 자본’은 일반균형이론 발전에 중요한 기여를 했다. 넷째, 후생경제학에 대한 공헌이다. 힉스는 경제적 효과와 효용이 다른 여러 선택지 가운데 경제 참여자와 정부가 어떤 선택을 해야 하는지를 분석·도출할 수 있는 보상 기준(Compensation Test)을 고안했다. 이를 힉스의 보상 기준이라고 부른다.
19세기 말, 알프레드 마샬은 영국 케임브리지대에서 미시경제학 분야를 창시하며 한계효용 개념을 도입했다. 이를 시작으로 영국 경제학이 크게 발전했다. 마샬의 후계자라고 볼 수 있는 피구, 케인스, 로버트슨 등 케임브리지학파 학자들이 그 중심에 있었다. 동시에 유럽 여러 국가에서도 경제학의 진전이 이뤄졌다. 스위스 발라는 일반균형이론을 발전시켰다. 이탈리아 파레토는 일반균형이론과 무차별곡선을, 오스트리아 뵘바베르크는 자본이론을, 스웨덴 빅셀과 린달은 각각 자본축적과 가격결정이론을 정교하게 만들었다. 경제학 연구와 발전은 유럽 전체에서 동시에 일어났다.
당시 학계는 언어 장벽과 통신의 한계로 인해 미시경제학 발전이 각 지역에서 독립적으로 이뤄졌다. 힉스는 교육의 도움을 받아 다양한 언어와 문화에 대한 통찰력을 갖출 수 있었다. 힉스는 어린 시절, 누나 필리스와 여동생 메리와 함께 역사와 문학에 몰두했다. 그의 어머니는 그에게 단테의 작품과 라틴어를 소개했다. 갈고닦은 라틴어 지식은 힉스가 이탈리아어 문헌에 접근할 수 있게 만들었다. 옥스퍼드대에서는 독일어와 프랑스어를 익혔다. 다양한 언어 능력 덕분에 여러 국가의 경제학 연구를 직접 그리고 용이하게 이해하고 분석할 수 있었다.
영국에서 활동하던 힉스는 유럽 전역 미시경제학 발전을 포괄적으로 파악했다. 그 지식을 기반으로 새로운 경제학 체계를 구축하기 위해 노력했다. 이 같은 노력의 결과로 탄생한 것이 바로 ‘가치와 자본’이라는 저작이다.
‘가치와 자본’은 미시경제학 주요 이론을 개척한 선구적인 책이기 때문에 현대 경제학 기본 교육 과정에서는 책의 주요 내용을 꼼꼼하게 다루고 있다. 경제학도들은 경제학 수업에서 책의 내용을 파악한다. 그러나 경제학에 대한 깊은 관심이 없는 이들에게까지 이 책을 정독하라고 추천하기는 힘들다. 깊은 이론적 내용을 담고 있어 일반 독자는 읽기가 어려울 수 있다. 그보다는 이 책이 경제학계에 어떤 공헌을 했는지, 그리고 그 중요성에 대한 이해를 갖는 것이 더 중요하다.
‘가치와 자본’은 총 4개 부분과 19장으로 구성됐다. 마지막에는 수학적 부록을 추가로 수록했다. 부록에서는 소득 효과와 대체 효과를 구분하는 수학적 기법을 소개한다. 힉스가 책에 수학적 부록을 추가한 것은 경제학 연구에 있어 수학이 점점 더 중요한 도구로 자리 잡게 됐음을 보여주기에 주목할 만하다.
책은 먼저 경제학자들이 주관적으로 인식하는 가치 개념을 탐구한다. 가치의 논의는 특정 시장에 국한되는 것이 아니다. 모든 시장에서 수요와 공급이 균형을 이루는 일반적인 상황을 설명하는 방향으로 확장해나간다. 이후, 경제 내부 동적 변화와 그것이 주는 영향에 대해 분석한다. 간단히 말하면, 시장의 균형 상태와 그 균형을 유지하거나 변화시키는 다양한 요소에 대한 이론적 접근을 중점적으로 다룬다. 책은 단순한 예제를 통해 독자 이해를 도모한 후, 그것을 보다 일반화해 학문적인 이론으로 발전시키는 방식을 취한다.
책은 도입부에서 이 같은 질문을 던진다.
“만약 소비자가 시장에서 단지 두 가지 상품만을 선택할 수 있다면 각 상품의 수요량은 어떻게 결정될까?”
예를 들어 소비자가 고기와 채소를 구매할 수 있다고 하자. 아무런 경제적 조건이 변화하지 않은 상태에서(Ceteris Paribus) 채소 가격이 오른다면, 상대적으로 비싸지는 채소 수요는 감소할 것이다. 반면 상대적으로 저렴해지는 고기 수요는 증가할 것이다. 이것이 대체 효과(Substitution Effect)다. 동시에 채소 가격이 올랐기 때문에 소비자가 실제 구매할 수 있는 상품의 총량은 감소했다. 이는 소비자의 실질소득이 감소했음을 의미한다. 소득이 줄었기에 소비자는 채소와 고기 모두 적게 구매할 것이다. 이를 소득 효과(Income Effect)라고 한다.
힉스는 ‘가치와 자본’에서 소득 효과와 대체 효과를 명확하게 나눌 수 있는 이론적 토대를 제공했다. 당시 이런 분석은 소비자 이론에 있어 혁신이었다.
후대에 미친 영향
책이 미친 가장 큰 영향은 우리가 현재 배우는 미시경제학의 이론적 틀을 체계화했다는 것이다. 경제학에서 ‘소비자잉여’라는 개념은 마샬로부터 시작된 개념이지만 소비자선택이론의 체계 안에서 소비자잉여의 존재 조건을 도출해낸 것이 바로 힉스의 책이다. 그뿐 아니라 대체재와 보완재의 개념 그리고 그 효과를 분석해낸 것도 이 책의 공헌이다.
마샬과 케인스로부터 시작한 한계적 개념에 기반한 경제학을 바탕으로 삼고 로잔학파의 일반균형이론과 오스트리아학파의 이론적 발전, 그리고 빅셀, 뮈르달, 린달로 이어지는 북구학파의 경제학을 흡수해 오늘날 미시경제학의 전체적인 틀을 완성했다.
현대 경제학도들이 ‘가치와 자본’을 직접 읽지는 않지만, 학부에서 듣는 첫 미시경제학 수업에서 우리는 이 책의 내용을 마주하게 된다. 대학에서만이 아니다. 수능, 논술, 노무사, 회계사 등 수많은 시험에서도 우리는 책의 내용을 맞닥뜨린다. 노벨 경제학상 수상자이자 미국의 저명한 경제학자인 폴 새뮤얼슨은 힉스의 ‘가치와 자본’을 두고 “경제학계의 마지막 고전”이라고 평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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