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금 계좌의 사망’…먼 미래 얘기 아니다 [Deloitte 금융 인사이트]
지난 6월 말 기준 5대 시중은행 요구불예금 잔액은 무려 624조원에 달했다. 요구불예금은 ‘협소의 통화 공급량’으로 간주된다. 그런데 은행 자금 조달 비용을 낮추는 효자 역할을 하는 이런 요구불예금이 사라질 수도 있다.
세계경제포럼(WEF)과 딜로이트가 지난 2018년 제시한 ‘금융 서비스의 새로운 물리학(The New Physics of Financial Services)’ 보고서는 인공지능(AI)의 발전이 금융 서비스 미래에 어떤 영향을 미칠 것인지 다양한 시나리오를 제시했는데, 가장 먼저 ‘예금 계좌 사망(Death of deposit accounts)’을 말했다.
요구불예금은 예금주 입장에서는 ‘대기성 자금’이다. 은행 입장에서는 고객이 원하면 언제든 지급해야 하는 예금이다. 가입 대상, 예치 금액, 예치 기간, 입출금 등에 제한이 없는 보통예금이 대표적이다. 보통예금 계좌는 고객의 의사 결정에 따라 채무 상환, 저축과 자산관리 금융상품 투자, 일상적인 비용 지급 처리 업무 등을 수행하게 된다.
하지만 미래에는 ‘AI 자산 관리’ 기능을 통해 사전에 설정한 의사 결정 방식으로 자동적으로 계좌 현금흐름을 최적으로 분배하는 것이 가능해진다. 그 결과, 고객 재무건전성이 급격히 개선되고, 서비스 경험은 더 이상 예금 계좌 관리가 아닌 ‘재무 관리 플랫폼’을 중심으로 이동할 것으로 예상된다. AI 기술이 발달하며 은행과 고객의 상호작용이나 관련 업무가 줄어들고, 나아가 기존 지급 결제, 대출, 자산 관리 등 금융 서비스의 경계가 허물어질 것이라고 예상했다. 또한 끊김 없이 최적의 현금흐름이 발생하기 때문에 은행 대차대조표상 유동성이 자본 시장으로 이동하고, 은행 조달비용은 올라갈 것이다. 금융 규제 또한 현재의 유동성과 레버리지 관리 중심에서 새로운 미래 금융 모델에 맞게 변화할 듯 보인다.
이는 먼 미래의 이야기가 아니다. 이미 ‘혁신금융 서비스’ 지정을 통해 비대면 창구나 예금·대출 상품 비교 플랫폼은 합법적인 서비스가 됐다. 금융 소비자의 의사 결정과 현금흐름 자동 지정이 허용된다면 조만간 앞서 제시한 시나리오는 현실이 된다.
AI는 은행권 생태계를 바꿨다. 디지털 기술 기반 제휴 대상이 확대됐고, 은행 프로세스 자동화 솔루션이나 데이터 수집 업체 등 디지털 협업이 가능한 파트너가 등장하면서 산업 범위가 넓어졌다. 핀테크 기업과 금융업 진출을 확대하는 빅테크 기업 등 신규 진입자로 금융업 내 경쟁이 촉진됐다. 마이데이터 시행으로 고객 정보 주도권이 은행에서 정보 주체인 소비자로 옮겨 감에 따라 고객 데이터에 대한 독점력도 약화됐다. 모바일 대중화로 고객 결정은 빨라지고 예측이 어려운 상황이다. 바야흐로 은행업 본질에 대한 근본적인 변화가 나타났다.
새로운 생태계에서 어떤 위치를 선점하느냐가 은행 경쟁력의 관건이다. 은행은 AI 도입으로 대응하고 있다. 과거에 비해 약해진 고객 충성도를 높이고 플랫폼 기반 고객 경험을 혁신하는 중이다. 국내 은행권은 고객 접점 관리 고도화, 업무 자동화, 규제 준수 분야에서 AI를 적극적으로 도입하고 있다.
반복되는 업무…AI로 자동화
은행은 고객 충성도 유지를 위해 초개인화된 서비스 제공에 공을 들인다. 국내 은행들은 이미 AI를 활용한 챗봇과 AI 은행원, 로보어드바이저 등을 통해 고객 접점 관리의 고도화를 꾀하고 있다. 또한 비대면 거래 비중 증가에 따른 지점 감소에 대응하기 위해 AI 도입은 계속해서 확대될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챗봇은 사람만큼 커뮤니케이션이 원활하지 않다. 이 때문에 챗봇 서비스에 대한 불만도 크다. 이를 간과해서는 안 된다. 지난 7월 세일즈포스가 전 세계 금융 서비스 고객을 대상으로 진행한 서베이를 바탕으로 한 ‘금융 서비스 현황 보고서’에 따르면, 금융 고객 중 29%는 가장 불편하게 느끼는 디지털 경험 요소로 ‘AI 챗봇 서비스’를 꼽았다. 고객 경험 측면에서 무조건적인 비대면 전환보다는 고객 대응 업무 중 인간의 직접적 개입이 필요하다. AI를 활용한 인력 대체가 가능한 부분에 대한 비용과 효익을 고려한 전략도 중요하다.
은행 지점 수를 축소하는 추세와 반대로 신규 지점을 확대한 미국의 제이피모건체이스은행(JPMorgan Chase Bank) 사례가 주목되는 이유다. 제니퍼 핍스작 제이피모건체이스은행 소매금융부문 공동 CEO는 “지점과 사랑에 빠졌다”면서 특정 지역에 편중된 지점망을 넓혀 예금 기준 미국 내 소매은행 업계 1위를 차지했다. 아울러 고객 의도와 감정까지 파악해 기존 AI 대비 자연스럽게 커뮤니케이션할 수 있는 생성형 AI 적용을 검토할 때가 왔다.
은행권은 또한 반복되는 노동집약적 업무의 효율적 운영을 위해서도 AI를 적극 도입한다. 금융 상품 수가 증가하고 시스템이 복잡해져 업무 부담이 가중됨에 따라, 은행은 머신러닝을 활용해 업무 운영과 관련된 작업을 자동화한다. 국내 시중은행들은 로봇 프로세스 자동화(RPA·Robotic Process Automation)로 단순 반복 업무를 자동화하고 있다. 대출 심사부터 사후 관리까지 AI를 적극적으로 활용하며 부실 대출이 감소하고 자산건전성이 좋아졌다.
AI로 업무를 자동화하기 전 현행 업무 프로세스가 AI 도입에 적합한지부터 파악해야 한다. 데이터가 적절히 변환됐는지, 클라우드 시스템이 갖춰져 있는지 등 종합적인 검토가 필요하다.
AI를 활용하는 직원에 대한 전문적인 교육도 선행돼야 한다. AI가 사람 업무를 대체한다지만, AI 시스템을 구현하고 최종적으로 검토하는 책임은 사람에게 있다. AI 모델에 대한 검증도 필요하다. 2023년 4월 금융위원회가 ‘AI 기반 신용평가모형 검증 체계’를 도입하며 AI 신용평가모델의 알고리즘과 변수의 합리성을 점검하겠다고 밝혔다. 앞으로 계속될 규제당국의 AI 모델 검증 체계 도입에 대응하기 위해서는 활용하려는 AI 모델과 데이터 품질에 대한 정교한 분석이 필요하다.
금융권에서 주목받는 ‘레그테크’
이상 거래 탐지·자금 세탁 방지 활용
금융업의 근간인 신뢰 제고와 규제에 대한 대응으로 ‘레그테크(Reg Tech·Regulation과 Technology의 합성어)’가 주목받는다. 은행의 규제 준수와 리스크 탐지와 관련된 분야인 이상 거래 탐지 시스템과 자금 세탁 방지 시스템이 해당된다. 레그테크는 AI 기술 발전과 함께 급성장하는 영역이다. 갈수록 복잡해지는 금융 시장에서 방대한 거래량을 소화하고 데이터를 분석해 이상 거래를 포착·분석하는 일은 숙련된 전문가에게도 어렵다.
은행권은 AI·빅데이터 기술 등을 활용, 인적 오류가 발생하기 쉬운 업무를 빠르고, 정확하고, 효율적으로 진행할 수 있도록 보조한다. 계속 이슈가 되는 내부통제 시스템에도 AI 활용이 활발하다. 2022년 11월 금융감독원이 ‘국내 은행 내부통제 혁신 방안’을 발표함에 따라 내부통제에 대한 금융권 책임감이 커졌다. 금융당국은 금융사 CEO 내부통제 책임 범위를 명확히 하는 개정안을 추진하는 등 내부통제 책임 강화에 나섰다. 이에 따라 업계는 내부통제 사전 예방에 중점을 두고 관련 시스템 개발에 나섰다. 은행권은 앞으로 복잡해지는 금융 시스템에 따른 규제 신설, 새로운 유형의 거래 등장 등 금융 환경 변화를 감안해 레그테크 시스템의 고도화 방안을 강구할 필요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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