땡전뉴스 연상시키는 '대통령 해외순방' 공문

김행수 2023. 9. 8. 12: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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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교 공문함에 '대통령 해외순방 중 공직기강 철저' 올해만 다섯번째...이게 필요한 일인가

[김행수 기자]

2023년 9월 6일 "대통령"으로 시작하는 공문이 학교 공문함에 '전체 공람'으로 게시됐다. 

한창 교사들의 교권 보장 목소리가 전국에 메아리치던, 특히 9·4 공교육 멈춤의 날 직후라 "대통령"이라는 세 글자로 시작하는 공문이 학교에 내려온 순간 '혹시나 대통령께서 교권 보장에 대한 특단의 결심을 하셨나?'하는 궁금증에 제목을 제대로 확인도 하지 않고 공문을 열어보았다.

"대통령"으로 시작하는 공문, 열어보니 
  
 윤석열 대통령의 해외 순방 때마다 학교에 내려오는 공문. 대통령이 해외 순방한다고 왜 학교에 공문을 내려야 하고, 교사들은 왜 이걸 공람이라고 모두 읽어야 하는지 모르겠다.
ⓒ 교육청 공문 캡쳐
 
그런데 '대통령 해외순방 중 공무원 공직기강 확립 및 근무 철저'가 공문 제목이었고, 내용은 '대통령 순방(인도네시아·인도, 9.5.~9.11.) 중 안정적이고 원활한 국정 운영을 위하여 아래와 같이 유의사항을 알려 드리니, 우리 교육청 소속 공무원의 공직기강 해이 사례가 발생하지 않도록 자체 복무 관리를 강화하여 주시기 바랍니다'라고 기재되어 있다.

그리고 박스 안에 "공직자로서의 품위 및 청렴 의무를 손상시키는 행위 금지, 비상연락체계 정비·유지, 각종 안전사고 예방 조치, 출입 관리 및 보안관리 강화, 근무시간 준수 및 당직 근무 철저"를 명시하고 "끝."이었다.

혹시나 하는 기대감으로 대통령 공문을 열었지만 이내 역시나 하는 실망감으로 공문을 닫았다. 이런 공문을 왜 내려보내는지 이해할 수가 없다. 전체 공문함을 찾아보니 올해에만 벌써 5번째이다. 2023-09-06, 2023-07-11, 2023-06-19, 2023-04-24, 2023-03-16.
   
 올해에만 벌써 5번째 같은 내용의 대통령 해외 순방 공문이 왔다. 날짜와 장소만 달라진 이런 공문을 대통령이 해외 순방을 갈 때마다 학교로 보내야 하는 이유를 모르겠다. 이런 공문이 교사를 힘들게 하는 교권 침해라는 주장에 귀 기울여야 한다.
ⓒ 교육청 공문
윤석열 대통령이 해외 순방을 나갈 때마다 이렇게 똑같은 내용의 공문이 학교로 내려온다. 제목도 내용도 똑같다. 단지 코로나 비상사태가 해제되면서 '기본 방역 수칙 철저 준수'라는 내용이 빠졌고 대통령의 해외 순방 날짜와 순방 국가의 이름이 다를 뿐이다.

1980년대 5공화국 군사독재 시절을 풍자하는 유행어 중 하나가 "땡전뉴스"이다. 뚜뚜뚜뚜 땡 하고 시계가 울리면 "전두환 대통령 각하께서"로 시작하는 뉴스를 냉소하는 유행어였다. "대통령 해외 순방"으로 시작하는 이 학교 공문을 보면서 5공 독재 정권의 땡전뉴스를 떠올리면 지나친 것일까?

교사 힘들게 하는 공문 처리, 이것이 교권 침해

오늘은 아직 마감되지 않았으니 어제 날짜인 2023년 9월 6일 하루치 공문이 얼마나 되는지 찾아보았다. 무려 111개 공문이 공문함에 올라있다. 가히 공문의 홍수라 할  만하다. 이 중 2개가 전 교사 공람으로 지정되어 있는데 그중 하나가 대통령 해외 순방 공문이다.

참으로 궁금하다. 학교에 매일 이렇게 홍수라고 할 만큼의 공문이 쏟아져야 하는 이유가 있을까? 이 중에 교사의 교육과 직접 관련된 것은 몇 개나 될까? 이 공문들의 내용이 뭔지 공문함을 열어보고 읽어보는데 교사가 들이는 시간은 얼마나 될까? 또 이 공문들을 처리해야 하는 교사가 들이는 시간은 얼마나 될까? 이 공문 읽고 처리하는 시간을 수업 준비나 학생 지도에 쓰면 어떻게 될까? 교육과 무관한 이런 쓸데 없는 공문들만 없어도 교사들이 최소한의 숨 돌릴 시간을 가질 수 있지 않을까?
  
교사들이 학교에서 가장 힘들어 하는 것 중 하나가 교육과 상관없는 공문 처리 등 행정에 들이는 시간이다. 대표적인 것이 바로 이 대통령 해외 순방 어쩌고 하는 공문 같은 것이다.

대통령이 해외 순방을 가는 것과 학교가 무슨 상관인가? 설마 지금이 쌍팔년도도 아니고 윤석열 대통령이 해외 순방 가는 것을 학생들에게 널리 홍보하라는 것인가?

대통령이 해외 순방을 가는 것은 대통령의 업무이니 대통령과 대통령을 모시는 분들이 최선을 다하면 된다. 학교는 대통령의 해외 순방과 상관 없이 평소에 하던 것을 하던 대로 하면 된다. 교사는 열심히 수업하고 학생 지도하면 되고, 학생은 열심히 공부하면 된다.
  
 아세안(ASEAN·동남아시아국가연합) 관련 정상회의와 주요 20개국(G20) 정상회의 참석 등을 위해 인도네시아와 인도를 순방하는 윤석열 대통령과 부인 김건희 여사가 5일 성남 서울공항에서 출국하며 전용기인 공군 1호기에 올라 환송객을 향해 손을 흔들고 있다.
ⓒ 연합뉴스
이게 대통령이 해외 순방을 간다고 달라지는가? 교사가 수업을 하지 말아야 하는 것도 아니고, 교사가 출퇴근 시간을 바꾸어야 하는 것도 아니다. 교사와 학생이 평소에 안 하던 뭔가를 특별히 하는 것도 아니다. 학교는 대통령 해외 순방과 상관 없이 그냥 그대로 굴러가면 되는 것 아닌가?

그런데 왜 대통령이 해외 순방을 갈 때마다 이런 공문을 학교에 내려보내고, 누군가는 그 공문을 처리해야 하고, 모든 교사들이 공람된 그 공문을 읽어야 하는가? 이해할 수 없다. 권위주의 정권 시절의 오랜 악습일 뿐 아무런 실익도, 아무런 명분도 없는 일이 아닌가?

교육청은 교육청대로 할 말이 있다. 교육청이 자체적으로 생산하여 하달한 공문이 아니라 교육부가 학교에 전달하라고 내린 공문이다. 그 공문을 학교에 전달하지 않으면 법을 어기는 것으로 형사처벌과 징계의 대상이 된다.

이번 9·4 공교육 멈춤의 날 관련해 교육부는 애초 참여 교사에 대해 불법 행위 운운하면서 파면·해임을 경고한 공문을 학교에 보냈다. 9·4 공교육 멈춤의 날 취지에 공감하고 교사 징계에 반대하는 조희연 서울 교육감을 비롯한 소위 진보 교육감들마저 공문을 학교에 이첩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 이런 이유 때문이다.

비겁한 변명으로 들리지만 어쨌든 현행법은 그렇다. 교육부가 학교에 전달하라고 교육청에 공문을 내리면 교육청은 이를 학교에 전달해야 한다. 이번 대통령 해외 순방 공문 역시 교육부 교육자치협력과에서 생산하여 내려보낸 공문이다.

참으로 모순이다. 교육자치를 지원하기 위하여 만든 교육부 부서인 교육자치협력과가 교육자치를 직접 담당하는 시·도 교육청에 공문을 보내고 이를 학교에 보내지 않으면 징계하거나 형사 처벌할 수 있다고 협박하는 것이 통하는 즉, 교육자치협력을 담당하는 부서가 사실상 교육자치를 훼손하는 세상이다.

물론 이전 정부에서도 이런 공문이 내려왔다. 2021년 6월 문재인 대통령의 해외 순방 시기에 비슷한 내용의 공문이 학교 공문함에 등재된 적이 있다. 이때를 제외하고는 2017년부터 2022년 문 대통령 재임 기간에 등재된 순방 관련 공문은 공문함에서 찾아볼 수 없다. 

확실한 것은 1년 4개월 정도 된 현 윤석열 정부에서 해외 순방 관련 학교에 등재된 공문이 훨씬 많다는 점이다. 대통령의 해외 순방을 교사들을 통하여 학생들에게 적극 홍보하라는 의미는 아니었을 것이다. 그냥 이전 군사독재 권위주의 정권 시절 관행이 청산되지 않고 있는 탓일 것이다.
  
 ‘공교육 멈춤의 날 - 서이초 교사 49재 추모집회’가 4일 오후 여의도 국회 앞에서 교사들이 참석한 가운데 열렸다.
ⓒ 권우성
 
대통령 해외 순방 공문 폐지가 교권 보장의 시작

교사들의 교권 보장 목소리가 하늘을 찌르고 있다. 교육이 가능한 학교를 외친다. 교사가 교육에 전념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들어 달라고 요구하는 것이다. 교육부와 교육청은 선거 때마다 교사의 행정 업무 부담을 줄이겠다고 약속한다. 그 시작으로 학교에 내려보내는 공문을 최소화하겠다고 한다.

언제나 공염불이다. 이 대통령 해외 순방 어쩌고 하는 공문이 여전히 학교로 내려오는 현실이 이를 증명하고 있다. 지금 교사들이 바라는 대통령 공문은 땡전 뉴스를 떠올리는 대통령 해외 순방 공문이 아니라 교권 보장에 대한 대통령의 결단을 담은 공문 아닐까? 

이런 공문을 학교에 더 이상 내려보내지 않겠다고 약속하는 것, 아니 다시는 내려보내지 않는 것, 이것이 작은 의미의 교권 보장이자 교권 보장을 위한 진심을 보여주는 가장 확실한 징표가 될 수 있다. 이주호 교육부 장관도, 윤석열 대통령도 다시 한번 깊이 생각해 볼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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