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스 환자 때문에... 파업에 나선 의사들에게 건넨 한 마디
[김형욱 기자]
▲ 넷플릭스 오리지널 영화 <역병> 포스터. |
ⓒ 넷플릭스 |
2003년 타이베이 연합병원, 흉부외과 샤정은 딸의 생일을 맞이해 아내와 딸을 만나러 급하게 나선다. 하지만 그에게 할당된 근무시간을 한참이나 남겨놓은 이른 시간이었다. 택시도 아무거나 타더니 근무가 끝난 기사를 닦달한다. 막무가내 성격인 듯. 하지만 멀리 가지 못해 병원에 응급 환자가 실려오니 돌아갈 수밖에 없었다. 의사의 일을 위대하다고 생각하는 택시기사는 샤에게 전해 줄 게 있다며 병원으로 따라온다.
응급수술을 마치고 집에 가려던 샤, 타이베이 연합 병원에 사스 의심 환자가 발생했다는 소식을 듣는다. 곧이어 병원은 봉쇄된다. 의사와 간호사 등 병원 관계자들, 환자들, 방문객들 등 누구도 이 상황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했다. 이른바 집단 패닉 상태. 시간이 지나 윗선에서 지시가 내려오길 사스 환자 또는 사스 의심자는 B동에 격리시키고 의사와 간호사들을 파견하라고 한다.
시키는 대로 할 수밖에 없는 와중에 일련의 의사와 간호사들이 파업을 개시한다. 목숨 걸면서까지 사스 환자를 돌볼 수 없다는 것이었다. 일면 이해가 가는 행동. 반면 묵묵하게 맡은 바 일을 해나가는 이들도 있다. 한편 봉쇄된 병원에는 기자 한 명도 잠입해 있다. 진실을 파헤치고자 말이다. 그런가 하면 국경없는의사회에 가고 싶어 하는 간호사 타이허는 몸이 이상하다는 걸 느낀다. 이들은 무사히 병원 문 밖을 나설 수 있을까?
사스 때문에 병원에 갇힌 사람들
중증급성호흡기증후군, 일명 '사스'는 2002년 중국에서 처음 발견되어 2003년 전 세계를 휩쓸었다. 이후 오래지 않아 2004년 7월에 공식적으로 종식되었다. 현재 7억 명 가까이 확진되어 700만 명 가까이 사망한 역대급 팬데믹 '코로나19'를 최근에 겪은 만큼, 8천여 명이 확진되어 800여 명이 사망한 '사스'를 별 것 아닌 것처럼 생각할 수도 있겠다. 하지만 20여 년 전 당시는 지금보다 여러 면에서 뒤떨어질 수밖에 없기도 하고 일찍이 대규모 감염병을 겪어보지 못했을 테니 대응하기가 힘들었을 것이다.
넷플릭스 오리지널 대만 영화 <역병>은 사스가 한창 맹위를 떨쳤던 2003년의 봉쇄된 타이베이 연합병원을 배경으로 졸지에 갇혀 버린 이들의 이야기를 담았다. 감염이 되는 사스 환자가 병원에 있다니 안팎으로 충격이었을 것이다. 소란도 소란이지만 마스크도 빠르게 쓰지 않을 정도로 사스에 대해 잘 몰랐던 이들이 사스 환자를 어떻게 돌보며 치료할지가 주요 골지이자 난제였다.
영화는 봉쇄된 병원에 갇힌 이들 중 주요 세 조합을 비춰 극한의 상황에 처한 인간군상을 내보이려 한다. 병원 관계자도 아니고 의학적 지식도 전혀 없지만, 앓아누운 수간호사의 딸이 방황하고 있을 때 알아채 보살피는 택시기사. 국경없는의사회에 지원하려는 간호사 타이허와 그의 연인 의사 리싱옌은 환자를 돌보는 한편 파업 중인 이들에게 호소한다. 흉부외과 의사 샤정은 기사로 자신에게 큰 타격을 입힌 신문기자와 사스 환자에 관한 진실을 파헤치려 한다.
▲ 넷플릭스 오리지널 영화 <역병> 스틸 이미지 |
ⓒ 넷플릭스 |
미증유의 공포에 맞닥뜨리면 어떻게 생각하고 행동하는지 지금의 우리는 안다. 의심하고 움츠러들고 소통하려 하지 않으며 콕 틀어박혀 밖으로 나오려 하지 않는다. 자신의 안위만 생각하며 안전하다고 생각하는 곳으로 들어가는 것이다. 잘못된 게 아니다. 어찌 보면 지극히 당연한, 본능에 의한 행동이다. <역병>의 주요 인물들이 보이는 인간군상 양상을 봐도 비슷하다.
물론 영화라서 자못 정의로운 인물도 등장한다. 한없는 선량함으로 자신의 안위는 크게 상관하지 않은 채 홀로 방황하는 아이를 돌보려는 택시기사가 대표적이다. 심지어 그는 근무 시간이 지나 어쩌다 보니 병원에 들어왔고 곧이어 봉쇄되었는데도 말이다. 그럼에도 불평 한마디 없고 불안한 기색이 없다. 스스로에게 또 타인에게 피해를 전혀 끼치지 않는다.
그런가 하면 간호사 타이허의 연인 의사 리싱옌은 사스 환자로 병원이 봉쇄되었어도 아랑곳하지 않고 평소 하던 일을 이어간다. 택시기사처럼 사태를 크게 대수롭지 않게 여기고 있다. 한편 목숨 걸고 사스 환자를 돌볼 수는 없다며 파업에 들어간 일련의 의사와 간호사들에게 호되게 질책한다. 임무를 저버리지 말라고, 환자들을 배신하지 말라고, 맡은 일을 하라고 말이다.
잠입해 있는 기자는 의외의 말을 건넨다. 샤정이 말하길 왜 들어와 있냐고 사스가 의심되지 않으면 당장이라도 나갈 수 있다고 하니, 기자로서 해야 할 일을 하는 것뿐이라고 답한다. 진실을 은폐하려는 병원 윗선의 계략(?)을 파헤치려면 나갈 수 없다고 말이다. 정의롭다기보다 평소와 다를 바 없이 생각하며 평소와 다른 행동을 보이지 않을 뿐인 것 같다. 그들은 평소에도 선량하고 단단했고 유사시에도 선량하고 단단하다.
큰 사건에 맞닥뜨린 대처와 심리
의사 샤정은 오랫동안 보지 못한 딸의 생일을 챙겨주지 못한 데에서 이미 치를 떨었다. 늦게나마 응급환자를 수술하고 가려는데 사스 환자 때문에 병원이 봉쇄된다고 하니 또다시 치를 떤다. 그러니 환자를 생각하는 마음이 남아 있기나 할까. 그는 환자를 치료하는 의사가 아니라 직업인으로서의 의사일 뿐이다. 그런 가운데 극한의 상황에서도 할 일을 하는 기자와 함께 있으며 뭔가 달라졌을까? 그래서 사스 환자 치료에 매진할까?
국경없는의사회에 소속되는 걸 꿈꾸는 타이허는 평소엔 환자를 위하는 훌륭한 간호사다. 환자를 나 몰라라 하기 일쑤인 샤정을 다그치기도 한다. 그런데 유사시가 되니 얼이 빠진다. 샤정처럼 회피하진 않지만 리싱옌처럼 적극적으로 나서서 독려하고 환자 돌봄에 매진하지도 못한다. 상황에 매몰되어 제대로 대처하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그는 언제 어떤 계기로 정신을 차릴까?
영화는 전체적으로 드라마틱한 전개 없이 평이하다. 초반부터 사스 발생이라는 큰 사건과 함께하기에 또 다른 사건은 의미가 없을 것이다. 하여 크나큰 사건에 맞닥뜨린 인간들의 다양한 대처와 심리를 들여다보는 방향을 택했을 테다. 대만 영화 특유의 묵직함과 진정성이 엿보이는 수작으로, 평이하지만 결코 지루하지 않다. 오히려 잔잔한 긴장감이 서려 있어 재밌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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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김형욱 시민기자의 개인 블로그 singenv.tistory.com에도 실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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